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북한에서 주장하는 독립운동의 역사.과연.?? 0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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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편..
*** 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무장투쟁
1930년대 부터 살펴보는게 적당할 것 같다.
1931년 7월의 만보산 사건 및 9·18사변이 일어난 후, 독립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이 시기부터 동북의 한국교민들은 중국 동북의 각 민족 인민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하게 되었다.**(참고)진가외 (陳可畏),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동북의 한국교민,” 대한민국임시정부 옛청사관리처 편 김승일 역,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p. 91.)
한국독립당이 만주사변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임하는 정세인식은 다음과 같다. 즉, 왜적의 만주사변은 다만 만주 침략에 그치지 않고 장차 산해관 이내 중국 대륙과 기타 지역까지 침략할 것으로 정확히 보았다. 그렇게 되면 중국 중앙군과 공동작전을 펴서 무기 탄약과 일체의 보급을 얻어낼 수 있으며, 또 일보 더 나아가서 세계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하여 전후 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참고)趙擎韓(한국독립군 지도자), ????백강 회고록????, (서울: 한국종교협의회, 1979), p. (서울: 아세아문화사, 1999), pp. 324~325에서 재인용.
이처럼 한국독립당은 만주사변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파악하였고 국제적인 모순관계가 전쟁이란 형태로 폭발하는 것을 이용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무장대 가운데 무기와 의약품 등을 제공해줄 수 있는 강력한 후원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동만지방으로 이동하여 시세영의 항일부대와 연합작전을 펴기로 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독립군은 한중연합군을 추진하여 1932년 1월 29일 서란현성을 포위, 공격하여 적군 150여명을 살상하는 등 전과를 올린 것이 한중연합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다. 이외에도 그해 9월의 1차 쌍성보 공격전에서 위만군 1,000여명을 살상하고 2,000여명을 항복시키는 전과를 올렸고, 11월의 2차 쌍성보 공격전에서는 일본수비대 한개 중대를 섬멸하고 많은 위만군을 살상,투항하게하였다.
특히 1933년 6월의 대전자승첩에서는 한중연합군이 일본군 2개대대를 완전히 격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은 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군의 항전역사에서 최대의 승전이며 독립군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중에서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버금가는 대승으로 평가된다. **(참고)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 p. 105.
또한 동변도지방에서 1933년 10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겨울철 치안숙정공작에 밀려 1933년 10월 한국독립군의 주력은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시리즈 0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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