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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항일무장 투쟁의 진실..
Korea, Republic of 돌통 0 168 2019-03-12 16:42:40

처절한 기다림 끝에 이 땅에도 해방이 찾아왔다.

 

그리고 해방의 감격과 함께 일본군도 퇴각했다.

 

이때 평양 시민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45년 10월, 그는 소련 군정이 주최한 평양시민 환영대회에 나와 대중연설을 함으로써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군중들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김일성, 그가 군중들의 기대와 달리 너무 젊다는데 있었다.

극작가 오영진은 당시 평양 군중대회 분위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해방 후 최초의 대규모 군중대회가 노전사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기 위해 열렸는데, 노장군 대신 젊은 청년이 나타나자 군중들 사이에 가짜라는 공감대가 전류처럼 확산했다"라는 것이다.

 

혹 군중 앞에 나타난 김일성이 아닌 신출귀몰한 노장군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시 유격대 활동을 했던 만주의 상황을 고려하면 노장군은 당시 신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군중들이 노장군을 기대했던 데에는 당시 조만식,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의 나이가 60대였다는 것도 원인이 있어 보인다.

 

항일 명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었던 김일성...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선우진은 그러나 다른 김일성 장군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등장 이후 남한에서 맹위를 떨친 김일성 가짜설의 진원지도 이 노장군 신화였다.

문헌상 가장 먼저 김일성 가짜 설을 들고 나온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은 만 33세에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은 소련 사관학교 출신의 소련군 소좌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실제 김일성은 1920년대 국내에 널리 알려졌던 일본 육사 출신의 전설적 항일 명장 김광서 장군이며 북한의 김일성은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 김경천이라는 가명을 썼던 장군이 진짜 김일성 장군이었을까?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 중에서도 특히 1937년에 있었던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왔다.

장백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가 국내로 진공, 일제 관공서를 습격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김일성 가짜 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보천보전투의 김일성 역시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이 보천보 사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이튿날 호외를 내는 것을 필두로 사건 속보를 전했다.

이어서 조선일보 역시 피해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보천보는 혜산진 근처의 면 소재지였는데 당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혜산 일대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항일 빨치산과 독립군들의 출현이 그만큼 빈번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의 감시 또한 삼엄했는데 서슬 퍼렀던 일제의 시설들이 쑥대밭이 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보천보 사건 당시 일곱 살이었다는 강순명씨는 부근 마을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날 밤의 상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보천보를 습격한 이들은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에 불을 질렀고 부락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마을 곳곳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들이 실리기도 했다.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그것은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일제는 혜산 등 인근 세 개 경찰서에 총동원령을 내린다.

그리고 김일성 부대를 국경 밖까지 맹렬히 추격해 가는데 그 과정에서 일경 일곱 명이 사망하고 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는 보천보를 습격한 무리들이 김일성 일파로 판명됐다는 기사를 실었다.

보천보 사건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이 국내에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장백을 근거로 출몰했던 그의 이름은 지면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특히 그 무렵 국내에서 발행되던 '삼천리'라는 잡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김일성과 관련한 특집 기사들을 흥미 있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당시 언론들은 일제하였기 때문에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그를 비적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가짜 설은 보천보 당시 서른여섯 살이라는 김일성이 그해 사망했다는 보도와 관련 있다.

극비문서인 일본 외무성 자료에도 비슷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의 정보보고에 해당하는 문건인데 당시 보천보를 습격했던 김일성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만주군에 의해 사살됐을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는 북의 김일성...

정보 보고대로 김일성이 정말로 사망했다면 해방 이후 나타난 김일성은 가짜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해방 후 발간된 만주국군은 김일성을 사살했다 해서 포상까지 했으나 그가 다시 출몰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정보보고가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보천보 습격 이후 이번에는 김일성과 연계했던 혜산 일대의 국내 조직에 대한 대대적 검거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 혜산 사건의 판결문은 보천보를 습격했던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였다.

 

판결문에 기재된 김성주의 한자와 일치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원 자료를 봐도 당시 김일성의 출생지와 북한 김일성의 출생지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서는 해방 후 김일성의 숙정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던 이들조차 이의가 없는듯하다.

지난 1989년 한국을 방문했던 이상조씨는 인민군 부참모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보천보의 김일성이 북의 김일성임을 인정했다.

 

그런데도 남에서는 분단 이후 김일성 가짜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고 이러저러한 가짜설을 집대성한 이가 김일성 열전을 낸 이명영이다.

그는 70~80년대 당시 만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증언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4인의 김일성 설을 들고 나온다.

 

첫 번째는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金光瑞), 두 번째는 보천보 전투를 지휘하고 그해 사망한 김일성, 세 번째는 그의 사망 후 부임한 후임자 김일성, 네 번째가 바로 해방 후 평양에 나타난 북의 김일성이라는 것인데 근거 없는 이런 김일성 가짜설은 어디서 연유됐던 것일까?

 

김일성 가짜 설은 해방 이후 그와 관련된 책을 낸 저자들의 과거 경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남한에서는 항일투사들을 쫓던 토벌대 출신들과 일제와 화합했던 인물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김일성 가짜설을 유포 시키는 것이 또 하나의 생존 방법이 됐던 것이다.

 

김일성 부대를 쳤던 간도 토벌대도 조선인이 주축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김일성 가짜설이 정권에 의해 보다 체계화된 것은 박정희 시절이다.

민주 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다 해방을 맞았던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한반도 반쪽을 통치하는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김일성과 대비되는 과거 전력은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60년대 발간된 그의 전기집에서는 한 권력자의 이런 고뇌가 읽혀진다.

그는 만주군에서의 활동을 공비를 토벌한 반공의 궤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남북이 대치해 있기는 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전의 지도자들에겐 굳이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승만도 해방 정국에서는 김일성과 같은 추앙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일성 가짜설의 집대성판으로 평가된 이명영의 저서가 세상에 나온 것도 바로 박정희 정권 때였다.

그는 일본을 오가며 많은 증언들을 모아 김일성 가짜설을 체계화했는데 당시 그를 만났던 박갑동씨의 말에 의하면 정권의 지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명영의 가짜설 배후에는 박정희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배후설을 부정했다.

 

7.4남북공동성명의 밀사였던 이후락,

남한의 권부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89년 한 월간지가 최초로 공개한 당시 평양 밀담의 내용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후락씨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담은 오페라를 본 후 자신도 그가 항일 투쟁을 했던 심정으로 평양에 왔다고 했다는데, 김일성 가짜설이 횡행하던 시절 남한의 권부가 이미 그의 항일운동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또 있다.

 

이후락씨보다 앞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은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였으나 김일성이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 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김일성이 완전 가짜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라고 교정하는데 있어서는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 문화는 무서운 존재였다."

 

실제로 지난 반세기 우리 사회에서 김일성의 항일 투쟁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다.

68년 차관 관련 기사를 실었던 신동아는 그전에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이 담긴 원문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돼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결국 홍승명 주간 등 세 명이 구속됐다.

 

김일성 가짜설은 냉전체제가 무너졌던 80년대 말에도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그렇다면 김일성 가짜설이 고착화된 책임이 비단 남한의 정략적 유포에만 있었을까?

그것은 분명 아니었다.

 

가짜설이 확산된 데는 김일성 신격화 과정에서 항일 투쟁 경력을 지나치게 부풀려온 북한의 선전술도 큰 몫을 했다.

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쏟아져 나온 보도들은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상반된 것인가를 보여준다.

분단된 이 땅에는 두 가지 모습의 그가 존재해 왔다.

 

김일성은 무엇보다 민족 비극을 불러온 한국전쟁의 주범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 반세기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조차 어렵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새삼 김일성, 그가 누구인지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중국 길림시,

이곳은 김일성이 한때 성장기를 보냈던 곳이다.

1927년, 15살 소년 김성주는 송화 강변에 위치한 육문중학으로 진학하는데, 1912년 평양 대동군에서 태어난 그는 3.1운동 직후 가족과 만주로 이동한다.

이후 여러 곳을 거쳐 어머니의 권유로 육문중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 육문중 시절은 훗날 소년 김성주의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당시의 학교 통합 건물이 남아있는 교정에는 세운지 오래되지 않은듯한 김일성 동상이 서있다.

육문중은 주로 중국인들이 다니는 명문 중이었다고 하는데 김일성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도 이곳에서 익힌 것이라고 한다.

 

소년 김일성은 이 시절 처음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는데 소년회 등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절친한 교우였던 손원태씨,

그는 김일성과 지냈던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은 지난 91년부터 매년 미국에 정착한 어린 시절의 친구 순원태를 초청했다고 한다.

그가 무엇보다 손원태를 환대한 것은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던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29년 가을,

김일성이 길림 감옥에 수감됐을 때 민족주의자였던 손정도 목사가 그를 구명해 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육문중을 중퇴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김일성...

그가 항일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알려져 있다.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파죽지세로 만주를 점령해 나갔다.

그러자 만주 곳곳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들이 일기 시작했다.

 

연변 자치구,

당시 이곳의 간도 지역은 주민의 8~90%가 조선인이었는데, 그들에게도 이 시기는 참으로 혹독한 시절이었다.

바로 이곳 연변 자치구 안도현에는 항일 유격대의 역사를 말해주는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명월구 회의라고도 불리는 일명 옹성라자회의,

1931년 12월, 이 지역의 중국공산당 소속 공산주의자 40여 명이 모여 항일 유격대 창설을 결의한다.

일제의 만주 침공에 맞서 본격적인 항일 유격투쟁의 신호탄이 점화된 것이다.

 

그 즈음 일제의 관원 자료에는 김일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김성주, 즉 김일성은 당시 무송, 안도 지방의 조직 위원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길림을 떠난 김일성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주로 건너온 김일성이 항일 유격 별동대를 조직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회의 결의에 따라 유격대를 조직하려던 그는 안도현 소사하 지역으로 숨어든다.

그가 이 무주마을 근처로 근거지를 정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한 후 육문 중학 시절부터 따로 지냈던 어머니 강반석이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외딴 집에서 그의 동생들과 기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의 어머니가 주거했던 집터는 논으로 변하고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중반까지도 어머니 강반석의 묘는 이곳에 있었는데 이후 북한으로 이장을 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김일성이 최초로 항일 유격대를 조직했다는 기념비적 장소를 알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의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서 그는 16명의 청년들을 모아 항일 유격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소나무 아래에는 기념비가 서 있는데 비문에는 32년 4월 25일 항일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이 조선 인민군을 창설한 날이 48년 2월 8일인데도 불구하고 인민군 창설 일을 4월 25일로 바꾼 것도 바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안도에서의 유격대 결성은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독자적 행보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것은 30년대 중국 공산당에 김일성 신상이 기록되어 있는 미공개 문서이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은 32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부대원 사이에 상당한 신임을 받은 듯하다.

32년, 민족주의 계열인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은 별동대를 조직한 김일성이 찾아오는데 양세봉 밑의 참모장이었던 김학규는 자서전에 그가 공산청년 수 십 명을 데리고 와 무기를 요청했다고 적고 있다.

 

연길에서 안도로 건너가 유격대를 조직한 김일성은 이후 조선혁명군과의 연합이 좌절되자, 중국 공산당 소속의 왕청유격대로 합류한다.

만주사변 이후 항일 유격대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초조해진 일제는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 이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항일 무장 세력들이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이게 되는데, 김일성이 합류한 왕청유격대도 소왕청 첨아산 기슭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933년 봄,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유격 전과 중 손에 꼽는 소왕청 전투가 벌어진다.

첨아산 뒤쪽 유격대 사령부를 일본군이 공격한 것이다.

바로 그 첨아산은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이 있던 왕청유격대는 100여 명이고, 그중 10% 이상이 조선인이었는데 이들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이끌어 냈다.

이것은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알아내기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항일 유격대들은 산 아래 유격호라는 마을을 결성해 식량 등 물자를 조달했다고 한다.

당시 사령부 터에는 마을 사람들이 쓰던 우물도 있었다고 하는데 위쪽으로 한참을 올라간 산 중턱에 이곳에 항일 유격 근거지가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중국 정부가 세운 비석이 있다.

 

87년 왕청현 지방정부가 세운 비석에는 32년 12월부터 유격 근거지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소왕청 전투를 끝으로 왕청현 유격대는 근거지를 옮긴다.

 

30년대, 만주지역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그리고 김일성이 있던 왕청유격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들 간의 연합도 활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년현성 전투인데 김일성이 지휘하던 왕청유격대와 동천의 독립군들이 연합, 대승을 거뒀다.

 

승전을 거듭하던 김일성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30년대 중반, 간도 지역 조선인 항일투쟁 세력들이 대거 희생되는 이른바 민생단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도 그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는 일제가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는 차별 정책을 쓰면서 조선인들이 첩자로 몰려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되는 항일 투쟁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

 

김일성 부대에서 활동했던 김선은 심지어 옥수수 씨앗을 먹었다는 이유로 민생단으로 몰렸다고 한다.

첩자로 몰려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됐지만 김일성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의 상관인 중국인 간부 주보중이 바람막이가 돼 주었다고 한다.

김일성에게 최대 위기였던 민생단 사건,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기회가 됐다.

상대급인 많은 조선인 투쟁가들이 희생되면서 자연히 20대인 그가 상급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후 만주지역의 항일 무장세력들은 36년,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대규모 부대로 재편된다.

이 항일연군은 조중연합 형태로 30년대 중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주도하게 되는데 김일성 등 조선인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만주 전역에 걸쳐 11개군까지 편제를 갖춘 동북항일연군은 한때 그 규모나 세력 면에서 일제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 시기 김일성이 속한 유격대는 조선인들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여성대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의 2군 육사 사장으로 있던 시절, 그 부대에 있던 김선은 여성대원들의 고충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남성 부대원과 똑같은 활동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30년대, 흔히 김일성 부대라고 불렸던 2군 육사는 백두산 장백현지구로 그 활동 무대를 옮긴다.

당시 신문지상에는 국경 근처 무송 등이 야합 세력에 의해 습격 당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를 시도했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일본군으로부터 부대 안에 첩자를 보내 정탐을 할 만큼 주목을 받는다.

 

북한이 가장 대내외에 내세우는 보천보를 습격한 것도 이 동북항일연군 제2군 육사 사장 시절이었다.

추격 경관 일곱 명 사망, 여섯 명 부상, 다른 전투에 비해 결코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조선인 무장세력들이 국내에 침공, 일제에 일격을 가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은 동, 남만주을  중심으로 한 제1로군, 길종지역의 2로군, 북만주의 3로군 편제였다. 그런데 1939년 일본군이 7만 5천 명 규모의 대규모 간도 토벌대를 조직, 공략에 나서면서 한때 3만 명에 달하던 동북항일연군은 1,400여 명 정도로 축소되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 무렵 목재소를 습격하고 달아나던 김일성의 2방면 군은 이곳 홍기하에서 그 뒤를 쫓던 토벌대와 또한번 격전을 치르게 된다.

김일성 부대는 뒤를 쫓는 마에다 부대를 산 쪽으로 유인, 매복해 있다가 섬멸시켰다고 한다.

 

산 중턱에는 세운 지 꽤 오래돼 보이는 중국정부가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만주 무장세력들의 패색이 깊어가던 40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김일성의 당시 직책은 항일연군 1로군 2방면 팀장이었다.

비문에 마에다 부대 120여 명을 섬멸했다고 되어 있으나 일본의 공식 자료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일본의 관원 자료는 김일성 비가, 즉 공비 전과의 접전으로 58명이 전사하고 27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의 대규모 토벌이 시작되면서 동북항일연군도 붕괴되고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제의 집요한 공작으로 항일세력 주요 간부들의 투항도 줄을 이었다.

김일성이 속한 1로군 사령이었던 양정우도 결국 일본의 패망을 보지 못하고 처참하게 사살되고 말았다.

당시 이런 사망자와 귀순자가 3,0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1940년 10월,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부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향했다.

소련에 건너온 그는 브로시로프를 거쳐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렀다. 

이곳 88여단 시절의 상관이었던 주보중은 당시 그의 일기에 김일성이 대원 16명과 함께 소련 현지에 도착했다고 적고 있다.

 

김일성이 배속된 88여단은 소련 극동전선 산하 사령부였는데 소련으로 퇴각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을 이뤘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김정숙, 김정일 등과 함께 생활했는데 주보중 등 상관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주보중은 이 88여단의 여단장, 김일성은 대다수가 조선인인 제1대대의 영장, 즉 대대장이었다.

소련군 비밀문서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은데 그의 소련 이름은 첸지첸이었다.

소련에 안착한 김일성이 해방 후 그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최현, 안길 등을 만나게 되는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소련에 머물던 그 시기, 김일성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한동안 북한은 그가 40년 말부터 해방 당시까지 소련에 체류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당시에도 만주에서 소유격대 활동을 하다 퇴각하는 일본군을 물리치며 귀국의 장도에 올랐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을 내세웠던 그에게 소련군 장교로서의 입성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러나 이후에 발간된 김일성 회고록은 해방이 되고 한 달쯤 뒤인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귀국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이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속속 국내에 입성했다.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1945년 한 우익단체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해방 정국에서의 그의 위상을 짐작게 한다.

 

지도자로 적당한 인물에 여운형, 이승만, 김구에 이어 6위에 올랐다.

또 내각의 국방부 장관격인 군무부장 1순위로 뽑히기도 했다.

그만큼 해방 직후 대중들은 그의 항일 투쟁 경력을 높이 평가했다.

 

33살의 김일성,

그가 쟁쟁한 정적들을 누르고 이북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항일 경력과 소련 군정의 지원 때문이었다.

 

해방 당시 북에는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이 있었다.

그리고 남에는 같은 공산주의 계열의 강력한 라이벌 박헌영이 있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정국이 시작되면서 조만식은 반탁의 대표 주자라는 점에서, 박헌영은 미국이 진주한 남한을 연고한다는 점에서 소련 군정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해방 정국에서 소련 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마침내 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설, 수상에 오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한반도 남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김일성, 그의 이름에는 분단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

 

분단 반세기 만에 마침내 남북 정상이 만났다.

그것은 분단의 시대에서 통일의 시대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작은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대학 캠퍼스에 김일성의 항일 투쟁들을 다루는 이른바 김일성학 강의가 등장한 것이다.

의외로 적은 수만이 김일성 가짜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80년대 태어난 이들에게는 관심사도 아니었다.

이미 강의에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그의 항일 투쟁을 인정했다.

 

지난 1월 imbc를 통해 네티즌 1,4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의 결과도 지난 반세기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김일성 가짜설의 공고한 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네티즌들의 연령대가 젊은층이기는 하지만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이 사실일 거라는 응답이 49%에 달했다.

더구나 사실이라면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응답도 50%가 넘었다.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에 머물던 40년대에는 연안의 조선의용군이, 중경 임시정부의 광복군 투쟁이 있었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 시절,

조국 해방을 위해 몸을 던졌던 수많은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 투사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민족독립운동사에 큰 흐름 속에 김일성을 어디쯤 자리매김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일까?

김일성...

그는 역사 속에 묻혔다.

그리고 이제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야 할 세대들에게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숙제로 남아있다.[이제는 말할 수 있다] 

[출처]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작성자 woo19wcc 출처'동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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