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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완성하지 못한 원고 - 장해성
동지회 21 6173 2004-11-18 00:10:44
나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63년 북한으로 단신 이주한 후 김일성 대학교 철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중앙방송 정치교양국 기자작가로 20여년간 생활하다가 96년 탈북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얼마전 어느 잡지사로부터 귀순 후 한국생활중 겪었던 것 중에 제일 힘들었던 것에 관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별로 어려운 일 같지 않아 즉석에서 흔쾌히 응낙 하고 귀가후 책상에 마주 앉아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제일 힘들었던 일이 무었이었을까?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래 맞다. 생각하지 말자, 잊어 버리자 해도 시도때도 없이 파고들어 가슴 저미는 것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생각, 가족을 저 버린 아픔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우산도 쓰지 않고 인적 끊긴 아파트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하지만 그건 이미 각오하고 떠나 온 길이 아닌가? 가족생각 외에 또 무슨 외로움? 어차피 홀로 떠날 때 외로울 줄 몰랐더냐? 그렇다면 나한테 제일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던가? 영어를 몰라 간판을 보고도 몇 번씩 스쳐 지나갔던 일? 하지만 그것도 몇 번 오락가락 하긴 했지만 어쨌든 물어서라도 찾지 않았던가?

밥 짓는 것도, 빨래하는 것도 여기서는 기계가 다한다. 설사 내 손으로 하면 어떻단 말인가? 문득 한국에 오기전 홍콩 이민수용소에 갇혀있던 일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과학연구 부문에 종사하던 북한 사람과 같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귀동냥으로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우리는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게 된 것에 대해 큰 시름을 놓으면서도 새로운 걱정거리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짐지고 다니는 데 자신이 있었다. 북한에서의 기자생활은 동냥취재 20년세월이었다. 입쌀, 찹쌀, 콩, 옥수수... 필요한 건 모조리 취재 길에서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근거리는 취재차량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운전자와 전리품을 나눠야 했다. 그래서 제일 선호한 것이 등짐이었다. 명색이 기잔데 창피스럽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이마에 기자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창피가 웬 사치인가? 무거운 걸 등에지고 이십리, 삼십리, 때로는 오륙십리도 히쭉 웃으며 갈 수 있었다.

내가 한국생활 첫 시작의 묘안을 찾고 쾌재를 부르자 친구도 덩달아 손뼉을 쳤다. 친구는 용접기술 7급으로 산소용접, 전기용접은 물론 0.5mm 철판까지 다 붙였다는 것이었다. 명색이 과학자지만 자기가 연구한 건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북한이고 보니 용접은 물론 선반, 쎄바, 프레스 등을 스스로 작동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나는 장마당에서 등짐으로 그 친구는 공사판에서 용접공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하자고 다짐하면서 모처럼만에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잠자리는 당분간 역전 같은 곳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후 우리가 꾼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알 게 되었을 때에는 정말 웃음에 앞서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나라에서 집과 일자리를 주고 정착금까지 준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무엇을 한게 있다구?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도록 벽돌 한 장, 모래 한삽 보태지 않는 내가 아닌가? 오히려 방송을 통해 거리낌없이 험담을 퍼 붓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은 그런 나를 단 한가지 이유, 한 동포라는 것만으로 한 혈육이라는 것만으로 그토록 뜨겁게 맞아주고 대해 준 것이다.

그러면 나의 한국생활 체험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물론 서울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웃지 못할 실수담도 많았다. 그러나 그 자질구레한 것들이 실로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조국의 동포애와 사랑에 비하겠는가. 나는 끝내 펜을 놓고 말았다.

1999년 11월 장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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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az99 이민복 ol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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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이랑 2006-07-22 00:23:10
    방송에서 자주 뵈어온 장해성 선생님은 역시 글에서도 인품이 베어 나오시네요 장해성 선생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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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ip1 2014-05-21 20:29:55
    70년대 중학시절 밥 먹을 때마다 기다려지던 천복이와 만복이 저자가
    결국 망명하여 함께 있게 되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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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러운 세상 ip2 2015-04-07 01:15:12
    장해성이라는 그분 우리민족끼리에서 글로 나왔는데 이사람 조선중앙텔레비죤 방송국에서 일했을때 굉장히 못된짓을 많이했다는군요? 근무시간에 포커나 하고 틈만나면 게으름부리고 그분말로는 자신은 천복이와 만길이라는 저서를 썼다고하는데 이거 우리민족끼리에서 그사실은 거짓이라고 해야 맞지않을까요? 차라리 이사람에 대해 동영상으로 방영해서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근무중인 작가들과 기자들 방송원들에게 수치스러움을 보여줘야 하는것이 나을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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