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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최고봉. 제 10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0 2019-10-23 02:15:23

스탈린이 권력유지를 위해 필요한것들을 다각적으로 살펴보자..


 

 

전통주의적 관점에서 대숙청의 원인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전체주의적 통제사회를 건설하고 스탈린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는 절대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숙청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대숙청이 벌어진 30년대 후반 이전까지 소련에서 스탈린이 가진 권력은 이후 40~50년대의 스탈린이 가졌던 절대권력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3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를 보더라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려 300표 가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고, 독소전쟁 발발 직후 패닉에 빠진 스탈린이 관저에 은둔해 있는 상태에서 몰로토프를 비롯한 심복들이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냐며 일하라고 끌어내려 쳐들어오자 자신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는 절대권력이 공고해진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의 스탈린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점이나, 암살이나 테러는 두려워할지언정 공개적인 탄핵이나 체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분명 스탈린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만하다.

 

즉, 대숙청과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스탈린이 설령 소련의 최대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권력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견제나 도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스탈린의 권력 획득 과정을 살펴본다면, 일단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1인자가 된 것은 20년대 중반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것을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25년 무렵에 트로츠키는 정치적인 권한을 거의 상실하고 실각하게 되지만, 정작 트로츠키가 국외로 추방당한 것은 29년의 일이었다.

 

최대의 정적이자 정치적 위험요소인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도 4년간이나 해외로 쫓아내지도 못하고 국내에 머물도록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기간동안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국외 추방을 실행했을 때 사람들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도록 소문을 미리 퍼트리는 등 다양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트로츠키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지노비예프의 제안에 대하여 스탈린이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예로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은 트로츠키를 처형했을 경우 돌아올 정치적 부담과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만약 정말로 순수하고 동지를 죽이기 싫어서 처형하지 않았던 거라면 실각시킨 후 바로 해외로 추방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었을 것이며, 국내에 계속 머물도록 할 경우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장 스탈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스탈린의 잔혹성이 두드러진 2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스탈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위기에 몰린 트로츠키를 염려한 군대 내 추종자들이 트로츠키를 권좌에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를 자발적으로 제의할 정도였고 (여기서 좀더 깊게 살펴보면 물론 그 염려라는 게 진짜 트로츠키를 염려한 것인지, 자신들의 후견인이니 지도자가 실각하면 자신들도 피해를 볼 것을 염려한 것인지야 알 수 없지만... 트로츠키가 저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볼 때 자발적으로 제안했다는 것은 맞다.) 

 

 

굴라그에서 살아 돌아온 행운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스로를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부르던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이 40년대 후반까지도 수용소에 남아있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29년에 트로츠키를 국외 추방함으로써 최대의 정적을 일단 제거한 이후에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을 비롯한 나머지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30년대 초반 내내 각종 누명과 음모로 이들의 당원 자격을 여러 차례 빼앗기까지 했지만, 자아비판 등의 절차를 거친 뒤 다시 돌려줄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러한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이들을 본격적으로 투옥하고 처형한 것이 바로 대숙청 기간인 30년대 후반이며, 추방당한 상태인 트로츠키를 암살한 것은 대숙청이 분수령을 넘은 1940년의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종합해 본다면, 권력 획득 이후 대숙청 이전까지 10여년의 기간은 소규모 숙청과 음모로 다른 경쟁자들의 권력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그만큼씩 스탈린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독재 태동기였으며,

 

대숙청이 시작된 3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쟁 관계의 다른 권력자들을 압도할만한 권력이 스탈린에게 집중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막강한 권력을 얻은 다음에 굳이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느냐는 것인데, 이 역시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그 전까지는 대규모 숙청을 벌일 힘이 없었고, 권력을 얻은 이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숙청한 것이다.



여기서는 스탈린이 당시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 당 지도자, 소위 말하는 '고참 볼셰비키' 중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혁명 과정에서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잉여 찐따라는 이야기는 스탈린을 디스하기 위한 다른 볼셰비키 당 지도자(주로 트로츠키)들이 퍼트린 악평이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름대로 공적이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오만방자와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잘난 척을 주된 정체성으로 삼는 트로츠키 같은 인물이라면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일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정도(...).

 

스탈린이 주로 활동한 영역은 사무작업이나 자금 마련 같은 부분인데, 문필가로서 독일에까지 알려진 명성을 제외하더라도 10월혁명 당시 적위대를 이끌고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주도하고, 이후에는 붉은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조직하여 반혁명군을 상대로 한 승리를 주도한 트로츠키에 비한다면 확실히 화려함이 크게 떨어진다.



로자 룩셈부루크 같은 해외 인물들조차 10월 혁명 이후의 볼셰비키 정권을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정부라고 부를 정도니 트로츠키는 그냥 못 이긴다고 치더라도, 그 외의 다른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도 스탈린의 경우는 화려함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부하린 같은 경우 뛰어난 이론가이면서 특히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전문가라는 명성과 함께 레닌에게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인망도 높은 인물이었으며,

 

지노비예프는 일개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인 스탈린에 비해 명목상 전 세계 모든 공산주의 정당의 상위조직인 코민테른의 집행위원장이자 벽촌인 캅카스 지방에서 활동한 스탈린과는 달리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바 있었고..

 

카메네프 역시 수도인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탁월한 이론가+연설가 스킬을 기본 장착한 위 인물들에 비해 스탈린은 민족 문제에만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러시아어도 어눌한 편이었다.



결론적으로, 문화대혁명이나 킬링필드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독재자들이 일종의 '이념적 세탁'을 위해 대규모의 학살과 숙청을 자행하곤 하는데 스탈린의 대숙청도 이러한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스탈린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반대자나 잠재적 반대자, 반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포로 압도하여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숙청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1) 소련 공산당의 정치국원들이 몰살당한 것처럼 권력조직 내부에 대한 숙청이 외부에 대한 숙청보다 더 심했다는 점과

 

2) 영관급 장교의 80%, 장성의 90%가 숙청당한 것에서 보듯 군대에 대한 숙청이 몹시 두드러졌다는 점, 그리고

 

3) 특정한 집단에 대한 숙청이 아니라 별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핑계로 삼은 무작위성이 강한 숙청이었고 특히 엘리트 계층에 대한 숙청이 심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이 역시 위 맥락에 따라 많은 부분이 설명 가능하다.



1) 소련 공산당 내부에 대한 숙청이 특별히 더 지독했던 이유는, 위에 설명된 바와 같이 스탈린이 당 내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보다 잘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는 쉽지만, 남보다 딱히 잘난 점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자기와 동급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다 무력화시켜야 하니까.



2) 대숙청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고급 장교 숙청일 텐데, 붉은 군대의 지휘 구조를 파탄지경에 몰아넣은 이 숙청 역시 스탈린의 입장에서 군대가 잠재적 위험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권력투쟁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행정부장관과 국방부장관 사이의 권력투쟁이니까.

 

더구나 그 국방부 장관이 보통 장관도 아니고 건군의 아버지라면? 당연히 정권을 잡은 행정부장관으로서는 군대가 꺼림칙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줄 근거가 하나 있다.

 

군 내에서 주 숙청 대상인 영관~장성급의 고급 지휘관들이라면 대략적인 연령은 40대~60대 정도였을 것이다. 소련의 건국이 1917년, 군부 대숙청이 1937년이니 이들 고급 지휘관의 대다수는 소련이 건국될 당시에 이미 20~40대의 나이로 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 붉은 군대의 고급 지휘관의 주류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 출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혁명 직후 한 번 군대에서 추방당했던 이들 제정 러시아군 출신자들을 다시 군대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이다. 요컨데, 당시 붉은 군대 고급지휘관의 상당수는 트로츠키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군 지휘관 중에서 가장 아까운 사례로 꼽히는 투하쳅스키를 보더라도, 귀족 태생의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트로츠키에 의해 발탁된 것에 가까운 입장이었고, 정확히 따진다면 이후 트로츠키가 대거 영입한 구 제정 러시아군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투하쳅스키는 미리 제 발로 입대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제정 러시아군 출신자를 군대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레닌이나 다른 혁명가들의 주장에 트로츠키가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내전기에는 트로츠키의 지휘 아래서 눈부신 공적을 쌓아 최고위직까지 승진한 입장이었다. 덤으로 폴란드 전선에서의 패배 문제로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쁘기까지 했지만...

 

투하쳅스키 자신은 군인으로서의 입장에 충실한 것인지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총참모장에 취임하여 자기 책임을 다했지만, 이 역시 3년만에 보수파 장성들의 반대에 밀려 해임되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투하쳅스키 개인에게 스탈린과 트로츠키 둘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트로츠키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쪽이 오히려 더 적절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투하쳅스키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붉은 군대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군대를 적으로 돌리고 무사할 수 있는 독재자는 없다.



3) 이 문제도 붉은 군대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당시 군대 내에서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세력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진짜 트로츠키파 자체야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미리 숙청해 버렸지만 트로츠키에게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지휘관은 그냥 장교의 대다수이고, 오히려 스탈린파가 일부 계파에 불과한 상황이었던 것.

 

그나마 이 비교에서는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의 경우에 한정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몹시 오만한 성격과 애초부터 주류 볼셰비키가 아니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상 트로츠키파는 차라리 특정해내기가 쉬운 상황이었고,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부하린 같은 유명한 고참 볼셰비키의 경우 그들의 지지자가 곧 볼셰비키 지지자였던 상황이었다. 스탈린 역시 고참 볼셰비키였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러시아어도 고등학생 수준으로밖에 구사하지 못하고, 생긴 게 멀끔한 것도 아니고, 성실하고 꼼꼼하긴 하지만 특출나게 똑똑한 것도 아닌 데다가 성격까지 음침한 스탈린을 다른 지도자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듯.

 

결국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명백한 스탈린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스탈린의 권력이란 볼셰비키 당이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볼셰비키 당을 정략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지, 그 권력에 상응하는 지지를 기반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독재권력을 얻기를 포기하고 말겠지만(...) 어떻게든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국 스탈린보다 다른 지도자를 더 선호하는 다수집단 전체를 숙청해야 하는데, 다수의 집단을 특정해낸다는 건 의미가 없으니 결국 남은 길은 무작위 숙청 뿐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반대파 전체를 물리적으로 제거했다기보다는, 감히 반대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드는 방법으로 스탈린은 절대권력을 얻은 것. 특히 엘리트 집단에 대한 숙청이 잔혹했던 이유 역시 이들이야말로 스탈린이 평범한 당 지도자 중 1人이었던 과거를 잘 기억하고 있을 테니 그만큼 위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숙청이 없었다면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은 탄생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스탈린도 그것을 잘 알고 의도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실제로 레닌 시대만 해도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은 꽤나 공공연하게 행해졌지만 최소한 당 내에서는 레닌에 대한 비판이나 레닌의 입장에 대한 반대가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혁명 이후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볼셰비키에 멘셰비키 또는 사회혁명당원들을 받아들여줬던 것이나, 과거 부하린과 레닌 사이의 논쟁에 비추어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르는 레닌으로선 논쟁을 통한 비판에 대해 자유롭게 받아들였다.(단지 혁명 이전에 혁명에 대한 비관론등은 철저하게 비판했지만)

 

그리고,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 가입 공화국에게 전면적인 자치권과 독립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고 가입 공화국이 탈퇴를 원한다면 자유롭게 탈퇴해야 한다고 본 반면 스탈린은 중앙집권적으로 접근하여 제한된 자치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레닌과 스탈린의 "비판에 대한 입장"에 대한 일화로 당 회의 때 한 당원이 스탈린을 비판하자 스탈린이 한 말은 "전 레닌 동지와 다릅니다." 였을 정도니... 그 정도로 레닌과 스탈린은 자유의 폭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이상..   "끝..  이어서 제1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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