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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의 생이별 (상) - 김원형
동지회 14 3972 2004-11-18 00:03:34
피난길에서의 일가 이산

북조선은 봉건적인 신분 국가이다. 지난날에 지주였거나 한국전쟁때 가족 중 남쪽으로 간 사람이 있는 집안은 북조선에서는 도저히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도록 돼 있다. 그런 사람들은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10세가 채 되기도 전에 양친과 생이별한 후로 적대계층 인간이라고 해서 줄곧 차별을 당해야 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전쟁중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에게는 따뜻한 보살핌이 있는 법인데, 북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그 부모가 지주였다는 이유로 아무런 죄가 없는 고아에게 벌이 줄곧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쌍둥이 아우와 헤어진 것은 폭격의 와중에서였다.

아버지는 전쟁전에 이미 남하하고 집에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내형과 나 그리고 쌍둥이 아우를 데리고 고향 순안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폭격을 당하게 됐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손을 잡고 어떻게 해서든지 남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포와 혼란 속에서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폭격이 끝나자 나는 어머니와 형제를 찾아 헤맸는데 터널 안에서 우연히 형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다른 가족은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이럴 때 아이들은 살던 집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형과 나는 순안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쌍둥이 아우만을 데리고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향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양친과 아우의 소식을 모른 채 딴 인생 길을 걷게 됐다.

꿈같은 만남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나는 부모형제가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설사 살아 있다고 해도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다 죽은 것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랬던 게 이별한지 40년만에 기적적으로 이산가족을 찾게 된 것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미국에 살던 이모의 고향방문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모에게 고향에 가면 꼭 나를 찾도록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의 어머니와 쌍둥이 아우가 미국에 살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듬해(1990년) 6월에 어머니와 아우는 고향방문단에 끼어 나를 찾아 왔다. 뉴욕을 떠나 북경경유로 신의주에 온 어머니와 아우의 손을 잡고 나는 한없이 울었다. 그때 어머니는 일흔이 넘는 나이였다. 그런 분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아들을 찾아 온 것이다. 대개 이럴 때 사람들은 온갖 사연을 털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북조선에서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복수의 감시자가 해외교포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40년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만남도 손을 붙잡고 울기만 할 뿐 이렇다 할 감정표현은 하지 못했다.

한밤중이 돼서 감시자들이 돌아간 다음에야 우리는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감시자들이 옆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는 계속 피곤하다는 말만을 했는데, 그들이 돌아가자 『그 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았느냐?』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저는 괜찮았지만 어머님은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남쪽으로 내려간 어머니와 아우는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길을 떠났고, 지금은 뉴욕에서 자리잡고 지낸다. 그 동안에 겪은 고생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어머니는 똑 같은 고생이지만 내가 겪은 고생은 훨씬 지독했으리라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간 것을 보면 남한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이겠지?』

『형님, 한때 남한도 살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발전했답니다. 자가용 승용차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이니까요. 생활수준도 미국을 따라 잡을 만큼 높아졌어요.』

아우는 나지막한 말소리로 남한의 발전상, 사회주의권의 붕괴 등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가까스로 억제하면서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아우의 얘기를 듣고 나자 내 마음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내가 탈출을 처음 생각한 것은 1976년이었다. 그 때 나는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환경은 이만저만 열악한 게 아니었다.

김정일의 등장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수는 해마다 증가해 1976년에는 절정에 달해 약 2만 명이 일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대부분은 나처럼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실상의 추방이었다. 소련의 스탈린이 「계급적 원수」를 시베리아로 추방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김정일도 「계급적 원수」를 시베리아로 추방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경우에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스탈린은 「계급적 원수」의 시베리아 추방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지만, 김정일은 그 일을 이용해 소련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얻어내려고 했다.

이처럼 이른바 적대계층 출신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게 된 것은 김정일이 정치에 간여하게 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때까지는 차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징벌이나 다름이 없는 차별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내 경우만 해도 인민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또 복무기간중 출신성분 때문에 박해를 당한 경험도 없다.

그랬던 게 김정일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게 바뀌게 됐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도 나는 혹한지역으로 쫓겨갔을 뿐 아니라, 연일 추위에 떨면서 지정된 분량의 나무를 벌채해야 했다. 손발이 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머리카락에도 고드름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그런 추위 속에서 나는 감각이 없어진 손을 쉴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벌레만도 못한 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주위에는 감시하는 눈이 번득이고 있어서 노동자들은 말도 제대로 못한 채 기진맥진할 때까지 나무를 벌채하기만 했다. 커다란 나무가 서서히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라리 저 나무에 깔려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 김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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