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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거짓말 "대통령은 평시처럼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Korea, Republic of 돌통 0 62 2020-02-13 23:55:36

1~3대 이승만 대통령이여~~



       

 이승만 대통령 휘호 '북진통일' (제3군단 방문기념. 날짜 미상.).▲  이승만 대통령 휘호 "북진통일" (제3군단 방문기념. 날짜 미상.).

ⓒ 우남이승만박사서집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



이승만은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1949년 6월부터 부쩍 대북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38선 충돌도 잦아지고 격화됐다.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하자 그에 상응하는 군사원조를 받고자 긴장을 고조시킨 감도 없지 않았다. 그 즈음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부가 무너졌다. 38선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는, 세계적인 화약고로 변했다.



1949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 김일성도 '국토완정론'을 제시해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실질적인 준비도 없는 맹탕이요, 허풍이었다. 이와는 달리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에서부터 탱크 등 막강한 원조를 받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6.25전쟁 바로 직전 38선 부근에서 적진을 경계하는 국군(1950. 6.).

 6.25전쟁 바로 직전 38선 부근에서 적진을 경계하는 국군(1950. 6.).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8선 일대. 갑자기 북쪽으로부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이 포성은 이후 3년 동안 한반도를 초토화시


킨 6?25 전쟁(한국전쟁) 발발 신호였다. 하지만 그 시각 38선 50km 남

쪽의 서울시민들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날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창덕궁(비원)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가 인

민군의 38선 남침을 보고받았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첫 보고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였다. 곧 이어 이 대통령의 지시로 긴급소집된 비상

국무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방 전황과

는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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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공격은 전면 남침이 아니라, 서

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주의자 이

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한 책략

같으며, 우리 군을 즉시 출동시켜 침략

자들을 일거에 격파하겠습니다."



그날 정오부터는 마이크를 단 군용 지

프차가 서울 도심지를 질주하면서 다급

하게 방송을 했다.



"3군 장병들은 지금 즉시 원대 복귀하라."



그제야 일부 서울시민들이 조금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도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38선 일대에서 전면전이 일어난 줄은 몰랐다.

그 무렵 서울시민들은 38선에서 우리 국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력으

로 인민군을 제압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

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치며, 국군 전투

력을 과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



이전 이승만 대통령과 군 수뇌부의 허세와 허풍은 막상 전쟁이 일어나

자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곧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6.25전쟁 중, 왜관 철교 복구에 치사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4. 18.).

 6.25전쟁 중, 왜관 철교 복구에 치사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4. 18.).




대통령의 피란행렬





6월 26일 새벽 이승만은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전쟁

발발 사실을 알리고 맥아더와 통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부관이 깨울

수 없다고 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맥아더 원수가 깨면 이렇게 전하시오.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

주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

군을 잘 재우시오."



곧 맥아더가 전화를 받자 이승만은 계속해서 분노를 터뜨렸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결국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네가 좀 더


관심과 성의를 보였더라면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

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



6월 27일 새벽 1시 긴급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됐다. 이때 비상 국무회

의에서 '천도'가 확정됐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당시 150만 서울시민

의 안정과 민생 그리고 피란 대책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반 시민들이 정부의 수도 이전을 알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 이승만 대통령은 다급하게 경무대를 빠져나

와 서울역에 대기 중인 특별열차에 올랐다. 이 특별열차가 서울역을

떠난 시각은 그날 새벽 3시 무렵이었다.



대통령의 피란행렬에는 부인 프란체스카, 김장홍 경무대 경창서장, 황

규면 비서 그리고 경호경찰 1명 등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탑승한 특별

열차는 기관차 1량에 객차 2량이 달린 다 낡은 3등 열차였다.



이 열차는 부산과 진해를 향해 출발했다. 그날 오전 11시 40분에 열차

가 대구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은 열차를 멈추게 하고 서울로부터의 정

보를 취합한 뒤 다시 서울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오후 4시 30분께 이승만을 태운 열차가 대전에 도착했다. 이미

대전에는 서울을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관료들이 상당수 있었다.



 홍천, 6.25전쟁 중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홍천, 6.25전쟁 중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녹음방송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현지에서 녹음방송을 통해 자신이 마치 서울

에 체류 중인 것처럼 위장해 서울시민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

고 연설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

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

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

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 리승만은..."



이 방송을 들은 일부 서울시민은 이 대통령이 경무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피란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전쟁 발발 66시간

만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첫 육성은 국민을 속였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 무렵,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인민군 탱크

가 서울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급보를 받

자, 그는 후퇴 중인 부하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인민군의

남하를 한강 이북에서 저지해야겠다는 판단이 앞섰다. 그는 즉시 공

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렸다.



한강교 곳곳에 미리 폭약을 설치해둔 채 발파 명령을 기다리던 공병들

은 이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폭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 철교의 일부 교각이 큰 폭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한강교 폭파 시각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사

전 예고 없는 한강교 폭파로 일대의 숱한 피란민들은 그 자리에서 즉

사하거나 수장 또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한강교 폭파로 서울시민들은

'독 안의 쥐처럼' 꼼짝할 수 없게 됐다.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 대전에 머물던 이승만 대통령은 또다시 자

신의 신변을 불안해 했다. 그래서 소수의 경호요원과 비서를 대동하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승용차를 타고 다시 대전을 빠져나갔

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대전-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통상적 경로가 아

니었다. 그의 승용차는 전북 이리로, 거기서 열차로 타고 목포로 갔다.

목포항에서 소해정을 타고 무려 19시간을 항해한 끝에 부산으로 갔

다.



7월 2일 오전에 부산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까지도 한강방어

선이 뚫리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그제야 "내가 잘못 판단했

어, 이렇게 빨리 부산으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라고 말한 뒤, 7월

9일 대구로 갔다. 이후 8월 18일에는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갔다.



그해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부는

적치하 시민들을 부역, 친공, 북한정권에 협력의 혐의로 처벌했다. 한

강을 용케 건넜던 '도강파'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이 대통령의 육성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들은 '빨갱이' '불

순분자'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해 10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5만5000여 명의 부역자를 검거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박명림 지음 나남출판사 발간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임영태 지음 들녘 발간 <대한민국사>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산책> 등 그밖에 문헌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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