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님이 UCLA (펌글) + 한국인들의 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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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남쪽 나라" 를 찾아온 김만철씨 근황을 찾아보았더니....
아드님이 UCLA 우주공학과 졸업했더라구요~~ ㅎㄷㄷ
=================================================================================== 20년 전 김만철씨가 찾았던 ‘따뜻한 나라’의 현실 김만철씨가 작은 배에 가족 11명을 태우고 남으로 내려온 지가 오는 8일로 20년이 된다. ‘원조 탈북자’로 불리는 김씨이지만 요즘은 자신의 표현대로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처지다. 67세가 된 그는 62세인 부인과 경기도 광주 야산의 10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살며 사탕봉지를 하루에 5000개 묶어 일당 1만원을 번다. 상처투성이인 손이 다 부르튼 김씨는 “북한 생활로 되돌아온 것 같다”고 했다 한다.
김씨가 이렇게 된 것은 사기를 당한 때문이었다. 강연료 등으로 한때 10억원의 재산을 모았던 김씨는 감언이설에 속아 선교기도원, 제주도 땅, 청진 꽃사슴 등에 투자했다가 번번이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모두 날렸다. 아직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 2001년부터 컨테이너에 살게 된 김씨는 2003년엔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탈북자의 사기 피해율은 21.5%로 5명 중 1명이 사기를 당했다. 우리나라 전체 사기 피해율 0.5%의 43배다. 가족 규모별로 수천만원의 정착지원금을 받는 탈북자들에게 사기꾼들이 모여들고 남한의 실정에 어두운 탈북자들이 이에 쉽게 속아넘어가는 탓이다. 탈북자 한 사람이 사기·폭력 등 8건의 범죄 피해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친구도 친척도 없는 탈북자들이 사기를 당했을 때의 막막하고 처절한 심정은 “북한에서 강제수용소에 끌려갈 때와 같았다”고들 말한다.
일가족11명 이끌고 脫北20년, 김만철씨는 지금 봉지 묶어 일당 1만원 밭농사로 끼니 이어 과학자 꿈꿨던 막내 서울大서 박사 과정 北생활만큼 어렵지만 남한 온 것 후회안해
손가락에 때묻은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밤 12시까지 사탕 봉지를 포장용 철사로 묶고 나면 손가락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또 부르튼 손으로 사탕 봉지를 묶는다. 하루 5000개를 묶고서 일당 1만원을 받는다. 1987년 2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사선(死線)을 넘어 ‘따뜻한 남쪽 나라’에 온 김만철(67)씨 부부는 이렇게 남녘 땅에서 스물 한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1일 낮 경기도 광주시의 야산. 10평 남짓한 컨테이너 집에서 만난 김씨와 부인 최봉례(62)씨는 머리가 하얘지고 얼굴에 주름이 많은 촌로의 모습이었다.
경기도 광주시에서 마을과 멀리 떨어진 야산에 컨테이너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김만철(67)씨. 인근 공사장에서 구해 온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겨울을 나고 있다/오종찬 객원기자
◆“북한 생활로 되돌아온 것 같습네다”
바람이 불어 컨테이너가 덜덜거렸다. 국방색 비닐로 엮은 지붕에는 고양이가 어슬렁거린다.
플라스틱 새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색 바랜 노란색 장판이 깔려 있었고, 방 한쪽에 너덜너덜해진 소파가 있었다. 방 입구의 반대편 아궁이엔 가마솥 2개가 놓여 있다. 부부는 공사장에서 주워온 나무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을 덥혔고, 컨테이너 바깥으로 연결된 3m 높이의 까만 플라스틱 굴뚝에선 희뿌연 연기가 뿜어 나왔다. 방안 한쪽 화장실엔 욕조 대신 목욕용 빨간 고무통이 놓여 있었다. 컨테이너 주변 반경 500m 안에는 김씨의 컨테이너뿐 다른 인가(人家)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왼쪽 가슴 주머니가 뜯어진 셔츠를 입은 김씨는 “북한 생활로 되돌아온 것 같습네다”라며 씩 웃었다.
“감회요? 좋은 세상에 왔다는데 20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한때 강연 요청이 물밀 듯 들어와 10억원을 모았지만 사기를 서너 번 당해 몽땅 날렸어요. 이북에서 ‘봐라, 남쪽 가면 김만철이처럼 쫄딱 망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어요.”
부부는 닭을 100마리 정도 키워 내다 팔지만 겨우 사료값을 막는 정도다. 야산 주인에게 빌린 밭 300평에 고추며 파를 심어 끼니를 잇는다. 부부의 점심 밥상은 흰 쌀밥, 김치, 멸치볶음, 옥수수 떡(함경도식)이 전부였다. 부인 최씨는 “고기를 언제 먹어봤더라…. (닭은 팔아야 하니 먹지 못하고) 계란을 대신 먹는다”고 했다.
◆셋째 아들 광호는 서울대 박사과정
부부는 “자식들이 밥벌이를 하는 게 다행”이라며 “일년에 한두 번뿐이지만 손자, 손녀들 보는 게 삶의 낙”이라고 했다. 큰아들 광규(42)씨는 홍익대 미대를 나와 공기업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다. 연애 결혼했고 아이를 셋 뒀다. 둘째 명일(35)씨는 신학대를 나와 중소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강원도 동해 출신 부인과 자녀 둘을 낳아 수원에서 살고 있다.
두 딸도 결혼해서 자리를 잡았다. 큰딸 광옥(38)씨는 운전기사인 남편, 아이 둘과 일산에서 살고 있다. 20년 전 영양 부족으로 다리가 휘는 구루병을 앓던 채로 남한에 왔던 둘째딸 광숙(33)씨는 탈북자 출신 한용수(33)씨와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다. 김씨는 부인 최씨의 생일날 큰사위가 보낸 꽃바구니를 가리키며 “우리 사위들이 참 잘해요. 액수는 적지만 용돈도 곧잘 챙겨주죠”라며 미소를 지었다.
탈북 직후 초등학생 나이에 북한 실상을 담은 일기를 공개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셋째 아들 광호(31)씨는 공부를 아주 잘했다. 고1 때 혼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광호씨는 캘리포니아대(UCLA) 우주공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안돼 지금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천체물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귀순 당시 “과학자가 되고 싶다”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김씨는 막내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 광호는 하버드도 갈 수 있었어요. 학비가 너무 많이 든다며 스스로 주립대를 선택했죠. 힘들긴 해도 학비 대주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젠 조금도 못 보태줘요. 죽기 전에 우리 광호가 교수가 되는 걸 보고 싶네요. 지금 신림동 고시원에 혼자 있을 텐데 방은 따뜻한지 모르겠어요.” ![]() 닉네임 비밀번호 └> 과객 2012-01-15![]() 닉네임 비밀번호 └> 이보셈 2012-01-15![]() 닉네임 비밀번호 └> 11 2012-02-07![]() 닉네임 비밀번호 ![]() ![]() 닉네임 비밀번호 └> ,,, 201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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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닐이 무슨 날잉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