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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선물금 생산 - 김종화
동지회 17 4953 2004-11-19 20:53:53
내가 북에 있을 때 인민군대에 입대한 것은 북한이 가장 어렵기 시작했던 1994년도였다. 그런데 군사복무를 쉽게 하려고 후방에 떨어진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내가 배치된 부대는 외화벌이를 전문으로 하는 25국 산하 직속여단이었다.

군인인 우리는 졸지에 광부가 되었다.

처음에 부대에 배치되어 시작한 일이 훈련도 무엇도 아닌 광산에서 금을 캐는 일이었다. 원래는 군대가 노력을 대주는 대가로 광산에서 얼마간의 금을 받아 김정일에게 충성의 금을 바쳤는데 김정일이 부대를 통채로 광산에 편입시켜 생산된 금 전량을 인민군대의 현대적 무장장비 구입과 군인들의 생활개선에 이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졸지에 금광산 광부가 된 것이다.

원래 이 광산은 일제시기에 개발되어 질이 높은 광석은 전부 캐먹고 전쟁 이후 새로 탐사하여 광구를 넓혔으나 품질 높은 광석은 없고 품질이 낮은 광석이 절대 다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산실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70년대 이전까지는 그래도 광산이 제대로 돌아가 1968년에 있었던 전국 청년 총동원대회 때에는 1년에 최고 7톤의 금까지 생산하여 기적을 창조한 일도 있다.

그러나 1970년 김정일이 직접 조직 지휘하였다는 70일 전투 이후 생산은 급격히 격감되어 지금은 주 생산품이던 금, 은, 동마저 버리고 금과 아연 생산으로 품종개량까지 하고 말았다. 원인은 은과 동의 매장량이 급격히 줄기 시작하자 대신 종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연, 아연 생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이나 연, 아연생산량도 좀처럼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정일은 광산은 물론 군 전체를 인민무력성 25국 산하에 넘기게 되었다. 말하자면 군대가 직접 광산을 맡아 본때 있게 금 생산을 높여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그렇게 믿는 군대라 하여 과연 정말로 금 생산을 높일 수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생산이 더 높아지기는 고사하고 종전보다도 여지 없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원래 평안남도 이 광산 암질은 규암이기 때문에 그 먼지가 한번 폐에 들어가면 좀처럼 박혀서 배설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 몇 년씩 일한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모두가 규폐증을 앓게되고 마침내는 죽게된다. 그러기 때문에 착암도 습식으로만 하였지 절대로 건식으로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데도 몇 년만 그 갱내에 들어가 일을 하면 어김없이 규폐증에 걸려 할 수 없이 제명되게 되었다.

죽음, 또 죽음

그러던 것을 그 무지막지한 군대가 맡아 하면서부터 그런 것을 가리는가. 실로 "장군님"의 전사답게 건식, 습식을 가리기는 고사하고 전기가 오지 않으면 수(手)굴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수굴로 하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수굴로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기가 오지 않기 때문에 하는 일인데 그렇다면 배풍(통풍)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유리알같이 예리한 규암 먼지는 그대로 일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폐에 들어가 쌓였다.

우리가 광산에 투입되어 일 년 만에 폐 검진을 하였는데 전체 투입된 군인들 중 60%가 규폐증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장군님을 위하는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라는데 죽은들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여단에서도 이 엄청난 현실에 기가 막혀 말도 못한 채 쉬쉬하면서 그 잘난 이소니찌드(결핵약)를 얼마간을 구해서 내려보내 주는 것으로 외면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안전모조차 없어 군모를 그대로 쓰고 갱에 들어가고 깐드레(후레쉬)조차 공급하지 못해 석유등을 들고 갱에 들어갔다.

그러니 안전 상태라는 거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등이 꺼져 캄캄한 갱을 더듬어 나오다 보면 수 십미터 수직 갱에 떨어져 죽고 안전모를 쓰지 못해 새알만한 낙반에 맞아도 머리가 터져 죽었다. 죽음 또 죽음이었다. 이렇게 되자 군관들은 물론 하사관들조차 애초에 갱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빈둥거리며 놀거나 술을 먹고 사고치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지휘관들의 눈이 무서워 갱에 들어간 병사들이라고 무슨 성수가 나서 금을 캐겠는가. 할 수 없어 갱에 들어가기는 해도 놀기는 매한 가지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위에서는 계속 금생산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독촉이 불같았다. 하긴 그도 그럴만 하다.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이 광산이 군부대에 넘어가기 전까지만 하여도 그래도 연간 금 생산량이 못해도 톤이 넘었는데 그 위대하다는 지도자의 현명한 영도에 도 5-6백Kg도 못 생산하게 되었으니 왜 안 그러랴.

우리들은 제대될 날만을 기다렸다.

업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다. 어느 해인가 인민무력부 25국장이라는 사람이 내려왔다. 우리 부대가 광산에 투입된 이래 처음이었다. 그런데 병사들이 사는 조건이라든가 일하는 조건 같은 것은 볼 생각을 하지 않고 뚱단지같이 외화금 생산을 중단하고 이듬해 2월16일까지 선물금을 생산하라는 명령을 떨구었다.

하긴 병사들의 사는 조건이라든가 일하는 조건 같은 것은 알아 봤다고 해도 그로서는 어쩔 방법이 없으니까 애초에 그런 것은 볼 생각을 안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때문에 외화를 벌어 인민군대 무장장비나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금 생산은 중단되고 그 위대하다는 지도자에게 올릴 금 생산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병사들에게는 그 전투라는 말이 너무 자주 듣는 말이다 보니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국장이라는 사람이 내려와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와대도(닦달을 해도) 병사들은 떠들려면 실컷 떠들어라 며 듣는 척도 안했다. 국장또한 형식적으로만 그럴뿐 전투명령을 어떻게 하면 그 기간에 더 많은 금돌을 훔쳐내 자기 배를 불릴까 생각 했다. 금돌이면 곧 돈이고 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민군대 병사 여름 모자에 금돌을 하나 채우면 보통 금이 0.5-1그램이 나온다. 금 함유량이 많은 금돌은 심지어 7-8그램까지 나온다. 그때 금 1그램은 북한 돈으로 1000-1500원 정도 했는데 그 정도면 괜찮은 수입이었다. 술은 물론이고 고기 안주까지 하여 며칠간 실컷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 금을 무엇 때문에 모두 위에 바친단 말인가. 하여 군인들은 자기들의 노력만으로는 금돌을 많이 얻을 수 없으니까 요소 요소 숨었다가 금돌을 캐 가지고 나오는 노동자들을 습격하여 빼앗는 일도 서슴치 않고 감행하였다.

당연히 빼앗으려는 사람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과의 피투성이의 싸움이 거의 매일과 같이 일어났다. 이런 현상을 막기위해 부대 보위부에서는 갱내에 순찰을 조직했지만 그 넓은 공간의 어둡고 습기 찬 좁은 굴에서 행해지는 범죄를 막지는 못했다.

선물 금 생산을 시작하였는데도 전기가 안 들어오니 케지(엘리베이터)가 못 다녀 군인들이 퇴근할 때마다 금돌을 배낭에 지고 나왔다. 120m 수직갱을 금돌을 지고 사다리를 올라와야 하는게 문제였다. 수직갱들은 워낙 낙수가 심한데다가 사다리가 없는 구간도 많아 사고가 수도 없이 일어났다. 하는 수 없이 전기가 온 다음 퇴근하도록 하였는데 원래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시간은 6시이지만 전기부족으로 승강기가 다니지 않으니 밤 10시나 되어야 잠자리로 돌아 왔다. 이렇게 되면 하루종일 갱 안에서 일 한사람은 쉴 시간도 없이 몇 시간 보내다가 또 다음날 아침 갱으로 들어갔다.

전기만 부족한게 아니였다. 군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배낭도 일주일을 못 가 걸레처럼 되었다. 그래도 천이 없어 새로 공급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는 무력부에까지 보고되었지만 결국에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전기 오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금 돌 생산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하게 됐는데 한사람은 정대를 대고 다른 사람이 망치로 때려 구멍을 뚫는다.

거기에 폭약을 넣어 발파를 하는데 선물 금 생산에 들어 간 후 잔주만 250개를 날려 버렸다. 잔주는 일제시기 품질 좋은 광석만을 채취하고 천반 유지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인데 급한 생산과제가 제기 될 때마다 하나 건너씩 발파해 먹으니 일부 갱도는 천반이 내려앉아 아예 폐갱 된 것도 많았다.추도곡은 매일 울리고 군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 술만 먹고 나쁜 짓만 일삼았다. 그래도 위에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고 군인들은 제대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금 생산을 확대하여 전군을 현대화하고 군인들의 물질 문화 생활을 높이겠다는 김정일의 위대한 영도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2003년 김종화 탈북자동지회 회보 "탈북자들" 2003년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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