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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4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300 2019-10-11 19:37:01

무정… 비운의 혁명가




◎굳어진 판세… 정치야망 물거품/입북하자 소 군정에서 행동 감시/연안파마저 “대표주자” 옹립 외면



 1945년 11월말 초겨울의 어느날 저녁. 평양의 일식집 다마야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1백명 가까이 모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연안파를 환영하는 자리였다.



순배가 돌아가며 주흥이 무르익은 듯했지만 환영대회 분위기치고는 좀 찬듯했다.



대륙의 찬 이슬속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해방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혁명가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북한 정무원기관지 민주조선의 간부 조종찬씨(70)는 연안파인 전 김일성 비서실장 홍순관(76)로부터 들은 이자리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조씨가 전하는 홍씨의 증언.



『행사의 주최자는 최용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대표격이었던 무정,최창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이 안나온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도 안나온 것이죠.



주최측이라곤 최용건과 최의 출신학교인 오산학교에서 나온 몇몇이었고 우리측에서는 하급간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환영자리는 그저 술이나 마시고 끝났죠.』



무정입북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반응과는 딴판이었다.



대중들에게 무정은 김일성에 버금가는 조선혁명가였다.



당시 분위기를 북한문제연구소 김창순씨는 이렇게 전했다.



○끼어들 여지 좁아



『해방초기 이북주민들이 만세를 부른 사람이 4명 있습니다.


김일성장군·무정장군·박헌영선생·김두봉선생이지요.

적어도 입북초기 무정은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실세인 김일성이 무정과 연안파를 접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길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입북이후 무정의 행보는 중국혁명에서 보여준 화려함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입북직전인 45년 10월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제2비서로 추대된 이래 입북후 3차,4차 분국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2비서로 정치활동을 한다.



그러다 46년 2월 인민군의 전신인 보안간부 훈련대대가 만들어지면서 포병담당 부사령관이 되고 48년 인민군창설 이후에는 제2지휘소사령관에 임명돼 6·25때는 2군단장이 됐다.


그의 행로는 내리막길이었다. 중국에서 뒤를 밀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에도 그는 정치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세력을 굳혀가고 있던 김일성의 강력한 견제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무정은 김일성 입북 훨씬 뒤인 45년 11월말쯤 귀국했다. 그때는 민족진영의 조만식과 소 군정의 지지가 명백한 김일성이 국면을 결정해 나갈 때다.

소 군정의 지도아래 이미 짜여진 국면에서 연안파가 끼어들 여지는 좁은 상황이었다.


무정이 귀국할때 정치적 야망은 컸다.



무정이 북한의 전직업 총동맹위원장(부수상급) 서휘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전북한 언론인 조씨가 전하는 서휘의 증언



『무정이 그럽디다. 해방이 됐으니 이제 발 벗고 조선건설을 하겠다고. 이제 군대가지고만은 되지를 않소. 한때는 군인만 하려 했는데 이제 정치를 해야겠소라고 했습니다.』



무정은 귀국하자 그의 야망을 구체화 하기 시작했다.



조씨의 증언.



○편파인사로 말썽



『무정은 입북하자마자 황해도를 돌며 유세를 벌였습니다.


연안파인 김창만(후에 북한 부수상이 됨)과 함께 다녔는데 김은 무정이 국부라는 말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고향인 함북이나 가까운 함남을 택하지 않은 것은 그곳이 오기섭 주령하 등이 이미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조씨의 증언



『무정은 들어온뒤 곧 당중앙위의 간부부장을 맡았습니다.(공식기록은 46년 8월 북로당 창건때) 이 자리는 그런대로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도 및 군당위원장 배치가 전적으로 그의 결재하에 이루어졌으니까요. 그런데 그가 편파적으로 사람을 배치했습니다.

중국체류 마지막 무렵 자신과 같이 조선의용군 근거지 태행산에 있던 사람은 높은 자리를 주고 연안이나 다른지역에 있던 사람에게는 낮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연안파내에서 마저 말썽이 일었다.



빨찌산파에서는 김일성을,국내파에서는 박헌영을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연안파에서는 무정을 대표주자로 옹립하려는 노력마저 없었다.



무정의 진로는 자신의 희망과는 다르게 전개돼 갔고 그의 불만은 커갔다.



김창순씨는 이렇게 말한다.



『46년 2월이 안됐을 때지요. 노농적위대가 창설된후 간부연수가 있었는데 무정이 연사로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무정은 와이셔츠를 벗고 난 이처럼 총을 맞아가며 혁명을 했는데 왜 나에 대한 선전을 않고 「어떤 사람」만 선전하느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었죠.』


소 군정하에서 중국 팔로군 출신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본질적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외부요인만은 아니라고 전북한 고위관리였던 서용규씨는 말한다.



『무정장군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국에서의 중요한 문제인, 정치노선·조직노선 등의 기본문제에는 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홍순관씨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개인주의적인 행동이 문제돼 가끔씩 소련사령부로 불려가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던 무정 문제가 커진 것은 6·25때다.



서씨의 증언.



『제2군단장이었던 무정이 낙동강 경계선까지 갔다 후퇴할 때 전혀 사령부에 연락을 안했습니다.


평양 방어명령을 받고도 임무수행을 못한데다가 만주까지 후퇴했으며 후퇴과정에도 희생자를 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2군단장에서 철직(직위에서 쫓겨남) 당하고 만포에서 후방부대인 7군단장이 됐다. 그 와중에 그는 결정적 사고를 냈다.



조씨가 전하는 전김일성 비서실장 홍순관씨의 증언.



『7군단장으로 만포에 있을때 무정이 알고 지냈던 팔로군 전사 한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무정이 야전병원에 가서 의사인 당시 평북도인민위원회 위생부장 이청산에게 치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가 바쁘다고 하자 총으로 쐈는데 그만 죽었습니다. 이게 문제가 돼 50년 12월 만포 별오리(현 자강도)에서 당3차 전원회의가 열리기 전에 철칙이 발표됐습니다.』


김일성선집 53년판은 별오리에서 발표된 무정의 과오를 이렇게 전한다.



『군대내에서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많은 손실을 가져오게한 무정은 제2군단장의 직위에서 철직당하였습니다. 그는 또 퇴각하는 과정에서…사람을 마음대로 총살시키는…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



○52년 10월에 사망



군단장자리에서 쫓겨난 무정은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됐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으로 와있던 혁명동지 팽덕회의 요청도 있어 그는 잠시 치료차 중국에 갔다가 김일성에게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져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



서휘의 증언.



『무정은 평양에 들어왔지만 간부들이 치료를 받는 병원에 입원 못하고 인민군 전사병원에 입원,며칠 안있다 죽었습니다.』



사망날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북경에 살아있는 무정의 딸 등연려씨는 『52년 10월 아버지가 위장병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한다.



대륙을 누비던 비운의 혁명가는 입북이후 내리막길만을 걷다 초라한 최후를 맞았다. 47세의 젊은 나이였다.



◎무정의 외동딸 중국에 있다/아버지 입북직전 어머니와 이혼/43년 최용건이 연안방문때 작명



비운의 혁명가 무정장군의 외동딸이 중국 북경에 살고있다.



이름은 등연려(48세).



등씨는 아버지 무정이 포병사령관이던 시절인 38년 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위원장인 위국청의 소개로 연안에서 만난 산하포대의 정치위원인 한족처녀 등기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1남1녀중 장녀다.



『내 이름은 원래 무연려였어요. 아버지 무정장군의 무를 성으로 사용했습니다. 연년생인 동생(44년)의 이름도 무연진이었습니다. 우린 아버지의 성이 김씨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부모님이 이혼한뒤 소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됐어요.』



무정은 해방되면서 북에 들어가기 직전 이혼했다.



등씨 남매의 이름을 북한에서 민족보위상을 지낸 최용건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43년 최용건이 연안에 직접 와서 내이름은 연안의 고려인이라는 의미에서 연려라고 지었고 동생은 연안이 진동하라는 의미에서 무연진이라고 지었어요.』



당시 소련 하바로프스크 88독립여단 정치위원이었던 최가 연안에 왔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로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등씨의 아버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은 4세때인 47년으로 그친다.



목단강 성당위 비서인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신의주로 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곧 재혼했다.



『주변사람들 말은 아버지가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답니다. 아버지는 북에 들어가서도 우리를 걱정하는 편지를 자주 보내셨고 사람을 통해 소식과 선물도 보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후에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어머니는 82년 심장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52년 10월 위장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얘기하셨어요.』



중고등학교를 목단강에서 마친 등은 북경외국어대학교에 진학,에스파냐어를 전공하고 현재는 중국 해외무역총공사 종합업무부에 근무하고 있다.



동생 등연진은 70년 결장암으로 죽었다.



『아버지의 나라 조선에 한번 가고 싶습니다.』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이상.. 끝.   이어서 ~~ 1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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