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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히 비서 공개처형 - 김명희
동지회 33 7617 2004-11-19 20:58:05
[북녘추억] 서관히 비서 공개처형


김명희(가명)·前집단체조창작단 단원

1997년은 평양시민들에게도 큰 시련의 해였다. 지방에서는 1995년부터 식량배급이 중단돼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하지만 평양에서는 1996년 후반부터 배급이 끊기기 시작해 1997년에 완전히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외화를 가진 일부 부유층은 사정이 달랐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이때부터 먹는 것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식량난에 전기까지 끊기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되지 않아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냉장고」로 변했다.

물이 안 나와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오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평양시민들은 특별대우를 받으므로 식량난과는 무관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평양이라고 해서 형편이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장사도 금지되고 주민통제도 지방보다 엄격해 오히려 더 큰 타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 밟듯 긴장된 나날의 연속이었으며 우리 가족도 언제 굶어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겨우 버티어 나갔다. 나는 예술부문에 종사했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배급을 아예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었다.

윗집에서는 쑥을 삶아 옥수수가루를 버무려 먹고 있었는데 그게 사람이 먹는 것인가 싶었다. 베란다에서 토끼와 닭을 키우고 심지어 돼지까지 키우는 집이 생겨났다.

먹을 것이 없어 도시 전체가 뒤숭숭해지고 그야말로 난리가 따로 없었다. 허약한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는 말이 돌더니 조금 지나서는 노인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도 굶어죽는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한다하는 유명 인사들조차 식량 구하러 배낭 메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이게 나라인가 싶었다. 이러다가 정말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97년 8월 말쯤으로 기억된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고사하고 문도 제대로 안 열리는 궤도전차에 오르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차 사우나를 무색케 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공개처형이 있으니 통일거리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통일거리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직장으로 나오지 말고 바로 현장으로 가라고 했다. 바로 현장으로 가도 된다니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평양시내 모든 직장에는 『통일거리 버스 종점인 승리3동 넓은 공터에서 미제의 고용간첩 서관히를 공개 처형하니 모두 나와 구경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당시 서관히 는 중앙당 농업담당 비서로 그 지위가 남한에 온 황장엽씨 다음다음 서열의 고위층이었다.

크고 작은 행사에서 굵직한 목소리로 연설하던 그를 모르는 북한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예전 중앙당에서 일할 때 서관히 비서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지위 높은 간부임을 느끼게 하는 풍채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처형 소식은 더욱 사람들을 자극했다.

공개처형장에 가보니 이미 사람들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직장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 포기한 채 맨 앞줄로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틀고 앉았다. 그날따라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분위기도 아주 음산했다.

조금 있으니 서관히 비서와 평남 숙천군의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을 했던 한 여성이 끌려나왔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한 미색 두루마기 형태에 단추대신 끈이 달린 죄수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서관히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이빨이 다 뽑혀 입술이 안쪽으로 오그라 붙은 데다 얼마나 말라 비틀어졌는지 뼈에 가죽만 씌운 것 같았다.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지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이윽고 평양시 재판소 소장이 나와 서관히와 숙천군 관리위원장의 죄행을 한 시간 동안 낭독했다.

『서관히는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30년 간 암약했으며 당의 농업정책을 말아먹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책동했다. 토양에 맞지 않은 종자와 농약을 사용하게 했고 과일나무 가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데도 자르게 해 과일이 열리지 않게 했다』는 등 갖가지 죄목이 열거됐다.

그때만 해도 당에 충실했던 나는 그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으면서도 저렇게 엄청난 거물 간첩을 이제서야 잡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소장은 서관히 비서에게 『할 말은 없는가』하고 물었지만 그는 눈만 껌벅이며 두리번거릴 뿐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말뚝에 서관히 비서와 여성 관리위원장을 묶어세웠다. 무릎과 가슴, 머리부분에 끈이 묶여 있었고 6명의 보안원들이 자동보총(AK소총)을 겨냥하더니 총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여성 관리위원장은 이마에 총알을 맞고 머리를 떨어뜨리며 즉사했다. 하지만 서관히 비서는 총알을 빗맞았는지 말뚝이 뽑혀 넘어졌고 말뚝에 묶인 채로 버둥거렸다.

군중들은 일제히 일어서며 『아직 안 죽었다』고 소리질렀다. 하지만 보안원(경찰)들은 버둥거리는 그를 자루에 넣어 자동차에 싣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왜 끝까지 확인사살을 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그의 목숨은 끊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서관히 비서가 총살된 후 비슷한 시기 그를 농업담당 비서로 추천했던 김만금(金萬金ㆍ 84.11 사망) 전 농업위원장도 같은 죄를 적용해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미 십수 년 전에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던 그의 시신을 파내 시체에 총질을 했다는 것이었다.

김만금은 나중에 잘못이 없음이 밝혀져 복권이 됐지만 서관히 비서는 끝내 「민족반역자」ㆍ「미제의 고용간첩」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서관히 비서의 공개처형은 평양시민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유명 여배우였던 우인희 이후 두 번째로 실시한 유명 인사 공개처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평양 시민들은 서관히 비서의 죽음을 보고 충격과 함께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의 농업정책이 그 한 사람의 비행으로 말미암아 망가졌다는 게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당시에는 정말로 그가 큰 죄를 짓고 죽음을 당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량 아사에 따른 민심수습용 희생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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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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