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독재의 최고봉.26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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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차 세계 대전과 외교 분야 쪽은 어땠을까.?
결과는 스탈린의 바램대로 외교적으로 승리 했으며 또한 소련은 초강대국이 되었다.
또한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는 얄타 회담에서의 외교적 승리가 있다. 얄타 회담을 통해 스탈린은 루즈벨트의 불안함을 이용하여 대일전 참전을 약속하는 대가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확장을 보장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만주 작전을 통해 70만의 관동군을 2만의 사상자만으로 제압하는 위업을 달성하여 한반도의 북쪽의 38선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과의 합의가 없었다면 아마 한반도 전체는 소련군이 점령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 각국에 공산정권을 세워서 소련과 서방의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2차대전에서 폴란드 침공의 결과 독일과 국경을 맞대었다가 독소전쟁 초반에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음을 상기하면 스탈린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생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스탈린과 정치적으로는 대항점에 있었지만, '짧은 임기'를 지닌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라는 한계 상 국가 전체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인 스탈린에게 있어서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아니 대통령이 아니라 전제군주제 국가의 왕조차도 스탈린같이 권력이 막강하진 않았다. 왕도 견제세력이 있어서 잘못하다가 자기목이 날아가기 때문.
독일과의 전쟁 초반 몇달만에 수백만의 군대와 모스크바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잃게 되는데 그 원인 중에는 스탈린이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 1930년대 말에 군대 내에서의 대숙청으로 쓸만한 지휘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과, 수많은 사전정보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침공을 끝까지 믿지 않으면서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 무리한 사수명령으로 많은 병력을 포위섬멸작전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 것 등이다.(참고할 관련서적은 :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택, 1941년 6월"(존 루카치 저), "세계사 최대의 전투"(앤드루 나고르스키 저) 하지만, 국가총력전의 형태로 흐른 당시의 전쟁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계열의 게오르기 주코프와 세묜 티모셴코 등을 등용했다는 점과 미국의 렌드리스(Lend-Lease,무기대여법)를 받아 투하쳅스키의 종심전투이론을 실행해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이전 문단에서도 나오다시피 스탈린은 초반의 충격을 털어낸 채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정을 챙겼는데, 군사적 능력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정치장교로 시작했던 스탈린은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주코프와 같은 고위 군장교들 보다는 실전에는 무리가 있었고, 작전의 대부분을 주코프에게 맡기고 본인은 행정을 맡아 전시의 행정을 처리해나갔는데, 이는 히틀러와 대비되는 점이었다. 즉흥적으로 작전을 입안하고 이에 관여한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철저한 분석과 현실적인 안목을 통해 주코프와 일선 야전사령관들의 업무에는 그다지 개입하진 않았다. 단, 불필요한 간섭을 줄인 것이지, 여러 장치를 통해 장교단을 철저히 휘어잡고 있었다. 공업화정책을 통해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전쟁지휘능력과 대숙청, 정치장교제도를 빼고본다면 스탈린이 관료로서의 능력이 제법 괜찮았음을 알 수 있는데, 혁명기부터 행정분야를 도맡아 처리한 점과 권력을 잡고 난 뒤에는 의욕적으로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한 점이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했다고 보는것이 옳을 것이다. 현대전에서 총포탄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탄약을 아끼는 것은 범죄요. (중략) 만약 더 많은 포탄을 사용했다면 올해 2월에는 승리했을 것이오. 전쟁을 한달만 더 일찍 끝냈다면 비용을 얼마나 아낄 수 있었겠소? 10억 루블은 절약됐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포탄이 별거요? 만약 당신이 현대전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오. - 1940년 4월 회의 중 스탈린의 발언 # 포병덕후로도 유명하다.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현대전에 대한 통찰이 탄탄한 근거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뭘 더 제공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눈은 있었던 듯하다. 한편.. 종교정책은 어땠을까.?? 무시무시하게도 정교회 성인들이나 그리는 이콘에 나오기도 했다.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성녀 마트로나(Матрона)와 비밀리에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총대주교 제도를 용인해주긴 했지만 신학교는 폐쇄되어야 했고, 적백내전당시 초법적으로 교회에 대한 약탈과 사제 살해등이 이어졌다. 특히나 1918년 키에프 수좌 대주교를 비롯하여 주교 교구사제 부제 수도자 평신도등 1만 2천명이 집단 살해되고 교회와 수도원은 약탈당했다.
내전이 끝난후 볼셰비키 지도부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는데, 레닌은 직접적인 교회에 폭력을 선호했고 트로츠키는 교회 내부를 분열시킨다음 장악하는 방법을 썼다.
1922년 신경제정책 이후에 교회에 침투한 볼셰비키 추종자들이 교회의 반혁명적 행태를 항의하며 소련정부 체제를 찬양하고, 교회를 장악하려 했는데 이를 반대한 총대주교는 체포 구금 당했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석방되나 1925년에 사망했고 17년간 총대주교좌는 공석이었다.
물론 교회에 침투한 '진보'들이 교회 탄압과 성직자 처형과 추방을 긍정한것은 아니나 무신론을 표방한 공산주의에서 자유 평등 정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런 가치를 추구하면 공산당에서도 교회를 용인할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어용화된 기존 교회를 대체하여 상당수의 신자들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신학교 출신이라서 정교회의 본질과 러시아 민중의 전통적 신앙심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만큼 그의 교회 탄압은 전례없이 잔인하고 가혹했다.
기존의 공산당 종교 정책에서 정치 깡패 노릇을 했던 무신론자 연맹을 1929년 전투적 무신론자 연맹으로 개창하여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부수고 이콘을 불태우며 교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앞에 있는 스탈린 이콘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생존을 위해 굴욕적으로 제작한것으로 진지하게 스탈린을 성인으로 추존한 건 아니다.. 공산당에선 실제로 정교회에서 거의 유일한 자체수입인 양초 판매 수익을 끊기 위해 초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이콘과 성물 십자가 때려부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종종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러시아 정교회가 탄압이 완화된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면 그동안 러시아 역사와 밀접한 정교회를 끌어들어야 하는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다.
1943년 교회의 지지를 공식 요청했는데 이는 유물론자들이 2차대전 승리를 위해 믿음의 힘을 믿을리는 없고 그해 12월 테헤란에서 루즈벨트와 처칠과 만나기로 약정이 되었는데 영국 성공회 주교단이 소련교회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의 숙원이던 17년간 공석이던 총대주교 선출을 승인하고 사제 석방, 교회 신학교 복구도 승인했다. 이과정에서 총대주교는 스탈린에게 감사를 표시했고 정교회는 소련과의 굴욕적인 밀월관계를 시작할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교회 탄압을 그만둔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무신론자 그룹과 유사한 즈나니에(Znanie) 협회를 창설했는데 이번엔 과학자와 교수집단들을 이용하여 종교를 무지몽매로 몰아가는 전략이었다.
러시아 정교회 수뇌부는 전쟁 직후 그리구 전후 잠시 동안은 외국 귀빈이나 단체가 방문시 스탈린 동무와 함께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세계 청소년 축제가 개최되었는데 공산당에 포섭된 정교회의 어용 사제 평신도들에게 환대받은 멕시코 기자단들은 "소비에트 정부와 국민들 덕분에 종교는 이 나라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술회 할 정도였다. 마치 1930년대 서구 좌파에서 소련을 지구상 최초의 남녀 평등 실현, 노동자의 천국으로 묘사한 선전에 낚인 것과 같다.
이 같은 탄압은 브레즈네프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소련 공산당은 그동안의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박멸 정책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존의 반 종교 정책을 전환하진 않았으나 소련 내부에서도 러시아 정교회를 이용하여 슬라브 민족주의와 러시아 역사 문화 부흥이라는 목적으로 교회 탄압의 수위를 낮추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2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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