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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중요. 기밀(비밀)문서등.공개로 인해 새롭게 밝혀지는6.25에 대한 진실.0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6 2020-01-21 18:26:47

**중요,중요. 기밀(비밀)문서등.공개로 인해 새롭게 밝혀지는6.25에 대한 객관적이고 확실해진 진실.06편.


* 중요하다 싶은것 색깔로..



05편에 이어서~~

 

 

[국제환경 변화와 6.25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의도]

 

 

스탈린은 소련 주도로 한반도 북반부에서 공산화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1950년 1월까지는 세계 제2차대전 기간 중 미국 등 연합국과의 합의에 의하여 정한 경계선을 넘어 남한에 까지 적극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에 의하여 통일을 성취하려는 북한 지도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옐친대통령이 1994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6.25전 개전에 관하여 정리한 216건의 소련측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통일을 위한 대규모 남침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5일 모스크바에서의 스탈린 김일성간 회담에서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주둔 미군규모, 남북한 군대의 優劣을 질문한 후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12월 북한에서 철수)과 미 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3.8선 분할은 한반도 지도급,및 국민 어느 한명과도 의견 없이 자기들끼리 합의한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한 침공을 반격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북한측은 1949년8월12일 김일성 쉬티코프대사 면담 및 9월3일 김일성의 로어통역관 문일과 툰킨(Tunkin)공사 면담 시 1949년7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38선은 이미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하면서 대남 전면 공격과 최소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9월11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이 대부분의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제기되었음을 감안하여 호의적 관심을 보이면서 김일성을 조속히 면담, 8월12일 및 9월 3일자 북한측 제의 사항과 관련하여 남북한의 정치 군사정보와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토록 지시하였다.

 

 

9월14일자 전문 보고시 툰킨공사는 9월12일과 9월13일 김일성과의 면담시 김일성이 종전과는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어조로, 현 상황에서 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는 期待難望이므로 전면전을 早期에 개시하는 대신, 옹진반도와 해주인근까지를 점령할 것을 제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아울러 동 공사는 인민군이 남침시 남한내 빨치산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신속히 승리할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므로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하면서 옹진반도 점령과 같은 제한적 작전 수행이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더라도 이는 미국의 성공적 反蘇캠페인에 이용되어 소련에 유익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평양주재 대사관의 보고를 받고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9월24일 평양주재 대사에게 하달한 훈령에서 남한내 빨치산 활동 강화계획은 승인하되, 전면적 남침이나 옹진반도 점령작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분쟁이 장기화됨으로써 통일이 지연될 것이라는 이유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옹진반도 점령도 남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이들이 북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한 뒤 반격작전을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해가 바뀌어 1950년 1월17일 북경향발 이두연 북한대사를 위한 박헌영 외상주최 오찬시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원들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언급하면서 그 동안 남한측의 대북한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1949년3월5일 스탈린에게서 승인을 받은 반격형태로서의 대남공격을 할 수 없었으므로 남한해방을 위한 인민군의 대남 공격 승인을 받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할 것을 제기하였다.

 

 

김일성은 이어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상부의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며 스탈린이 그에게 법이기 때문에 [그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김일성의 상기 언급 내용을 청취한 참사관급 2명의 소련외교관 이그나티에프(Ignatiev)와 페리센코(Pelishenko)가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일반 문제로 대화주제를 바꾸려 하자 김일성은 쉬티코프대사에게 접근하여 1949년 6월 모택동도 중국혁명이 끝나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남한공격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 김일성은 3일만에 끝날 수 있는 옹진작전을 스탈린이 허가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총공격시에는 몇일 내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으나 쉬티코프는 옹진작전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

 

 

스탈린은 상기 대화에 관한 쉬티코프의 비밀 전문을 비신스키(Andrei Vyshinsky) 외상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1월30일 쉬티코프대사에게 하달한 전문에서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그가 남한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큰 일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위험이 없도록 잘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김을 만나 동 문제를 의논할 용의가 있으며 그를 도울 의사가 있다”는 자신의 의사를 김일성에게 전달토록 지시하였다.

 

 

스탈린은 북경측과 한 차례 더 상의한 후, 2월 9일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평양측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의 준비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을 하였다. 그 후 소련은 북한을 향해 탱크, 탄약, 군장비, 대포, 의약품 및 석유 등을 적극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선택한 시기의 6.25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1950년 2월과 3월중 북한내 전쟁준비를 감독하기 시작하였다. 2월 4일 김일성은 북한의 추가 창설 3개 보병사단용 무기 구입을 위하여 1951년도 소련의 대북한 차관을 1950년도 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스탈린의 허가를 구해줄 것을 쉬티코프대사에게 요청하고 3월 9일 추가로 1억 2천-5천만 루불 상당의 무기 구입을 요청하는 공한을 쉬티코프대사를 통하여 소련 정부에 송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측은 3월 12자 비신스키외상의 쉬티코프대사앞 전문과 3월 18일자 스탈린의 김일성앞 메시지를 통하여 동의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2월 23일 쉬티코프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북한인민군 군사고문단장직에 전쟁영웅 바시리에프(Vasiliev)중장을 임명하였다.

 

 

러시아정부가 한국정부에 제공한 소련측 비밀문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3월30일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4월25일 평양으로 귀환하였음을 밝히고 있지만, 상세 모스코바 체류 일정과 스탈린과의 대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대화시 스탈린이 강조한 내용은 5월 김일성이 방중하여 남한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방침을 설명하자 모택동이 이를 스탈린에게 확인하는 전문을 타전한 데 대하여 스탈린이 답변을 해주는 5월14일자 전문에 나타나 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스코바 회담에서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하되,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 질 때 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자고 제의하여 북한측과 합의하였다고 하면서 김이 모택동에게 설명한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중국을 한국전쟁에 끌어들였는데, 이는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려는 의도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끈질기게 남침승인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승인을 한 것이 아니라 1949년 수차에 걸친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전 개전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한 기초 위에 남침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이 1949년 기간 동안 계속 김의 남침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쉬티코프대사로 하여금 철저히 감독을 하도록 10월 이후 수차에 걸쳐 지시하였던 것과는 달리..  태도를 바꾸어 1950년 1월30일자 전문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자료로서는 상기 5월 14일자 스탈린의 모택동앞 電文과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수록한 보고서가 있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게 된 스탈린의 “변화된 국제환경”의 첫번째 요소는, 국제정세 일반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이다. 그는 중국에서의 공산당 승리, 소련의 원자탄 획득(1949년 8월 첫 실험),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 의지 약화 등으로 인해 공산진영의 힘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상대적으로 미국의 힘을 낮게 평가하고 공산 진영의 동향에 대한 서방권의 반응에 덜 개의하게 되었다.

 

두번째 요소는 1월 12일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고 한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의 새로운 방위정책 선언이다. 만일 미국이 한국방위를 분명히 하였다면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 요소는 1950년 1월 중 구체화되어 가고 있던 모택동과의 중?소동맹조약 체결이다. 동 조약의 前文에 밝힌 바와 같이 양국간의 동맹은 공산진영에 대한 반대세력에 국제적 차원에서 공동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서, 중국 공산혁명, 소련의 원자탄 확보와 아울러 2차대전후 확대되고 있는 공산진영의 勢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관한 구 소련공산당 국제부 보고서는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게 되었으며 중·소 동맹조약, 소련의 원자탄 보유로 미국이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도전하는데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1월에 발표된 애치슨선언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미 행정부는 1949년 8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10월 중국공산정부의 수립 등 국제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1950년 1월 NSC68과 같은 對蘇戰略을 검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하였던 한반도에서 6월 북한군의 남침이 있자.. 즉각적인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서독, 이란 등 다음 목표에 대한 공산진영측의 공격으로 이어지는 소련의 세계적화 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

 

 

요약하면, 스탈린이 1950년 1월30일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배경에는 스탈린 자신이 설명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우려한 바와 같은 1949년 기간 중에 있은 국제환경 변화가 그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소련이 미국과 함께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고 중국공산혁명의 성취로 아시아지역에서 전략적 상황이 공산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미국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음을 선언하자 스탈린은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고 이러한 견해가 이제까지 전통적 견해가 되어왔다.

 

따라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정세 변화는 스탈린이 6.25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도 되고 미국이 공산진영의 팽창을 저지하는 차원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輕視해왔던 한국에 대하여 즉각적 지원을 제공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상..   07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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