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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출생설에 관해..
Korea, Republic of 돌통 0 333 2021-03-05 20:15:12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출생에 대해~~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전에는 김일성 주석이 남쪽 사회에 '가짜'로 매도되어왔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망나니'나 '정신병자'로 치부되어왔다. 특히 김정일은 아버지 덕분에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흔히 포악하고 방탕하며, 괴팍하고 고집이 세며, 남들 앞에서 말도 몇 마디 못하는 영화광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왔다.

 

 

이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쪽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TV를 통해 자신이 망나니나 정신병자가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구라파 사람들은 나보고 왜 은둔 생활하느냐고 그러는데, 나는 과거에 중국도 갔댔고 인도네시아도 갔다왔고 그동안 외국에도 많이 다녔습니다. 이번에 김 대통령이 찾아오셔서 나를 은둔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고 던진 농담은 자신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그는 정상회담을 통해 여유 있고 양보할 줄 알며, 배가 많이 나오긴 했지만 건강한 편이고, 재치와 유머까지 지니는 등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남쪽에서 인터넷을 통해 '김정일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김정일 따라 하기' 모임이 생기는 등 '김정일 신드롬 (syndrome)'이라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남쪽의 보수극우 언론조차 김정일을 편견과 왜곡 없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가 좋든 나쁘든, 통큰 지도자든 잔인한 독재자든, 북녘의 최고통치자이기에 그를 제대로 알거나 평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김정일의 출생에 관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상을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다. 남쪽에서는 그가 태어난 날과 장소에 관해서부터 이의를 제기한다. 아버지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제치하에서 정말 항일빨치산투쟁을 했느냐고 시비를 걸었다면, 아들 김정일에 대해서는 진짜 1942년 2월 16일 백두산에서 태어났느냐고 의문을 갖는 것이다.

 

 

북녘 자료들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 김일성과 어머니 김정숙이 러시아와 백두산을 오가며 항일빨치산투쟁을 하던 중 백두산의 한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국가정보원과 통일부 등 정부쪽에서나 민간연구자들이나 그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김정일이 1941년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녘에서는 무슨 기념일을 따질 때 5년이나 10년 등 5의 배수가 되는 해를 '꺾이는 해'라고 부르며 다른 때보다 크게 경축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정일을 1942년생으로 바꾸면 1912년생인 김일성의 생일과 '꺾이는 해'를 맞출 수 있기 때문에 1년을 늦추었다는 것이다. 북녘에서 가장 큰 사회주의 명절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인데, 예를 들어 2007년 2월 16일은 김위원장의 탄생 65주년 기념으로 그리고 4월 15일은 김주석의 탄생 95주년 기념으로, 둘 다 '꺾이는 해'의 명절로 묶어서 더욱 크게 경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참고로, 명절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붙인다. 북녘의 명절은 남쪽의 전통명절에 속하는 민속명절과 국경일에 해당하는 국가적 명절 또는 사회주의 명절로 나눌 수 있는데, 민속명절엔 음력설과 한식, 단오, 추석 등이 있고, 국가적 명절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 및 당과 국가 그리고 군대의 창건일 등이 포함된다.

 

 

한편, 나 역시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북녘의 주장엔 큰 의혹을 품어왔음을 밝힌다. 내 지인의 말에 의하면 1998년 처음으로 북녘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평양 만수대 김일성 동상 뒤쪽에 자리잡은 조선혁명박물관을 방문하여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밀영의 모형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나를 안내하던 항일혁명 투쟁시기 교양부 과장에게 물었다. 김일성부대가 1930년대 만주일대에서 투쟁하다 1940년 말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물러났다는데 김정일이 어떻게 1942년에 백두산에서 태어날 수 있었느냐고. 빨치산들이 1940년 말 하바로프스크로 후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일성부대가 백두산에 몇 군데의 밀영을 설치해놓고 러시아와 백두산을 오가며 소규모로 투쟁을 계속하던 중 김정일이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덧붙여 나의 방북일정을 조정하면서 안내를 맡고 있던 북녘 관계자는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8권에 그 부분이 잘 나와 있다며 다음날 갖다 주겠다고 했다.

 

 

김일성 회고록은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1992년 제 1권이 나오기 시작하여 1998년 제 8권까지 출판되었는데, 이 가운데 7-8권은 그가 죽은 뒤 생전에 남겼다는 증언과 각종 자료에 의해 써진 것이다. 그래서 '세기와 더불어' 라는 회고록 이름 밑에 괄호를 달아 '계승본'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놓았다. 누가 언제 썼든 회고록 자체를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김일성부대가 만주에서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물러간 시기 및 그 이후의 활동과 관련하여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적들이 이를 악물고 우리를 괴멸시키려고 하는 조건에서 우리가 대오를 수습하고 재편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공간적 지대를 확보하는 것은 무장투쟁의 현재를 위해서뿐 아니라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로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러시아] 원동으로 들어갈 준비를 끝내고 [만주] 처창즈치기를 떠난 것은 [1940년] 10월말경이였습니다.... 하바롭스크에는 그 당시 원동군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국제당 동양선전부도 한때 여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국제당이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쏘만국경을 넘어 쏘련경내에 들어선 것은 1940년 11월이였습니다.... 우리가 참가한 흔히 말하는 1941년의 하바롭스크회의는 1940년 12월에 소집되여 1941년 3월 중순까지 계속되였는데 비밀사업을 하는 군대병영에서 진행되였습니다....

 

거기서 한해 겨울을 난 다음 나는 다시 만주와 국내에 나와 소부대 활동을 벌렸습니다. 1942년 여름부터 우리는 쏘독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급변한 정세의 요구에 맞게 동북항일련군과 쏘련군부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뭇고 [하바롭스크 부근에 설치된] 북야영에 정착하였습니다....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기지를 떠난 것은 1941년 4월이였습니다.... 우리 소부대의 인원이 30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소부대 전원이 일본군복으로 변장했는데 그럴듯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4월 상순 어느날 심야에 국경을 넘어섰습니다. 국경을 넘은 다음에는 옛 근거지 자리들을 밟으면서 백두산 동북부쪽으로 행군해갔습니다....

 

1941년 9월 중순경에 나는 지난번 소부대활동의 성과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다시금 소부대를 거느리고 만주와 국내로 나갔습니다. 그때의 주요 임무는 안길, 김일, 최현 소부대들과 련계를 맺고 그들이 수집한 정찰자료를 종합하며 두만강 연안과 국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소부대, 소조들의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고 그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자는데 있었습니다. 》

 

 

 

위 인용문은 김일성 부대가 만주를 떠나 하바로프스크로 옮긴 시기를 1940년 10-11월이라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41년 4월부터 만주와 백두산일대에서 소규모 유격대 활동을 벌이다 1942년 여름부터 하바로프스크에 정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42년 2월 16일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주장과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숙과의 결혼 및 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나와 김정숙은 그때 이미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하는 과정에 서로 알게 되였고 백두산을 넘나들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사이에 벗이 되고 동지가 되고 한생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유격대식 결혼이라는 것이 아주 간단합니다. 대원들 앞에서 오늘 아무개 동무와 아무개 동무가 결혼을 한다고 선포하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그때 부부로 선포된 다음에도 소속 중대나 소대에서 종전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나나 정숙이로서는 결혼 후 처음으로 맞는 잊을 수 없는 봄이였습니다. 나는 그 봄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 사진 뒤면에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3.1. B야영구에서'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진이 력사에 남아 이처럼 큰 박물관에 전시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항일혁명을 20년 동안이나 했는데 사진을 많이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새벽에 백두밀영에서 태여났습니다. 김정일의 출생은 우리 일가로 볼 때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대경사였습니다. 나와 김정숙은 총포성이 울부짖는 가렬한 전장에서 조선의 남아로 태여난 김정일의 장래를 뜨거운 마음으로 축복해주었습니다.... 그가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백두밀영과 원동의 훈련기지에는 인가조차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소도 없고 번지도 없는 귀틀집과 천막에서, 때로는 빙설로 덮인 로천에서 청춘시절을 보냈습니다....

 

김정일이 어려서부터 대가 바르고 배짱이 센 품성을 지닐 수 있은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중요하게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신념이 강한 투사들의 품에서 투쟁과 생활의 참다운 진리를 배우며 아무런 구김살도 없이 씩씩하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이 어린 나이에 비해 정신적으로 조숙한 것도 빨찌산의 물을 먹으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앞에 언급된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아내 김정숙의 사진은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김일성이 "제일 아끼던 사진"이라고 한다. 1941년 3.1절을 맞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찍은 것이라고 하는데, 빨치산시절 김정숙과 둘이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김정일이 1942년이 아니라 1941년 2월에 태어났다면, 그 때 둘 중 한 사람이 갓난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사진이 몹시 귀했던 시절에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함께 사진을 찍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둘이 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봄이어서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 사진 뒷면에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3.1."이라고 써놓았다는 게 조작이 아니라면, '꺾이는 해'를 맞추기 위해 김정일이 자신의 생일을 1년 늦추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은 억측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그러나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북녘의 주장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김일성 부대가 1941년 4월부터 만주와 백두산일대에서 소규모 유격대활동을 벌인 것이 사실일지라도, 김정숙이 임신한 상태에서 백두산에서 활동하다 김정일을 낳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빨치산들이 만주와 백두산 그리고 하바로프스크를 오가며 투쟁을 했을지라도, 임신한 빨치산은 일제치하의 만주나 백두산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출산을 준비하지 않았겠느냐는 뜻이다. 눈쌓인 산 속에서 목숨걸고 간고한 투쟁을 벌이던 빨치산들이 임신과 출산에 신경 쓸 여유가 있었겠느냐고 짐작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소련영내로 옮긴 터였으니 빨치산대장의 아내에게 그 정도 배려는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이 앞선다.

 

아무튼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밀영은 '소백수골'이라 불리는 '천고의 밀림' 속에 자리잡은 '천험의 요새'다. 빨치산사령부가 여기 있었다고 하는데, 북녘에서는 그 터를 1980년대에 발굴하여 혁명사적지로 조성해 놓고 있다. 나는 2003년 그곳을 방문하여, 김일성 대장이 작전회의를 주재했다는 사령부 건물과 거기서 조금 떨어져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고향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백두밀영 입구에는 "백두산은 나의 고향입니다. 김정일"이라고 써진 큼지막한 간판이 세워져 있고, 밀영 뒤로는 집채만한 바위에 '정일봉'이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다. 본디 그 봉우리 이름은 '장수봉'이었는데, "김정일 동무의 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 장수봉을 정일봉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백두산이 '혁명의 성지'이고 김정일이 실제로 거기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김일성이 1940년 10-11월 소련으로 옮긴 뒤부터는 만주와 백두산일대에서 소부대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오랫동안 아주 훌륭한 항일투쟁을 했다.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백두산일대에서 투쟁했던 빨치산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다. 이 사실만 강조해도 될 것 같은데, 백두산 깊은 골짜기에까지 그렇게 과대선전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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