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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화려한 도발, 그 색채의 정수를 만나다.
Korea, Republic of 총각선생님 0 362 2019-10-02 21:00:59

신윤복은 영조 34년(1758년)에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 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가권(可權)이며 뒤에 윤복으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가권(可權)으로 밝혀진 것은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서 신가권이라는 도서가 찍힌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신윤도(윤수)와 여동생이 1명 더 태어났다.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2]으로, 

암헌공 신장(申檣)의 다섯째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였던 신공섭의 다섯째 아들인 신수진의 7세손이었다. 

그러나 신수진이 서자였기에, 

그의 후손들은 중인(中人)의 신분으로 낮아져 수십 명의 역관과 율관, 운관으로 활동했고, 

신세담ㆍ신일흥ㆍ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왔다. 

그의 가계도 20세기 이후에야 몇몇 문헌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서자의 후손이라서 족보에서 생략되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종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아버지 신한평도 도화서의 화원으로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조 초기에 와서 그가 그린 그림 중 한 그림이 알아볼수 없다 하여 

관료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하기도 했으며, 

관직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고, 산수·인물·초상·화훼를 잘 그렸다.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관원이 되는데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양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양반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 연애와 애환을 묘사했으며 해학이 담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 사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든다. 

그가 남긴 작품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데, 

대략 1813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사망일과 사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요 작품으로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미인도(美人圖)》 등이 있다. 

주로 간의 사랑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은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풍속화첩》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女人)〉,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이 있고, 

《미인도》와 《풍속화첩》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9C%A4%EB%B3%B5


' 여흥 '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

 

[선유도(船遊圖) 주유청강 (舟遊淸江) : 맑은 강 위에서 뱃놀이를 하다] 

 

왕도(王都)의 화려한 문물은 여유있는 귀족생활의 격조 놓은 운치에서 찾아볼수 있다.

녹음이 우거지고 강심에 훈풍이 일어나자, 몇몇 자제들이 한강에 놀이배를 띄우고 여가를 즐기는 것 같다.

외형적인 호사를 금기로 여기던 조선시대 귀족들이니, 호화선을 꾸밀 리 없고

다만 일엽편주에 차일을 드리우고, 풍류를 아는 기생들과 젓대잡이 총각 하나를 태웠을 뿐이다.

 

신록이 그늘진 절벽 밑을 감돌아 나가는 뱃전에서는,

유량한 생황소리와 동랑(洞朗)한 젓대소리가 섞바뀌어 일어나서 강심에 메아리 지고,

일렁이는 잔물결은 뱃전을 두드리니. 여기에 詩情이 흐르는 사랑이 무르익는다.

뱃전에 엎디어 스치는 물살에 손을 담가 보는 여인이나,

이를 정겹게 턱을 고이고 지켜보는 선비의 모습에서도 그렇거니와.

어깨를 감싸고 담뱃대를 물려주는 한쌍의 남녀에게서는, 시샘이 날 만큼 농밀한 사랑이 엿보인다.

 

이런 중에서도 남의 일에는 아랑곳없이 망연히 뒤짐지고,

 시상에 잠기는 여유를보이는 것은 역시 왕조귀족의 몸에 밴 교양이라 할수 있겠는데,

삿대질에 열심인 뱃사공도 자기일에 충실하고 있어서.

음악을 연두주하는 두사람의 모습과 함께 질서있는 조화를 이룬다.

 

 

[쌍검대무(雙劍對舞) : 양손에 칼을 들고 대작하여 춤을 추다] 

 

이 그림은 세력있는 귀족이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과

가무(歌舞)에 능한 기생을 불러다가 즐기는 장면이다.

악공과 기생의 수로 보아 이 놀이가 보통 규모는 아닌데.

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직 주인대감과 그의 자제낭관(子弟廊官)인 듯하니,

일가의 세도가 어지간한 모양이다.

 혹시 혜원 신윤복을 키워준 어느 풍류 재상집에서의 한때인지도 모르겠다.

 

화면구성에 있어서 일체의 배경을 무시하고 검무하는 장면만가득채운 대담성을 보였으나.

 주제표현에 조금도 군색함이 나타나지 않으나.

이는 인물의 포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시각의 초점이 되는 검무기생들은. 의상에서 청홍의 강렬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면을 압도하는데.

주인을 비롯한 관객들과 악공들이 이를 중심으로 포열(布列)함으로서 화면의 비중은 평형을 이룬다.

 

그런데 검무기생의 날렵한 동작에서 오는 율동감은,

관객들의 도취된 몸짓과 악공들의 신바람나는 연주에 혼연일치를 보여 아연 활기를 띤다.

이렇게 놀이에 참석한 인물들의 심리를 꿰뚫어 순간적인 동작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을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의 예리한 안목이라 하더라도 그리 쉽지않을 일이다.

따라서 작가 신윤복이 이런 세계에 얼마나 익숙하였던가를 짐작할수 있는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세련된 차림을 보이는 것도 그의 주변을 보는듯 흥미롭다.

 

 

 

[쌍육삼매(雙六三昧) : 쌍육놀이에 푹 빠지다]

 

쌍륙은 서양장기같이 말을 옮겨 상대방의 궁에 먼저 들어가는 쪽이 이기는 놀이이다.

말은 보통 검은말 16개, 흰말 16개인데 나무로 만들거나 뼈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주사위 두개를 굴려서 나온 숫자대로 옮기는데, 말을 어떻게 잘 옮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단다.

이것은 서아시아 쪽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고 하며,

주로 부녀자들이 즐겼다고 한다. 

 

왼쪽 남자는 갓 아래 검은 복건

(검은 헝겊으로 위는 둥글고 뾰족하고 뒤는 넓고 긴 자락을 늘어뜨렸으며,

 양 옆에 끈이 있어 잡아매었다. 요즈음 갓난아이들 돌 때 쓰는 형태로 보면 된다.)

을 쓰고 있어 벼슬하지 않은 유생임을 말해준다.

오른쪽 남자는 탕건

(평상시 집안에서 맨 상투머리로 손님을 맞기 민망하여 쓴 것으로 앞이 낮고 뒤가 높게 턱이 진 모양이다)

을 벗어 왼편에 놓아두고 배자(소매 없는 덧저고리)만을 입은 것을 보니

놀이에 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푸른색과 붉은 색의 말로 편을 갈랐다.

기생(야외에서 양반집 부녀자들이 거리낌없이 남자들과 마주앉아 놀이를 할 수 있었을까?) 

쪽에만 푸른 말 두개가 나와 있는데, 판 위의 말은 모두 각 14개씩이다.

아마 붉은 색 말 두개는 남자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나 보다.

 내려온 말이 두 개씩 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니 놀이는 이제 막 시작되었나보다.

그래도 초반의 기세가 어느 순간 승패를 가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지  

“기러기 비켜나는 울음소리 역력한데, 인적은 고요하고 물시계 소리만 아득하다.”

 고 온 정신을 놀이에 쏟고 있는 모습을 오른쪽에 시로 써 놓았다. 

 

 

[납량만흥 (納凉漫興) : 피서지에서 흥이 무르익다] 

 

그림의 윗부분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고,

아래쪽 넓은 공간에 춤을 추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림 오른쪽에 네 명의 악공이 있는데, 장구를 치는 사람이 하나,피리를 부는 사람이 둘, 해금을 켜는 사람이 하나다.

춤을 추는 여성은 아마도 이 악공과 한 팀을 이루고 있는 기생일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악공과 기생이 한 팀을 이루어 민간의 초청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이 악공과 기생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터인데,

당연히 지금 춤을 추고 있는 양반과 그 왼쪽의 두 사내다.

짙은 나무 잎사귀로 보아,계절은 여름이 틀림없다.

어느 여름날 시원한 산그늘을 찾아가 풍악을 잡히고

기생과 춤을 추면서 보내는 한때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림 왼쪽에 있는 두 사내의 포즈가 가관이다.

한 사내는 갓끈을 풀고 갓을 젖혀 쓰고 있고, 아래쪽 사내는 비스듬히 누워 있다.

둘 다 검은 갓끈을 하고 있고,또 아주 젊은 얼굴로 보아 벼슬하지 않은 젊은이다.

근엄한 양반들이 어찌 갓끈을 풀고 갓을 젖혀 쓰고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남녀 한 쌍의 춤을 감상하고 또 직접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인가.

 

조선시대 양반에 대해 지금 사람들은 오해가 많다.

즉 양반이면 모두가 예를 지키고 법도를 따라 근엄한 표정으로 행동을 삼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옛날 양반이 지금 사람들보다는 유가가 요구하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예를 더 지킨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모든 양반들에게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도 일관되게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마도 조광조나 율곡이나 퇴계,남명 선생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이고,이 그림에서처럼 더우면 갓끈을 풀고 비스듬히 기대기도 하고

기생과 어울려 춤도 추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청금상련 (廳琴賞蓮), 혹은 연당야유 (蓮塘野遊) :

관청에는 거문고 소리가 울리고, 연꽃은 칭찬할 만하다]

 

후원에 연당(蓮塘)이 있고, 고목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잔디가 가득 깔린 크나큰 저택을 가진 주인이, 연꽃이 필무렵에 맘에 맞는 친구들을 청하여,

 연꽃감상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모양이다.

연당을 거치는 선들바람이 청향(淸香)을 실어오고.

가야금의 청아한 선율이 이 위에 어리는데.

의관을 파탈할 정도로 자유롭게 연꽃과 여인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격의없이 놀수 있는 사이라면 어지간히 무던한 사이일 것이고.

의복 차림으로 보면 벌써 당상(堂上)의 품계를 넘어 있어서.

나이도 그리 젊지는 않을 듯 하니 정말 허물없는 오랜친구들인 모양이다.

모두들 준수하게 빼어났지만 차림새가 빈틈없이 세련되어 귀족의 몸에 밴 기품을 대하는 듯하다.

 

이는 화원이었던 혜원 신윤복이, 궁정 주변에서 이들 귀족생활을 남김없이 눈에 익히고 살아온 때문에

그 진면목을 이와 같이 실감나게 표현할수 있었을 것이다.

가리마를 쓴 기생의 모습에서나 갓끈을 귀밑에 잡아 맨 귀인의 관(冠)차림에서

 당시의 남녀관식(冠飾)을 알수 있으며.

운치있게 둘러진 석축과 고목의 표현에서는 왕조시대의 격조높은 조원(造園)환경을 실감 할수 있다.

  

 

[상춘야흥 (賞春野興) : 무르익은 봄날의 들판에서 여흥을 즐기다]

 

춘흥(春興)이 도도한 날이다.

후원의 나무들은 푸른 물빛이 완연하고 여린 진달래 꽃잎은 고운님 얼굴처럼 보드라운 기운을 머금었다.

이 난만한 봄을 어찌하나 싶은 날,

 한가롭고 나른한 봄기운을 가뿐하게 풀어낼 음악을 신윤복의 그림 속에서 만난다.


신윤복의 유명한 풍속화 중에 봄날의 흥취를 그렸다는 ‘상춘야흥’(賞春野興).

화가는 진달래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어느 봄날,

 뉘 댁 후원에서 벌어진 조촐한 음악회 장면을 그렸다.

차비를 갖춰 산으로 놀이를 나서는 대신 후원 뜰에 자리를 마련해

피리와 장구를 곁들인 호사스러운 삼현육각대신 거문고와 대금, 해금연주자만 초청해

‘넘치는 유흥’이 아닌 조촐한 풍류의 한 순간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 음악회의 무대가 뉘 댁 후원이라고 ?’

물론 뒤쪽으로 보이는 암벽과 산기슭을 보면 어느 집 후원이라는게 좀 뜻밖이지만,

그림 아래쪽에 좋은 돌로 잘 쌓은 축대는 이곳이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야산이 아니라

어느 양반 집의 후원임을 말해준다.

 아마도 이 댁 주인은 평소 잘 보이고 싶은 어떤 분에게

‘날도 따뜻하게 풀렸고, 꽃도 피었으니 우리 집에 오셔서 조촐하게 한 나절 보내시죠’

라는 전갈을 보냈을 것이다.

그 분의 평소 취향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집 주인은

장안의 명인(名人)을 초청하고, 그 장소를 사랑방 대신 야취(野趣) 넘치는 후원으로 정했는데

이 그림의 분위기로 보면 이날 손님 초대와 음악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음에 틀림없다.

음악에 흠뻑 취한 주빈의 표정이 그 성공을 말해 준다.


집 주인은 손님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왼편에 물러앉은 이로 보이고,

이 양반이 초대한 주빈은 자태 곱고 반듯한 여기(女妓)와 함께 음악가들을 마주보고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림 속의 정경은 대금과 해금, 거문고 주자세 사람의 연주를 시작한지 시간이 꽤 흐른 듯하다.

가운데 앉은 주빈은 옷소매가 살짝 들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몸을 기울여 음악에 열중해 있다.

 그의 굳게 다문 입 꼬리는 기분 좋게 올라가 있고, 눈빛은 온화하며 얼굴에는 화기(和氣)가 가득하다.


특히 거문고 명인의 연주에 심취한 듯 그의 눈길은 온통 거문고에 쏠려 있는데.

그 표정이 얼마나 진지하고 즐거워 보이는지 그림을 바라다보는 우리들에게

“이 거문고 소리 좀 들어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고 권하는 것 같다.

그런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한참 더 그림을 들여다보면 손길을 잠시 멈추고

거문고 주자를 향한 해금 주자의 표정,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반듯하게 앉은 주빈 옆의 기생이 온 몸으로 음악을 감상하는듯 조용히 눈을 감고 앉은 모습,

조금 멀찍이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집 주인의 표정이 보이고,

어느새  그들과 함께 우렁우렁 울리는 거문고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봄기운을 즐기며 정원에서 듣는 거문고 소리,

거문고와 어울린 대금과 해금의 음악은 정말 특별한 감흥을 준다. 
  

 

[임하투호(林下投壺) : 수풀 아래서 투호놀이를 하다] 

 

  '일상'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 

 

  

 

[계변가화 (溪邊街話) : 시냇가의 이야기]

 

개울가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 흰 천을 펼치는 할미, 그리고 목욕을 마쳤는지 젖은 어여머리를

땋고 있는 젊은 여성이 있다.

이 젊은 여성은 저고리 아래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의 젊고 늘씬한 몸매의 사내를 보라.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반이 분명하다.

이 사내의 눈길은 젊은 여성의 가슴에 꽂혀 있다.

우물가가 남성과 여성이 접촉하는 성적 공간인 것처럼 빨래터 역시 성적인 공간이다.

 

고려가요 ‘제위보’를 들어 우물가의 성적 접촉의 실례를 확인해 보자.

‘고려사’에는 국문가사는 없어지고 이제현이 한시로 번역한 것이 남아 있는데,

 이 노래의 사연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어떤 아낙이 죄를 지어 제위보에서 노역살이를 하던 중 남자에게 손을 잡혔는데,

씻을 방도가 없어 노래를 지어 자신을 원망했다.

이제현이 한시로 그 노래를 풀어 옮겼다.

 

빨래터 시냇가 수양버들 아래서

손을 잡고 자기 마음 말하던 흰 말 탄 그 사람

처마에 석 달 비가 내린다 해도

손 끝에 남은 향기 어찌 차마 씻을 수 있으리.

 

아낙이 지은 죄의 구체적 내용이야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애정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날 자신과 관계하던 남자가 빨래터에서 일을 하던 여자를 찾아왔다.

 여자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는 말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이내 떠난다.

손끝에 남자의 체취가 남아 있다.

석 달 비가 쏟아진다 해도 씻을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를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이처럼 빨래터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신호가 오가는 그런 공간이었던 것이다.

  

 

[노상탁발 (路上托鉢) : 중이 길위에서 시주를 청하다] 

 

 탁발은 승려들이 마을로 돌아다니며 동냥하는 것을 말한다.

 큰 북은 법고라고 하는데, 대개 아침, 저녁 부처님에게 예를 올릴 때 두드린다.

 그림에 나타난 것을 보면, 거리에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탁발을 하기 위해 법고를 치고 있다.

승려들은 모두 네 사람인데, 법고를 두드리는 사람만 깎은 머리이고,

목탁을 치는 사람은 탕건을 쓰고, 꽹과리를 치는 사람은 패랭이를 썼다.

고깔을 쓰고 고개를 숙여 절하는 사람은 손에 부채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승려들이 입는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장삼이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걸쳐 입는 가사 등을 입지 않았다.

승려들이 평소에 입는 옷은 일반 사람들이 입는 옷과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거리에서 하는 탁발인데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않았다니 뭔가 이상하다.

 승려도 아니고 일반 서민도 아닌 사람들을 거사라고 하는데, 

이들은 광대같이 북과 징을 울리며 입으로 염불도 외우면서 부적 같은 것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고깔 쓴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부적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절의 살림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절에서는 이런 거사들에게 거리에서 탁발도 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도움도 주는 즉, 절과 이들 거사들의 관계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들은 자기들끼리 절도, 집도 아닌 건물을 짓고 사주, 관상, 손금보기 등을 해 주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쟁이 끝나고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절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런 일들을 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는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한 무리의 여인네들이 길을 가다가 이들의 염불소리에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다.

여인 가운데 흰 색의 장옷을 입은 여인을 자세히 보자.

겉으로 나온 부분은 흰 색이고 안으로 들어간 부분은 푸른색을 띠고 있고,

그 옆에 장옷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도 윗부분은 흰색이고 안으로 접혀 들어간 부분은 푸른 색이다

(사진에선 잘 안보이지만).

오른쪽의 푸른색 장옷을 쓴 여인의 파도치는 듯한 장옷 끝자락은 모두 흰색이다.

즉 장옷의 안감은 흰색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장옷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옷을 겉과 안을 다른 색으로 만들어 평상시에는 색이 있는 부분으로 쓰고 다니다가

 상을 당했을 때는 뒤집어서 흰 천이 나오게 쓰고 다닌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각각의 장옷을 따로 만들 필요없이 하나로도 상황에 맞게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부유하거나 사치를 즐기는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왼쪽 아래 선비가

손에 사선(紗扇 - 부녀자들과 마주치면 얼굴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들고 다녔다고 한다)을 들고

길을 지나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 단오풍정 (端午風情) : 단오날의 풍경]

 

음력으로 5월 초닷샛날은 단오(端午)라 하여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이래로 명절을 삼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부터 큰 명절의 하나로 지켜왔다.

이날이 되면 남자들은 씨름판을 별여서 힘내기를 하며 즐기고.

 여인들은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를 뛰며 노는 것이 우리네의 전래풍속이었다.

 

이 그림은 단오날 추천놀이를 나온 한떼의 여인네들이,

시냇가에 그네를 매고 냇물에 몸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지금의 정릉이나 성북동 골짜기는 물론이고.

삼청동이나 인왕산 계곡을 비롯하여.

남산이나 낙산주변의 여러 골짜기들이 모두 이런 놀이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인적이 끊긴 후미진 곳이기에 마음놓고 저고리를 훌훌벗어 던졌지만.

미처 산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몰랐던가.

바위틈에 숨어든 상좌중 둘이서 기막힌 진경에 희희낙락 즐거워 어쩔줄을 모르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혜원은 짐짓 화면의 초점을 딴곳으로 옮기려고.

그네 뛰는 여인에게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히고,

머리손질을 하는 여인에게는 엄청나게 큰 트레머리를 모두 풀어 놓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네 뛰는 여인의 다홍치마에 반회장 노랑저고리만으로도,

지극히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백설 같은 속옷이 반 넘어 내보이는 것은,

반라의 여인들에게서 훨씬 더 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무녀신무 (巫女神舞) : 무당이 신들린 춤을 추다]

 

가운데 앉은 여인의 소반(작은 상)위에 흰 쌀이 담겨 있고 여인은 두 손을 모아 빌고 있다.

이들 일행은 모두 서민의 여인들로 보인다.

노랑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턱을 괴고 무당의 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뒤에 쓰개치마를 입은 여인은 돌담 밖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춤추는 무녀 한 명과 피리 불고 장구 치는 박수(남자무당)가 한 명씩 이다.

보통 굿은 여러 명의 악공으로 이루어지는데, 제물이나 참가한 사람의 수로 보아 작은 굿으로 보인다.

무녀는 주름진 붉은 철릭을 입고 있어 그 화려함이 돋보이고 왼손에 든 부채에는 금강산 그림인가 싶은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원래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유교를 택하였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거나 굿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중종의 왕비였던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보우를 궁궐로 불러들여 불사(佛事)를 벌이기도 하였다.

비록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여 공식적으로 행사를 하지는 못했으나

 왕실에서조차 공공연하게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였으니

일반인들에게 법으로 금한들 그것이 제대로 먹혀 들어갈리가 있으랴. 

 

갈수록 폐단이 심해지자 정조는 승려나 무당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아

성안으로 드나드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도성 밖에서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는 법.

 어쨌든 서민들에게는 굿이 하나의 재미난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담 밖에서 구경하는 남자가 바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에서 금지하는 굿을 비밀리에 하는 이들이 못마땅한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이것을 의식한 쓰개치마 입은 여인은 그런 남자를 겸연쩍은 듯이 바라보고 있다.

남자는 맨 상투로 보아 천민신분이 아닐까 싶은데

그 신분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에 대한 불만도 섞여 있으리라.

 

혜원의 그림에는 이렇듯 그것을 관찰하고 구경하는 사람을 그려 넣어

그림을 보는 우리가 마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정변야화 (井邊夜話) : 야심한 밤 우물가에서 수다를 떨다]

 

그림 위쪽에 둥근 달이 떠 있다.

밤이다.

달이 걸린 나무를 보시라.

붉은 꽃이 피어 있다.

식물에 대해 무지한 나는 저 꽃이 앵두꽃인지, 복사꽃인지 모른다.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

그림 아래쪽에는 젊은 여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 여자는 우물가에 앉아 두레박 줄을 잡고 있고,

서 있는 여자는 오른손을 턱에 괴고 고민에 빠진 눈치다.

무언가 심각한 사건이 있다.

 

고민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림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찾아볼 수 있는 데까지는 찾아보자.

 두 여자는 양반집 여자가 아니다.

옷차림을 보라.

 둘 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있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있는 여자는 흰 민짜 저고리를 입었다.

 왼쪽 여인은 녹색 저고리이기는 하지만, 저고리 고름만 자주색일 뿐 다른 장식이 전혀 없다.

또 신은 모두 신이다.

초라한 복색으로 보아 두 여인이 양반집 여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두 상사람 여인네는 왜 고민에 잠겨 있는 것인가.

우물이 있는 장소를 보자.

 

그림 오른쪽 상단에 기와를 얹은 작은 문이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아니다.

큰 양반 가문은 건물이 크고 복잡하며 중간에 무수히 작은 문들이 있다.

 이 문 역시 그런 문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담장이다.

담장이 허물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묵은 양반가로 생각되는데,

그 담장에 사내가 하나 서 있다.

사내가 쓰고 있는 양반만이 쓰는 사방관으로 보아,

 이 사내는 이 집의 주인 양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꼿꼿이 서서 두 여자를 정시하고 있다.

다만 이 사내의 표정은 음침하다.

주인 양반이 왜 밤중에 집안 여자들이 우물가에 모여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단 말인가.

두 여자는 왜 물을 긷다 말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가,

또 서 있는 여자는 왜 턱까지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는가.

그림은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 남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혜원이 그림 속에 담은 생각이 무엇인가 늘 궁금하였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으면 상상이다.

담 넘어 서 있는 양반이 서서 고민에 빠져 있는 젊은 여인을 건드렸고,

첩으로 들이려 하자, 그 사실을 여인은 동무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임신을 시켰든지. 이 그림은 바로 그 고민상담의 장면이라는 것이다.

양반은 이런 이유로 서 있는 여성에게 무슨 제안을 하였고,

 그 여성에게 하회를 기다리는 중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이런 해석이라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꼭 그렇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고민에 빠진 여성과 돌담 밖의 남자 사이에

어떤 성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추리하는 것은 그리 근거 없지는 않을 것이다.

 

 

 

[표모봉심 (漂母逢尋) : 세탁하는 여인이 찾아온 이들을 만나다] 

 

    '탐욕'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 

 

 

[이부탐춘 (?婦耽春) : 과부가 색을 탐한다] 

 

신윤복의 그림 ‘이부탐춘’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그림을 기법 차원에서만 독해한다면 그림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사실 이 그림은 사회사적 독해를 요한다.

먼저 그림부터 꼼꼼히 챙겨 보자.


이 그림이 만들어내고 있는 공간. 기와를 얹은 담장이 에워싸고 있는 마당이다.

담장은 장방형의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덮었으니, 예사 집이 아니다.

권세 깨나 있고 돈 좀 주무르는 그런 집안이 분명하다.

그림 왼쪽 상단에는 담장 너머 흰 꽃, 붉은 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배나무 꽃인가, 벚나무 꽃인가, 배롱나무 꽃인가. 어쨌든 좋다.

이런 꽃으로 계절이 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고, 생식의 계절이다.

곧 봄은 생명을 잉태하는 계절인 것이다. 하여 그림 아래 부분의 마당에서 개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그림에 개의 짝짓기라니, 조선시대에 신윤복이 아니면 불가능한 파천황적인 발상이다.

한데 짝짓기를 하는 것은 개만이 아니다.

개로부터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려보면 참새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위로 참새 한 마리가 더 있어 파닥거린다.

바야흐로 봄은 짝짓기의 계절인 것이다.

 식물의 꽃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식물의 성기가 아닌가.

 꽃이 피고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는 것은 식물의 짝짓기 행위다.

 

생명력이 충만한 봄은 어디서 왔는가. 당연히 담장 밖에서 왔다.

 담장을 넘어오는 붉고 푸른 꽃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봄은 개구멍에서도 온다.

개 두 마리는 바로 담장 아래의 개구멍으로 들어온 것이다.

참새들이야 저 허공을 통해서 왔을 터이고.

그런데 담장 안은 어떤가.

이제 시선을 오른쪽 두 여인네로 옮겨보자.

 두 여자는 비스듬히 누운 나무에 기대어 서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문제다.

 나무는 소나무로되, 이미 꺾어진 소나무고,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래쪽의 빈약한 잎을 단 가지 둘뿐이다.

소나무는 죽어가고 있다. 집 밖은 생명력이 충만한 봄인데,

여기 돌담 안의 집은 죽어가고 있는 풍경이다.

 

이제 여자 둘을 보자.

오른쪽 여자는 삼회장저고리를 제대로 차려 입고 있고,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를 묶고 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귀한 집의 규수다.

왼쪽 여자는? 구름 같은 가체를 올리고 있는데, 옷은 모두 흰색, 즉 소복이다.

이 여자는 결혼을 한 여자이고, 또 상중에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남편이 죽은 여인이다.

왜 신윤복은 과부를 그림에 배치했는가 궁금하다.

여자 둘의 시선은 개의 짝짓기에 가 있다.

그런데 둘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처녀의 표정은 쌀쌀맞고 차갑고 무심하다.

 하지만 과부는 배시시 웃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눈치다.

과부의 웃음에 신윤복의 의도가 있다.

 신윤복은 과부의 소외된 성욕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 삼추가연(三秋佳緣) : 세명이 가을에 맺은 아름다운 인연]

 

그림의 왼쪽에는 국화꽃이 피어 있고,

오른쪽에는 사내와 늙은 할미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댕기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처녀가 있다.

사내는 아직 앳된 기운조차 느껴지는 젊은 나이고,

여자는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옆모습만 보아도 젊은 처녀임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웃통을 벗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남자는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막 대님을 치는 것으로 보아,바지도 벗었다가 이제 다시 주워 입는 것이다.

여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그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여자는 부끄러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이미 하룻밤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곧 이 사내는 여자의 초야권을 샀던 것이다.

흔히 ‘머리 얹어준다.’는 말은,기생의 초야권(初夜權)을 사서 땋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릴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이다.

동기(童妓)의 초야권을 사는 사람은 이부자리와 의복과 당일의 연회비를 담당해야만 했는데,

아마도 젊은 오입쟁이는 그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



출처 : 코액션 The Korean Action(www.koac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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