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꿈꾸는 새끼 독수리의 날개짓 - 강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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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꿈꾸는 새끼 독수리의 날개짓 자유를 향한 첫걸음 자유 이주민! 이름 그대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 품에 안긴 사람을 뜻하는 말로 우리가 흔히 탈북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나 역시 자유를 찾아 북녁땅을 등지고 머나먼 여정을 거쳐 이곳 대한민국까지 찾아 온 자유이주민이다. 자유가 목숨보다 소중하였기에 사선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유의 땅이라고 해서 자유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있어 대한민국은 너무나 벅찬 대상이었다. 체제와 이념을 떠나 우선은 살아가는 방식과 환경이 다르다보니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외모를 하고는 있어도 좀처럼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스로 주눅이 들다보니 다른 사람이 조금만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쉽게 상처받기 일쑤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나보다 나중에 입국한 부모님이 탈북자 사회적응 교육시설인「하나원」을 나오시던 날, 기다렸다가 함께 담당형사님 승용차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서울로 오는 도중에 부모님이 멀미가 나서 길가에 차를 세우게 되자, 담당형사님이 “아니, 벌써부터 멀미가 나요? 이북에서는 차도 못 타봤어요?” 하고 말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서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열망했던 자유의 땅이었지만 이곳이라 해서 자유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 굳게 먹고 하나하나 어려움과 씨름하다보면 어떻게든 수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미리 각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눈을 가린 채 산속을 헤매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 사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일일이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내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 하루 지내기에 급급해 하던 어느 날, 진정한 나의 꿈이 과연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격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학에 들어가자. 그래서 진정한 자유를 누려보자.” 늘푸른 학교에서 꿈을 키우며 대학 생활을 위해서는 한국의 학교생활이 어떠한 것인지 조금이라도 미리 배우고 들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주변분들에게 도움말을 듣고 난 뒤 서울 수유리에 위치한「늘푸른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늘푸른학교」는 평소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던 대학 교수님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일종의 대안학교로서 탈북자들이 정규학교로 편입하기 전 남북간의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원봉사 선생님들로부터 여러가지 공부를 배울 수 있도록 한 교육시설이었다. 처음에는 생활이 자유롭지 못해 답답하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방문객들 때문에 귀찮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하면서 앞날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었고,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6개월간의 학교생활동안 오로지 열의 하나로 봉사하시는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어 지금껏 친분을 유지하며 도움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정든 학교가 얼마 전 여러가지 어려움 끝에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여간 아쉽지 않다. 비록 짧은기간이었지만 그곳에서 겪은 시간들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새끼 독수리로 거듭나다 「늘푸른학교」를 마친 후에는 줄곧 대학입시 준비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워낙 기초가 부족했던 탓에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험 역시 요령이라고 생각하여 전문입시학원을 찾아 다니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들어오던 수업내용이 자꾸 복습하다보니 어느새 또렷이 머리속에 그려지게 되었고, 어느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사람 욕심이란 것이 끝이 없다던가? 예전에는 한국 땅만 밟아도 좋겠다는 것이 이제는 대학생이, 그것도 기왕이면 남들 알아주는 명문대생이 되어야겠다는 당찬 욕심이 생겼다. 마침내 대학입시를 치렀고 허황된 욕심이 아니었는지 꿈에 그리던 연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연세대학에 들어가려면 과외비만도 엄청나다는 말을 들었는데, 비록 특례입학이기는 했지만 나 자신이 얼마나 대견스러웠는지 모른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독수리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새끼 독수리가 되어 날개짓이라도 하듯 괜히 몸이 가벼워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의 감격은 지금껏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었다고 우쭐거리면서 지내는 것도 잠시, 본격적인 학교생활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대학강의라는 것이 원래 정상적인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내게는 마치 어려운 용어만 되풀이하는 철학강의로 들렸다. “내가 뭐하러 지금 여기 앉아 있는지, 저 선생님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강의내용의 대부분이 북에서는 배워 보지 못한 한자와 영어 투성이여서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려 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멍하니 칠판만 쳐다보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왔다. 시험때가 되면 무턱대고 책만 외우다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곤 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서 준비하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친구들과의 교류가 너무 부족했던 것 같았다. 공연히 스스로 탈북자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인데도 선뜻 다가서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용기를 내었다. 어색함에 머뭇거린 적도 있었지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일부러 친한 척도 하면서 친구를 사귀어 나갔다. “혹시나 내가 탈북자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었다. 오히려 나 스스로 탈북자란 사실을 잊고 지낼 만큼 서로 너무 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후로는 학교수업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고, 강의필기나 시험준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주변사람들도 자연히 나를 이해해 주고 도와준다는 귀중한 교훈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 프로그램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는 친구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학교측의 적극적인 관심도 큰 힘이 되었다. 먼저 지도교수님이 나를 포함한 몇명의 탈북학생들을 불러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없는지 상담해 주었다. 처음에는 어렵게만 느껴졌지만 교수님의 따듯한 배려에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수강신청을 할 때도 교수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면 “이 과목은 지금 듣기에 어려울 거야. 다음 학기에 듣도록 하렴.” 하고 자세히 안내해 주시곤 했다. 도움을 주신 것은 비단 지도교수님 뿐만이 아니었다. 「중국문화탐방」이란 교양과목을 수강할 때의 일이다. 첫 수업에서 내 말소리의 억양을 듣고 탈북자임을 알아 챈 교수님이 “북쪽에서 오셨구만요. 힘든 점 있으면 이야기 하시라요.”하고 먼저 농담을 건네 강의실이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무심코 컴퓨터가 없어 고생하고 있다고 말하자 교수님은 예전에 쓰다가 지금은 안쓰는 거라시며 연구실에 있던 컴퓨터를 선뜻 선물로 주셨다. 그 컴퓨터는 지금 나의 가장 친한 동무가 되어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우리 학교 학생상담소에는「하나프로그램」이라는 훌륭한 탈북학생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이는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탈북학생들을 일반학생들과 1:1 로 연결해 주어 학습을 포함한 학교생활 전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영어에 자신이 없던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영어 잘 하는 친구를 소개받아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었다. 친구에게 미안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실력도 늘어갔고, 무엇보다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 든든하였다. 다른 학교에도 나름대로 탈북학생을 도와주는 제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학교처럼 체계적으로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제도가 널리 활성화되어 우리 같은 탈북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사실 우리 탈북자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지원뿐이 아니다.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에게 살 집과 정착금을 지원해 주는 것은 큰 고마움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많은 탈북동포들이 주변의 무관심속에서 시행착오를 겪다 실패하는 경우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에 비해 나는 학교와 친구들의 따듯한 배려속에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으 니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우리 학교에는 나와 같은 탈북학생들로 이루어진「자유연세인」이란 동아리가 있다. 「자유연세인」은 처음에는 탈북학생들을 상대로 상담을 해 주시던 학생상담소 교수님의 권유로 결성된 모임이다. 서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뜻을 함께 해 서로 아껴 주고 이끌어 주자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나 역시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한국 사회에서 겪는 낯선 경험들을 서로 나누면서 마음적으로 큰 위안을 받았다. 현재 관심있는 한국학생 3~4명을 포함, 약 15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는데, 연초에는 그 이름을「통일한마당」이라고 고치고 몇몇 교수님들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정식 동아리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지난날을 떠올려 보면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 진정한 자유는 결국 내 마음속에 숨어 있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그래서 나 자신에게 떳떳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이 소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항상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야겠다. 2004. 5 강소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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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형사가 소양이 좀 부족한게 아닌가 생각 됩니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물론, 달라진 환경에서 겪을 더 많은 일들에 비하자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큰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 한 마디라고 생각 합니다.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이 담당 형사일텐데..아주 선별된 사람이지는 못할 망정..저런 헛소리나 하는 담당자라니..
마음이 무겁습니다..그리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