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편 이어서~~
황씨는 망명전 아내 및 식구들에게 유서를 썼다고 한다. 내용은 이렇다.
나는 한평생 모험다운 모험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만은 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모험을 감행했다. 민족적 양심의 발현은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다. 나는 그 같은 민족적 양심의 힘에 내몰려 북을 벗어났고, 이제 남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도정에 서 있다. 경호요원이 문을 두드렸다. 내가 들어오라고 하자 두 명이 방으로 들어왔는데 한 명은 방탄조끼를 들고 있었다.
“저격이 있을지 모르니 이걸 받쳐 입으셔야 합니다.” 내가 떠날 채비를 마치자 바로 출발이었다. 몇 겹의 경호 속에 우리는 헬기와 승용차를 번갈아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필리핀 당국이 왜 이렇게 경호에 신경을 쓰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필리핀에는 북한이 무기를 지원하는 비밀 공산세력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북한의 적극적인 사주가 있으면 얼마든지 나를 사살할 수 있는 테러조직이었다. 비행기는 필리핀 정부가 제공한 보잉 707기였다. 대한민국 영토로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에 대한 경호는 국제 법에 따라 필리핀 당국이 맡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을 태세였다.
기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필리핀의 비밀요원들은 모두 무장하고 있었고, 우리 측 요원들도 무장한 상태였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진입하기 위해 움직이자, 문득 아내와 세 딸과 아들의 얼굴이, 손자와 손녀의 얼굴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랑하는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족과 동지들을 희생시키면서 선택한 이 길이 과연 바른 길인가.
과연 이토록 엄청난 희생을 보상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비행기가 제주도 상공에 들어설 무렵, 한국의 공군전투기들이 나타나 양 옆에서 엄호를 했다. 엄호하는 공군전투기들의 위용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밖을 내다보니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남녘이 저만치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남녘 땅, 영광스러운 어머니 조국 땅은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게, 많은 사람들을 남겨두고 너만 왔느냐’고 이 죄를 대체 무엇으로 씻을 수 있을지, 새로운 걱정이 기쁨을 삼켜버린 듯 했다. 그날 1997년 1월 30일 평양의 날씨가 어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평양은 잿빛 구름 잔뜩 낀 하늘에 자우룩한 안개 속이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내 마음이 그만큼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 혼자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한집에서 사는 아들 경모는 간염으로 입원해 있었고, 며느리와 손주들은 자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여느 때처럼 나를 보내는 아내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갈등에 시달렸다. 이번 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끝내 아내에게 희미한 암시조차 남기지 못했다. 간밤에 잠 못 이루고 마냥 뒤척이면서 망설이다가 굳힌 결심 그대로였다. 말하지 않는 게 좋다- 내가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은 무엇보다도 일이 내 뜻대로 될지 안 될지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0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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