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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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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이질감 극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 - 김순영
동지회 16 4994 2004-11-18 00:16:24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내가 남한 땅을 밟은 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사회에 적응하느라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영화 같은 장면이 있다. 목숨을 걸고 경계가 살벌한 압록강을 건너던 일, 탈북 이후 숨막히던 도피생활, 그리고 남한으로 오기 전날 우리 다섯 식구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던 일 등은 아마 내 머리 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정말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장면들을 뒤로 하고 새로운 마음가짐과 각오를 가지고 자유의 땅을 찾아온 우리 가족은 정부의 따뜻한 보살핌과 정착교육에 힘입어 5개월만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그 순간의 감격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아마도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처음 남한 사회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생소하고 혼란스러워 무엇을 해야 할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송 일을 하는 언니 뒤를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다니는 언니의 모습과 주변 사람들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모습, 이미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점차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나섰다. 때마침 언니와 함께 방송국을 드나들던 나는 북한 관련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북한과 다른 모습들을 찾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이 일은 정말로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일주일에 3-4일 정도 방송국에 드나들면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낯선 체제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방송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선 방송국을 드나들면서 이상한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한 연예인들과 마주칠 때마다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다. 또한 스트레스, 엘리트, 샐러리맨, 카리스마 등의 수많은 외래어들은 방송을 할 때마다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외래어와 한자어를 지나치게 남용하고 있다고 투덜거리며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있던 중 방송원고를 훑어보니 감투란 단어가 눈에 띄었다.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나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있게 아나운서에게 그 뜻을 설명해 주면서 대화를 진행해 나갔다. 그런데 한참을 이야기하던 우리는 결국 녹음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설명한 감투(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일)의 의미는 여기서 쓰이는 감투(직함의 다른 말, 벼슬을 하는 일)의 의미와는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실수를 통해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점차 남한 사회의 분위기가 몸에 배기 시작하였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자연스러워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배워가고 있던 나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진정 나의 마음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나는 작년 4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결혼정보회사 (주)선우에서 개최한 에 용기를 내어 참가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지금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친절한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탈북자들과도 만나 서로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북에서 약혼하고 남에서 결혼하다의 주인공인 정용 오빠와 은실 언니의 결혼식이 성대히 치루어졌다. 나는 하객들 속에서 작년에 을 주선했던 (주)선우 이웅진 대표님을 만날 수 있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이 대표님은 내게 밝게 사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귀순해온 이들이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을 직접 해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어오셨고, 나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 이유는 을 통해 탈북자들이 결혼문제에 직면하면 첩첩산중에 홀로 갇혀 있는 심정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의 이야기가 미혼인 나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에는 그 당면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일은 당사자인 우리 탈북자들의 몫이라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년 동안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해왔던 방송 일을 모두 접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심은 아니었지만 나는 대담하게 방송 일에서 손을 떼고 커플매니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젊은 남녀들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남한에서는 남녀가 만나서 연애를 하면 거의 결혼에 이르곤 하는 북한과 달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마치 일상화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개방적인 데이트 문화 속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꿈꾸어 오던 이상형을 찾으려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부럽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아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커플매니저이기에 그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알고 있어야 했다. 회사에 들어와서도 역시 낯선 외래어나 한자어들은 나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송 일을 하면서 생소한 용어들을 열심히 습득해 왔다고 생각했으나 친권, 양육권, 호적, 미팅, 매칭, 이벤트 등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용어들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이러한 말들을 들을 때마다 진땀을 빼곤 하였다.

한번은 주소지가 목포인 사람이 회원 가입 신청을 하길래 "목포가 어느 도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보니 한국 지리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둘러댔으나 그 회원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지금도 그 회원이 나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외에도 입사년도에 따라 지켜지는 직장 내의 위계질서, 식사비를 자신의 몫만큼 나누어서 내는 방식 등은 북한에서 살아왔던 내 눈에는 이상하게 비쳐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돌이켜보면 남한에서의 2년이라는 시간은 이러한 남과 북의 문화적 이질감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헤쳐 나가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기간동안 나는 혼란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남한 사람과 문화에 성큼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누가 곁에서 거들어 주길 바라거나 위로해 주길 원하고서는 10년 아니라 평생을 살아도 적응할 수 없음을 나는 배우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물안 개구리 같이 살아온 나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부모님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사회인으로 이끌어 주신 (주)선우의 이 대표님과 마음 따뜻한 동료직원께 감사드리면서 장차 통일이 되면 남북 젊은이들이 마음의 벽을 깨뜨리고 허물없는 만남을 통해 결혼에 이르게 하는데 선봉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북한 땅에 남아있는 친지들과 친구들을 만나는 그 날, 한발 먼저 남한 사회를 경험한 선험자로서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2000년 7월 김 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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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남 ip1 2013-04-23 05:03:51
    내가찾는 순영이 맞는지 나 심양에 서탑시장에서 만나것이 처음인데 옳으면 나 영남 오빠!
    연락바람:다음메일아이디는 pi888 이고 카페주소는:http://cafe.daum.net/sanghuang
    여기에 나희 사진을 몇장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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