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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죽은 사람을 다시 꺼낸 이유
Korea, Republic o NKJOB 2398 2008-08-20 09:17:48
자유북한방송 2008-08-19

[유례없는 식량난으로 북한 내부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사람들의 심장을 뒤집어 놓을 만큼 충격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1990년 후반기는 북한사람에게 무척이나 힘든 시절이었다. 공장이 돌아가지 못해 생필품이 바닥난 데다, 더 엄중한 것은 먹을 쌀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 동안 믿고 기대왔던 소련이 붕괴되어 사회주의는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 보였고 중국을 통해 남한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급기야는 북한의 최고위 관료였던 황장엽 비서마저 김정일 을 등지고 남한으로 넘어가자 북한이 저절로 붕괴하고 말 거란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럴 때 북한에서는 무덤 속의 해골을 파내어 특별총살형에 처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부관참시(����)란 말은 들었으되 실제로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이런 엽기적인 일이 벌어진 것은 불만에 가득 찬 사회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꺼내져 마른 뼈에 총살형을 당한 자는 김만금이라는 사람이다.

김만금은 일제때 남한의 수원고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의 농업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김일성 의 측근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북한의 토지개혁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김일성 은 농업부문 현지지도를 다닐 때마다 김만금을 데리고 다녔으며 그를 농업사령관이라 부르며 높이 칭찬하였다.

김만금이 농업위원회장으로 일하던 무렵에는 북한에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만금은 농업에 관해 남이 따를 수 없을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인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어느 나라의 초청을 받아 그 나라의 농업생산을 높이고 돌아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70년대 초에 여성동맹 위원장이었던 김성애 는 전국적으로 누에치기 운동을 벌였다. 김만금은 누에치기 사업에 과학기술을 접목시킴으로 김성애 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만금은 대규모 누에치기 연구 집단을 만들어 누에가 뽕잎을 먹는 대신 피마자 잎을 먹고도 자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피마자를 먹여 키우는 누에치기는 짧은 시간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농촌은 물론 도시까지도 대대적인 누에치기가 벌어지고 덩달아 외화벌이도 잘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김일성 은 북한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누에치기의 성공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은 김성애였다. 김성애 가 이끄는 여성동맹은 그 위세가 나날이 높아져 거의 당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김정일 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는 김일성 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김성애 의 아들인 김평일과 경쟁을 벌이던 터라 김성애 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김정일 에게는 불리한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김정일 은 김성애 는 물론 김성애 의 누에치기를 성공으로 이끌어 준 김만금에게도 원한을 품었다. 1974년 권력자가 된 김정일 은 계모인 김성애 의 식구들을 곁가지 치기란 이름으로 내치기 시작했다. 그때 김만금과 그 가족들도 곁가지의 측근이라 하여 내쳐 갈겼다.

김정일 은 김만금을 농업위원장 자리에서 쫓아내고 그 자녀들까지 가만두지 않았다. 김일성대학 철학부를 졸업하고 평양건설건재대학 철학 교수를 하던 맏딸 김정희 는 대학에서 쫓겨나 꽃집에서 종이꽃을 만드는 처지가 되었다. 또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아들도 경찰청에서 일반사무를 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20년이나 지나 1990년대가 되어 김정일 은 이미 죽어 무덤에 묻힌 김만금의 시체를 파내어 특별총살형을 시켰다. 유례없는 식량난으로 북한 내부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사람들의 심장을 뒤집어 놓을 만큼 충격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식량부족의 책임을 물어 수십 년 간 농업사령관을 지낸 김만금과 그 당시 중앙당 농업비서였던 서관희 를 반당 반혁명 민족반역자라고 몰아붙였다. 그래서 서관희 와 이미 죽은 김만금을 총살형에 처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책을 그 두 사람에게 전가하고 북한사람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데 이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극심한 식량난은 누구 한 사람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북한 경제가 그토록 곤두박질친 것은 유럽의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 사이에는 달러가 없이 서로 간에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시장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자 그 시장도 자연히 없어졌고, 달러가 없는 북한은 외국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사올 수가 없어 생필품이 바닥이 나 버렸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북한에서는 농민이 농사를 전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의 농민은 모두 ‘지도농민’이다. 북한에서는 모내기철이나 추수철이 되면 큰 전투가 벌어진다. 노동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학생이며 군인,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 농촌에 불려나가 지도농민의 지도를 받으며 농사를 짓는다.

지도농민은 식량 생산량에 관계없이 1인당 6백 그램의 식량을 배급 받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농사를 잘 지어 생산량을 높일 의욕은 없고 모내기 전투며 추수 전투를 하루바삐 끝내 버리고 싶기만 하다. 내 논 같이 애지중지 하는 마음이 없으니 농사가 잘 될 리 있겠는가.

게다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 은 김일성 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막대한 외화를 낭비하며 웅장한 김일성 미이라 보존기념관을 지었다. 차라리 그 달러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들에게 식량을 사서 먹였더라면 수십만명이 굶어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이 맞물려 1990년대 북한의 경제는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오죽하면 삼백 만 명이 굶어 죽고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20세기의 문명세계에서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현식(전 김형직 사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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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영길 2008-08-20 12:28:20
    천하의 살인 강도 만대역적 김정일 은 갈기~찢저 죽여서 부관참사 하고 기쁨조를 괴롭흰 그놈의 음낭은 꾸어서 개를주어야 한다,천하의 악독한 악인 김정일 을 먼저 찢저 죽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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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착한거미 2008-08-28 19:00:27
    선생님 선생님 쓰신 글에는 정말 거짓이 없는 사실이네요 하지만 선생님 원정화 비릇한 간첩들이 싸다니는 이때에 신변에 각별히 조심하셔야 겠네요 ... 심장에 묻기에는 너무나 힘든 우리 북한 시절이였지요 땅속에 대고 (아~~~~~) 하고 가슴을 터트려 맺힌 피멍을 토하고 싶었는데 ...이글을 보니 가슴이 쓸쓸합니다 지나온 세월의 바보 같은 생활이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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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무 2008-08-30 23:44:47
    지금 보니 그때 생각이 떠오르네요.
    한점의 거짓없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일입니다.
    백성들을 속이는 썪은 정치에 눈먼세상을 살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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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2008-09-18 14:26:12
    북한사람이라면 그때일을 다 알지요. 김정일의 정치를 세상에서 다알고 잇는데 그태여 더 말은 안하고 싶네요. 치가 나서 글도 제대로 못쓰겟네요. ㅠㅠㅠ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불쌍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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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조 2008-09-18 14:40:40
    아직도 관심없고 모르는 사람들 많아요. 태평세월에 살다보니....
    갈쳐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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