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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제 2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15 2019-11-08 09:58:58
신탁통치 소용돌이

 
 
◎소 군정/반탁통치 온갖회유·협박/소 군간부·김일성등 보내 번의 종용/끝내 안통하자 숙소인 호텔에 감금

 
 
 

신탁통치문제는 소련군정과 조만식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소련군정이 들어선 후 그럭저럭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김일성과의 관계도 완전히 틀어졌다.



소련의 찬탁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인 김일성 빨찌산파와 민족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자의 어쩔 수 없는 갈림이었고 그것이 그후 고당의 운명을 정해버렸다.



로마넨코가 모스크바로부터 가지고 온 찬탁지시를 박헌영에게 통고한 다음날 소련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고당을 사령관실로 불렀다.

여기서 "고당"은 조만식의 호 이다.



12월30일 오전 11시.



사령관실에는 약간의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레베데프소장·로마넨코소장이 모두 배석했고 한국인 2세 통역장교 2명도 대기했다.



잠시후 조만식선생이 치스차코프대장의 부관과 함께 사령관실로 들어왔다.



당시 이 자리의 통역을 맡았던 박길용 박사(72·전북한외무성부상·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치스차코프대장은 조만식 선생에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한국에 대한 5개년간 신탁통치안이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드는데 있어 가장 적합한 국제적 지도노선이오.

 

따라서 당신이 영도하는 조선민주당도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독립동맹·북조선 여성동맹·북조선직업동맹등 다른 정당·사회단체와 함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해 주시오」라고 요청하더군요.』



○사령관요청 거절



치스차코프는 즉석에서 찬성확답을 바랐다. 그러나 조만식 선생의 생각은 달랐다.



박박사의 증언­.



『조만식 선생은 「신탁통치문제는 우리민족에게 너무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가부를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오.

 

당헌에 따라 총의를 결정할때까지 기다려 주시오」라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냉정한 태도를 지으며 사령관실을 나가더군요.』



당시 소련군정 밑의 북한정세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소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된 이후 민족·기독계열,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의 선풍이 몰아칠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북한내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도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점에서만은 민족진영과 보조를 맞추려는 듯 했다.



신탁통치 문제가 나오기 전까지 고당은 소련군정·공산당과도 되도록이면 심한 충돌을 피하고 신중과 인내를 다해왔다.



그러나 신탁통치문제가 나오면서부터는 민족의 운명과 민족의 자부를 살리기 위해서는 소련군의 총칼 앞에서도 죽음을 아끼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였다.



당시 조선민주당 청년부장이었던 박재창씨(77·고당기념사업회 상임위원장)의 증언.



『소련군사령관을 만나고 숙소인 고려호텔로 돌아온 고당선생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난국을 타개할 방안을 심사숙고하셨습니다.

 

선생은 다음날 새벽 호텔주변에서 산책을 하시며 「민족대의를 당당히 내세우고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했다」며 주위 비서진들에게 46년 1월2일에 당중앙위원회를 소집토록 지시하셨습니다.』



고려호텔의 고당방에서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3·1운동때의 민족대표 33명을 상징해서 정한 33명의 중앙위원중 최용건·홍기주등 공산주의 계열이 의도적으로 불참,24명만 참석한 가운데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다」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박재창씨의 증언­.



『선생은 이 결의문을 즉시 치스차코프대장에게 정식 통고했어요. 중앙위원들은 이같은 결의를 하는 과정에서 통신망이 없어 남한의 분위기를 전혀 몰라 안타깝게 생각했지요.

 

선생을 비롯한 조민당 간부들은 이 결정이 소련군과 공산당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았기 때문에 비상한 각오를 했지요. 이날 밤 간부들은 소주병을 갖다 놓고 비장한 심정으로 반탁투쟁의 장도를 맹세하는 건배까지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조종완 위원(평양대성학교출신)같은 이는 「호아장출환미주,여이동소만고수」(아이야,좋은 술이나 가져 와라. 술과 함께 만고수심을 풀어볼까 하노라)라는 이백의 당시 한수를 읊기도 했지요.



조민당으로부터 회답을 받은 소군정지도부는 김일성과 고당의 오산학교 제자인 최용건을 고당에게 보내 찬탁으로 번의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고당의 확고한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 치스차코프대장은 연일 로마넨코소장을 비롯,고위 지도부를 고당에게 보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군정이 이같이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골똘하고 있을 때인 46년 1월3일 공산당측의 주최로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는 대시위행진이 평양에서 있었다.



이어 이틀후인 1월5일 오전 11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회의실에서 조만식과 소련군정 사이의 결별을 최종 확인하는 극적 장면이 연출됐다.



○의장직사임 압력



소군정의 주도아래 평남인민위원회 긴급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위원 32명중 공산측은 16명 전원이 참석했으나 민주진영측에서는 의장인 고당 외에는 김병연·박현숙·이종현·이윤영등 소수 위원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머지 위원들은 소군정에 실망하고 38선을 넘어 남하,평양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 군정측에서는 치스차코프 대장·레베데프 소장·로마넨코 소장·이그나치프 대좌·메크레르 중좌·발라사노프 정치고문·소련파 한국인 통역장교 5명 등이 참석했다.



소 군정은 이 위원회로 하여금 찬탁결의를 시키자는 속셈이었다.



따라서 찬탁결의를 투표로 할 경우 공산당측의 승리가 확실한 회의였다.



박길용 박사의 증언.



『레베데프소장이 신탁통치안의 내용과 뜻을 설명하자 이주연 등 공산측 위원들이 찬탁발언과 함께 찬성결의를 하자고 의장인 고당에게 요구했지요.

 

그러자 고당은 「나는 조선민주당 소속이기 때문에 반대하며 이 문제를 경솔히 다루기에는 나의 민족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충분한 토의가 있기 전엔 절대 표결에 부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하더군요.

 

순간 소군정 지도부석에서 「그러면 의장직을 사임하라」는 살기어린 고함이 터져나왔습니다. 고당은 이미 각오한듯 의장석에서 일어나 구두로 사의를 표했습니다.

 

리고 그는 「신탁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모든 의사는 우리 조선인의 자유이어야 한다. 신탁을 찬성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무리 군정이라도 언론이나 의사표시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벗어난다.

 

무슨 구실을 붙이더라도 신탁통치라는 것은 남의 나라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주권과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요지의 사임사겸 최후의 반탁 발언을 했습니다.』



고당은 평소 흥분하지 않는 성품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두눈에 불꽃이 튀었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호통쳤다고 한다.



맑고 강강한 음성이 성에 낀 차가운 유리창에 쨍쨍 울렸다.



사임사를 마친 고당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민주진영위원들도 일제히 뒤따라 퇴장했다.



소 군정측은 곧 고당의 평남인민정치위 의장직 사표를 정식 수리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임시의장으로 홍기주를 내세운뒤 공산측 위원만으로 찬탁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청사를 나온 고당은 민주진영인사들과 함께 숙소인 고려호텔로 직행,향후 투쟁을 논의했다.



이날부터 고당은 고려호텔에 연금된채 외부와의 연락이 일절 단절되고 말았다.



박박사의 증언 계속.



『고당이 자리를 박차고 회의실밖으로 나가자 치스차코프대장은 혼잣말처럼 「지독한 영감이군,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밖에 없을 거야.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둬」라고 말하더군요.



마침 나의 숙소도 고려호텔이었지요.



다음날 출근길 호텔주변에 무장한 보안대원 4∼5명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조만식 선생의 신변 감시가 시작됐음을 알았습니다.』



이날부터 고당은 외부와 차단된채 수인아닌 수인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소련군정 고위 장성중 유일한 생존자인 전소련군 제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소장(90·모스크바거주)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대신 김두봉 내세워



『솔직이 우리는 조만식에게 후원제(소련인들은 신탁통치를 후원제 또는 후견제라고 했다)를 설득하기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요. 그가 이 문제만 찬성하면 북한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대할 계획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후원제를 찬성하지 않아 우리와의 결별이 불가피했지요.



그의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의장직 사표가 수리된 며칠후 제1극동방면군 군사위원 스티코프상장이 치스차코프사령관에게 「처음부터 인민들의 추앙이 높은 조만식을 포기하지 말고 설득해 소비예트 정권 창출에 앞장세우라고 지시했지 않은가. 그를 포기한 것은 당신들의 정치력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인민들의 반발등 문제가 간단치 않을 것 같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강도높은 질책과 지시를 내렸습니다.』



스티코프장군의 이같은 지시는 고당대신 내세울 수 있는 상징 인물을 선정하라는 뜻이 포함돼 있었다.



이때까지 이렇다할 방향설정을 하지 못하고 있던 연안파는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당과 함께 찬탁분위기에 편승하고 있었다.



소군정은 조만식대신 연안파의 지도자 김두봉을 상징인물로 내세워 그로 하여금 연안파 중심의 정당결성을 하도록 도왔다.



이와 함께 조선민주당 위원장에 조만식 대신 최용건을,부위원장에 찬탁결의때 임시 의장으로 공을 세운,장시우(후에 상업상역임)의 동향친구 홍기주를 각각 내세웠다.

 


레베데프장군의 회고는 계속된다.



『조만식을 정치권에서 발을 묶어놓는등 적극적인 정책을 편결과 북한내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후원제 찬성쪽으로 기울고 있었지요. 그러나 문제는 서울의 거센 반탁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믿고 있는 박헌영등 공산당중앙도 초기엔 침묵을 지키는등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박헌영 등에 대한 제2단계 대책을 세워 비밀리에 그를 평양으로 불러올려 김일성 등과 만나도록 했습니다.』


 

 

        이상. 끝..  제 2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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