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면서도 따뜻한 도시, 서울 - 윤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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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한땅을 탈출하여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맴돌기를 여러차례 하던 끝에 마침내 1995년 9월 따뜻한 남쪽 땅을 밟는데 성공하였다. 처음 서울에 도착해서 놀란 것은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북한과는 달리 매우 풍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농수산물 시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곳의 수산물 코너에는 이름도 모르는 수백가지의 물고기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가 마치 용궁에 들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다. 친구 한명이 점심을 먹자고 해서 따라나섰는데 "곰탕을 먹겠느냐"고 물어 보길래 여기는 정말 먹을 걱정이 없는 곳이구나! 얼마나 곰고기가 많으면 음식점에서도 곰고기탕을 해주겠는가하고 생각하며 그 친구에게 "곰고기가 비싸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배를 잡고 한참 웃더니 "곰탕은 곰고기탕이 아니라 소꼬리 뼈를 푹 고아 끓여 만든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곰탕이 무언지 알게 되었고 나도 따라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이 일이 일고 난 다음부터 상당기간 동안 식당에 가면 메뉴를 보지 않고 김치찌개, 된장찌개 같은 간단한 음식만 주문했다. 왜냐하면 가는 식당마다 음식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무엇을 시켜 먹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르는 음식을 시켜 생기는 실수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식당뿐만아니라 일반가정에서도 북한에서 보다 더 작은 밥공기를 사용한다. 처음 조그마한 밥공기를 보고 북한에서 듣던대로 얼마나 쌀이 귀하면 발사발이 이렇게 작을까, 유치원생이 먹는 밥사발보다 작으니 어른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 조그마한 공기밥을 먹고 북한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가 무려 10Kg이나 더 불어나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밥사발은 비록 작지만 반찬이 충분하고 때로는 간식도 먹을 뿐만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 문제가 걱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진짜 무릉도원인 셈이다. 나는 자동차 정비사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학급동료 한명이 "대전에 구경가겠느냐"고 해서 "그러자"고 대답을 했지만 막상 떠나자니 귀순자인데 괜찮을까하고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길을 떠나 보면서 정말 놀랐다. 난생 처음 달리는 고속도로는 가도가도 형형색색의 승용차 행렬뿐이었으며 북한에서는 반드시 있는 통행증 검열 초소 따위는 찾아 볼수 없었다. 나는 북한에서 운전수로 20여년을 일했는데 그 곳은 자동차를 한번 운행하려면 10여가지의 증명서류를 구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러한 증명서류가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서울의 생활은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 사회의 생활습관에 젖어 있던 나는 자유시장경제 생활이란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면서 심한 이질감을 느꼈다.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는 화려한 불빛의 레스토랑과 불야성을 이룬 서울의 밤거리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현실이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했다. 너무나 생소한 환경들이 나를 울리기도 했고 타락하게도 했다. 어떤때는 나의 운명이 가련하고 처량하게만 느껴져 소주 2병 정도를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위분들의 꾸준한 보살핌으로 나는 이러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동대문시장 피혁제품회사에서 새벽 2-3시까지 일을 했다. 점심이나 저녁식사 시간이 따로 없이 밤낮으로 막노동을 할 때도 있었다. 자격증이 있어야 취업하기 쉽다고 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취업훈련을 받고서 결국은 2개의 기술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 시설관리공단에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다. 직장동료들과 상사분들은 나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업무를 선택하게 해 주었고 나의 아픔을 깊이 있게 이해하여 주었다. 이런 좋은 환경은 내가 새로운 길을 터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동안 힘들게 걸어온 인생을 잠시나마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이제 북한을 떠나 서울에 와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년의 세월은 내게 있어서 참으로 소중하고 귀중한 나날이었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터전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때로는 낯선 생활들이 견디기 힘든 때도 있었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희생물이었던 나에게 사람답게 살 것을 일깨워 주었고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준 천만이상의 사람이 살고 있는 대도시 서울은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도시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는 북한에서 힘들게 살았던 그 때를 생각해서라도 더 노력하고 수양해서 진실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살아 갈 것을 다짐해 본다 2000년 2월 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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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빠트에 살았었는데...
차가 고장나면 기술이 좋아 와서 지도말도 했는데...
갑작이 자살이라고 해서 태능병원에 가보니...
그래도 허광일씨가 묘주로 수고하고 있더군요.
정말 아까운 친구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