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등초> 3 |
---|
쇳돌광산을 뒤로 하며 신참검문소와 고무산검문소를 지난 차는 어느덧 철의 기지인 청진을 거쳐 도자기생산지로 유명한 00에 도착한 것은 5시경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읍에서 동해바다 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그 곳은 북한군공군사령부 0사단 보위부였다. 원래 공군 0사단은 00군 00리에 있었다. 그러던 0사단이 차광수비행군관학교의 이동과 함께 재빠르게 이곳을 차지했다.
보위부는 사단본부로 향하는 200미터 지점에 있었다.
철조망을 두른 삼엄한 담이 건물을 지켜섰다.
오늘 우리 고장에서 여기까지 달려 온 거리는 도합 700여리였다. 나로서는 너무도 짧은 시간에 번개처럼 지나간 길고 험한 먼길이었다. 평상시대로라면 열차의 정상운행이 따라주어도 최소한 1박2일이라는 시간이 걸려야 했다. 한 시간에 40킬로씩 달려 7시간 만에 도착해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반탐과 <첩보>사무실에 끌려들어갔다. 하지만 수 백리길을 달려 온 피멍에 멍든 장딴지와 허벅지의 통증은 걸음마를 더디게 했다. 반대로 부장을 비롯한 일행 모두의 얼굴에는 임무완성에 대한 감격으로 들떠있었다.
“이 새끼 무릎 꿇지 못하겠어?”
사무실에 들어서자 어안이 벙벙해 앞뒤분간을 못한 나를 향해 소좌가 윽박질렀다. 그 서슬 푸름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질반질한 콘크리트 바닥을 향해 주저 없이 엎드렸다. 그러나 지친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몸의 균형을 좀처럼 잡기 어려웠다.
참다못해 지탱 점을 향해 손이 바닥으로 갔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처음부터 나의 행동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눈만 도사리던 소좌가 오른쪽 구석에 세워놓았던 32미리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수갑에 갇힌 왼쪽 손을 향해 내리찍었다.
“이 새끼 아직 정신이 덜 들었구나!!”
아찔한 허상과 나로서도 알 수 없는 괴상한 비명이 목구멍으로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더 이상 그들의 욕설은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멀쩡하던 왼 손 검지가 골절된 뒤끝이었다.
온 사지가 마비로 떨어있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이가 손뼉처럼 딱, 딱 소리까지 내며 마주쳤다.
손톱은 빠지고 장맛비에 뚫린 방파제처럼 강하게 뿜은 선지피의 얼룩에 바닥의 여기저기가 지저분했다.
그들이 청소용 밀대로 대충 닦아냈던 것이었다.
아픔도 잠시 후, 보이지 않던 부장이 북한군 상좌의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동무들!!! 이젠 좀 살살 하라우!! 사무실에서까지 이러면 되나?”
그의 갑작스런 인간취급에 말라져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통의 한계에서 미세하게 찾아 온 한 조각의 동정이 나의 감정을 이상한 코너로 몰아갔던 것이다.
“너 이곳에 왜 왔는지 알지?”
부장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계속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비법월경으로 중국에 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가족은 물론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담당경찰이나 보위부원들이라면 몰라도 이들의 권세를 이 나라 사람치고 모르는 봐는 아니었지만 한갓 감자 농사나 짓는 농부의 체포를 위해 내 월급의 몇 년 치에 해당하는 기름까지 태우며 요란스러운 연행을 강행한 이들이었다.
이들의 전광석화 같은 체포공작은 나의 갈피를 흐리게 했고 자기 굴을 잃어버린 겨울오소리처럼 멀쩡하던 인간을 순간에 바보로 만들지 않았는가?
부장이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나를 걸상에 앉힌 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박성철이를 모르는가?”
그랬었다. 이유는 박성철이었다. 그는 나와 5개월 전에 중국으로 비법 월경한 인물이다. 그때 길림 시에 있는 그의 친척집으로 갔었다. 헌데 문제는 노자가 없어 조선족자치주인 연길에서 한국인 유목사가 운영하는 교회에 들어가 그의 설교를 듣고 중국 돈 70위안을 받았던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박성철의 이름에 정신이 다 번쩍 들었다. 그의 사진들을 최종 확인하면서 나의 머리는 다시 텅 비어버리는 것이었다. 3개월 전에 체포된 20대의 박성철은 그들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8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0사단부대의 공군중위였던 그는 공군대학시절의 4년을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지혜와 학식이 풍부했고 중국연길교회의 여신자들도 부러워할 만큼 헌칠한 키에 탤런트 뺨칠 정도의 외모를 가졌다. 그런 그가 나에게는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랬던 박성철이가 그들의 갖은 악행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나와의 범행을 자백했다.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서 격렬한 존경심의 최고상징인 의지와 담력이 그에게는 부족했던 것이다.
사진을 거두고 몇 백 장에 달하는 그의 진술서를 오른 손에 잡으며 부장은 자기소개부터 했다.
“난 이곳 2부장이다.(북한군보위부는 일반사건담당을 1부가, 정치범대상자는 2부라는 반탐기관이 담당했다. 거기에 3부, 4부, 그리고 5부까지 이어졌다.) 난 너에게 용의자와 취급자의 관계를 떠나 사내 대 사내로서 투철하게 말하고 싶다.”
일단 부장은 자기의 증명서부터 보여주었다.
검문소들을 무사통과했던 바로 그 의문의 빨간 증명서!!! 부장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물음표의 존재감을 강한 자신감에 넘쳐 펼쳐보였다. 그 증명서를 보는 순간, 심장의 박동은 터질 것만 같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사원”이라고 쓴 빨간 뚜껑의 표지가 30대 청춘의 빛나는 눈동자를 놀래었다. 다음 장은 김일성의 초상이 붉은 당기의 정중앙에 위치했고 그 옆 페이지에 그의 사진과 이름, 성별, 출생지 및 출생년도가 표기되었다. 또한 “이 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사원임을 증명함”라는 글발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실어증에 걸린 환자처럼 멍한 나를 향해 몇 장인지 알 수 없게 부랴부랴 폐이지를 번지던 부장이 마지막 장을 보여주었다.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었다.
“1, 이 증명서를 휴대한 동지는 우리나라의 모든 비행기, 선박, 기차 등에 무임승차할 수 있다.”
다음의 글들은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이조봉건시대에 있었다던 암행어사가 21세기의 현실 형으로 나타났다는 그 사실에 눈앞이 캄캄했던 것이다. 부장은 계속했다.
“난 지금까지 200여개의 사건을 처리했다. 그래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는 자랑이 아니라 내 손에 걸리면 일단 입을 열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소리다. 알겠는가?”
“알았습니다.”
200여개의 사건, 그것은 200명의 사람들이 이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 귀신도 몰래 정치범으로 감금되었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얘기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땅의 공화국영웅이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특출한 공적이나 위훈을 세운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명예였다. 그래서 그 칭호에 대한 하사는 반드시 북한독재자가 진행했다. 어려서부터 받은 세뇌에 기초해서라도 6.25때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육탄이 되어 영웅으로 받들렸던 이수복이나 강호영이와 같은 인간들이 나의 머리에는 전부였다. 부장처럼 사람 잡이에서 위훈을 세워 영웅이 되었다는 것은 실로 상상 밖의 일이었다.
결국 내 앞에 서있는 수사관은 내가 상대할 능력조차 없는 거인 중의 거인이었다. 36계의 줄행랑을 놓아야 할 마당에 빼도 박도 못할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가증스러운 이 손아귀에서 파리 목숨에 불과한 나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도 잠시 부장은 입에 거품을 물며 대덕산 담배 한 가치를 꺼내 한 모금 깊숙이 빨았다.
“박성철이를 취급하는 과정에 우리는 너의 대한 요해를 다 끝냈다. 우리가 본 네 놈은 똑똑한 놈이다. 8년의 군사복무를 하면서 기본계급출신 따위가 감히 우리와 같은 핵심계급이 되어보려고 무지 애를 썼더군. 하지만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랬다고 너무 설쳐댔어. 결과 우리가 죽이지 못해 살려 놓은 적대계급으로 전락되었거든. 너의 운명은 현재 내가 피우고 있는 이 담배 한 가치 보다 못해!! 알겠는가?”
부장은 피우던 권연을 추켜들며 회유절반, 위협절반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 테니까 조용한 방에서 곰곰이 생각하고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요구하는 건 단 하나, 박성철이와 만난 그 시각부터 헤어진 그날까지 9박10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1분1초도 빼놓지 말고 영화를 보듯 선명하게 진술하는 것이다. 알겠는가?”
텅 비었다가 엉킨 전기회로처럼 복잡한 나의 머리를 향해 그는 더 이상의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부과장!! 이 자를 끌고 가!!”
부과장인 소좌에 의해 끌려간 감방은 2평도 되지 않는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출입문은 3중의 철문이었고 A4크기의 철근으로 무장한 뙤창문하나가 북쪽을 향해 달려있었다.
냉기와 습기를 동반한 썩은 피비린내가 방안을 진동했다. 그 누군가의 핏자국들이 곰팡이서린 벽체의 곳곳에 깊숙이 스며있었다. 등골이 오싹하면서 또 다른 공포가 느껴졌다.
그나마 유치장과 달리 감시하는 간수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때를 만난 듯 긴장감은 사라지고 사지에서 달려드는 통증과 오한으로 몸은 오그라들고 눈의 실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인간의 한계를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오장육부가 뼈 없는 살처럼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 벌써 간고한 고통의 하루해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의 나날들이 겹칠수록 이 땅에서의 나에 대한 배신감은 더해만 갔다. 진퇴양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지옥의 불가마가 따로 없었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나를 구원해줄 따뜻한 손길은 보이지 않았다.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는 티켓판매장소와 같은 이 사지 판에서 정신 줄을 놓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앉아서 눈물이나 짜고 괴로워하고 모대기고,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혹한 학대일 뿐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잔임 함과 노련함으로 체질화된 수사관과 같은 인간들의 공격만큼이나 무서운 대상은 사실, 나 자신의 나약함이었다.
나약해진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지나간 과거의 귀중함에서 오늘의 나를 가다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실 철없던 초등학교, 중학교시절에는 어떻게 하나 공부라도 잘해서 간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였건만 출신성분의 격차로 다 가게 되었던 영재학교에서 밀려나고 대학까지 포기했다. 군복무시절에는 엄청난 뇌물을 들여 장교학교로 진출하였지만 큰 뜻은 고사하고 되려 기본계급에서 적대계급으로 밀려났다.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지난날들의 괴롭힘에 시간은 방안을 향해 캄캄한 어둠만 선사했다. 다행히 공기구멍인 뙤창문으로 희미한 빛이 흘러들었다. 신비로움에 가까운 그 빛을 따라 망가진 몸을 추스르며 나는 기어가기 시작했다. 1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직일관실(당직실) 창문에서 뜻밖에도 촛불이 가물거렸다.
우리 백성들은 정전의 탈피로부터 모두가 디젤등잔을 사용했다. 조금 더 어려운 집들은 그것마저 없어 소나무옹이로 방안을 밝히던가 아니면 아예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초 한 대의 값이 백성들에게는 하루인건비와 같았기에 누구도 감히 그것을 살 엄두를 못 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는 그 곳에 권총을 휴대한 담당당직관이 술잔을 기울고 있었다. 담배까지 꼬나든 그의 얼굴엔 팔자가 늘어졌고 환희는 그칠 새 없었다. 그의 취중에 제 몸을 불태우는 촛불의 운명이 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야속하기도 했다.
우연 중 두 배, 세 배의 크기로 점점 나의 눈을 부각시켜주는 촛불, 초점을 향해 다가오는 그 불빛의 운명이 문득 나를 깨우쳤다. 만약 저 촛불을 바람 부는 등판에 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순간에 꺼져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인간 밑바닥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새기면 새길수록 머릿속의 정리는 오직 하나, 강도 적 논리에 의해 이중적인 잣대에서 규정된 적대계급이나 기본계급출신들은 이 땅에서 언제나 바람 부는 등판에 세워진 촛불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2부장의 말대로 왼뺨을 치면 오른 뺨을 내대야 하고 살점이 뜯겨도 머리통이 박살나고 이가 부서지고, 손가락이 골절되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으며 그의 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담배 한 가치 보다 못한 최하층의 싸구려가 바로 우리들의 운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등초의 운명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부류였다. 절대 복종이나 순종으로 아버지, 어머니처럼 굶어죽어야 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버둥거리면 감방을 두 어께에 멍에처럼 걸머쥐는 것이었다. 특히 나와 같은 부류는 죽을 때까지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언제나 위험을 감수해야만하였다.
지난 30여년을 돌아보는 내 조국의 현실은 이처럼 냉담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 그 품에서 사랑보다 먼저 조국을 알았고 배고픈 소년의 설움보다 미래가 없는 청년의 슬픔을 더 뼈아프게 심장으로 새긴 내가 아닌가?
때로는 저 멀리 백두산 정상을 바라보며 고구려의 아득한 옛 판도를 자랑높이 바라보기도 하였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총검의 숲을 헤치며 차디찬 두만강의 살얼음판에 망국의 뜨거운 눈물을 뿌리기도 하였던 이곳, 그곳은 바로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하는 고향이자 어머니의 품이었고 어머니의 품이자 또한 조국이었다. 그러기에 내 그 품을 떠나 생존권을 위해 사선의 언덕에 나설 때면 다 찌그려져가는 널빤지문가에서 눈물지시며 손 저어 바래주던 앙상한 어머님의 주름 깊은 얼굴은 독재자에 의해 짓밟힌 내 조국의 슬픈 모습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모든 비극은 우리등초들에게 있어 진정한 조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핏자국이 역력한 콘크리트벽체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한 치 앞도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의 두려움을 가시려했다. 저 멀리 관모봉정상으로는 벌써 반병신이나 다름없는 나의 얻어터진 피부와 골격을 향해 새벽의 찬 공기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맺는말 이 스토리는 내가 직접 겪은 사연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그로부터 0년 후, 천신만고 끝에 꿈결에도 그리운 대한민국의 품으로 이 몸은 안길 수 있었다. 이 땅에 안겨서야 비로써 나는 지난 30여 년을 북한의 더러운 시궁창에서 헤매던 그 삶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으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좋은 황금시절만 맛볼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이 땅에 정착한지도 10여 년이 흘러갔다. 이 기간 동안 태극기를 따라 변함없이 한길만을 달려 온 나였다. 대한민국의 가는 길이 진정으로 민족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길이었고 사람들을 가장 참된 길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그 어떤 동요나 두려움도 없이 오직 한 우물만 파며 열심히 살아왔다. 결과적으로 오늘은 마음의 부자가 되었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고급기능기술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북쪽에서의 30년 세월과 남쪽에서의 14년의 세월은 결국 극과 극의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우리등초들에게 있어 이 땅의 남쪽은 지켜야 할 조국이었으며 북쪽은 반드시 찾아야 할 조국으로 되었다.
조국의 귀중함을 실생활로써 느꼈기에 태극기를 따라는 길에 있어 나는 믿음이 아니라 설사 역적의 오명을 쓴대도 따를 것이고 두 눈이 먼대도 지팡이를 짚어서라도 따를 것이고 땅 속에 묻힌대도 넋이라도 따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오늘도 고통과 불행을 강요당하는 북한의 모든 천만 등초들의 가슴 속에 간직된 필승의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 지금까지 서툴었고 부족했던 저의 긴 글을 보아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가슴이 너무 아프네요........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탈북과정이 없는 것은...어떤 사연때문엔가요.
다음회를 기다립니다.
저는 북한개혁방송 대표 김승철입니다.
전화 번호는 010-8952-2576 입니다. 사무실 번호는 02-2242-6512
시간이 흘러 좀 더 안정되는 시기가 오면 등초4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인터넷 상이라고 저질처럼 노는 것이 참 위대하신 우리가 보기에 안타까움이 두배가 되네요. 저런 인간 말종들이 존재하기에 이 세상이 더렵혀 지니까요. 어떻게 저런 망아지 같은 애들이 걸적거리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