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遺稿) 최종회-꿈으로 보이는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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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꿈으로 보이는 7년 남광수 5. 다시 보는 두만강(2002. 4~2003. 3) 나는 2002년 1월 11일 저녁에 집에 도착하였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 한 분만이 계시는 집으로 들어설 때 나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어머니가 달려나오고, 동생들과 매부들이 나를 둘러싸고 기뻐하였다. 지옥 같은 마귀굴에서 진짜로 살아 돌아왔구나. 이제부터는 건강을 회복하자. 친척들과 형제들이 나의 몸보신을 많이 방조하여 주었다. 이렇게 아무 일이 없이 석 달 기간이 흘러가자 나의 몸은 교화소로 가기 전의 모습 그대로 원상회복 되었다. 그때의 우리 집안은 매우 힘든 상태에 있었다. 어머니는 직업을 그만두었다. 나의 여동생이 우리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매부도 함께 있었다. 내 동생이 장사를 조금 하여 얻은 수입으로 식구들이 그날그날 살아갔다. 매부는 중학교 교원을 하였는데 그때는 교원들에 대한 우대가 형편없어 생활이 많이 곤란하였다. 동생은 중고품 장사를 하였다. 거기에 나까지 와서 얹혀 살자니 동생의 작은 어깨에는 너무나도 큰짐이 지워져 있었다. 온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장마당에 나가 떨고 저녁이면 피곤하여 정신 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오빠로서 동생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고생시키는 죄스러움으로 하여 마음이 쓰리었다. 나는 몸이 회복되자 대담하게 결심하고 또 다시 도강 길에 나섰다. 처음 나는 골동품 한 점(일명: 괴물단지)을 가지고 용감하게 두만강을 건너 도보로 중국 화룡시 까지 들어갔다. 저녁 9시에 두만강을 건너 온 밤 걸어 새벽 5시까지 120리를 돌파한 것이다. 화룡시에 들어가 아는 사람들과 연계하여 골동품을 팔았다. 중국 돈 1천원을 받았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두만강 강가에까지 왔다. 다행히도 검사를 두 번 하였는데 두 번 다 걸리지 않았다. 때를 기다려 또 다시 “빨치산” 전법으로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집까지 도착하였다. 돈의 절반은 물건 임자에게 주고 나머지를 내가 가졌다. 내가 가진 돈은 한국 돈으로 3만 5천원 이었는데 5천원은 사용하고 나머지는 집 살림에 보태었다. 나의 다섯 번째 중국행은 구류장에 있을 때 알게 된 동무를 만나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한테까지 피해를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군인 출신. 나보다 나이가 많이 우인 도강선배이다. 나는 그와 함께 많은 고생을 하였다. 구류장에서 즉 고생 속에서 맺은 우정에서였는지 아니면 한 그릇의 밥을 놓고 한 덩어리 떡을 놓고 서로 권하던 사이여서 그런지 아무튼 그는 나의 좋은 형님이었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귀중한 동생이나 다름없었다. 9월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중국에서 살다가 나 왔다는 두 명의 여성을 데리고 다섯 번째 중국행에 올랐다. 그들이 이미 여러 해 전에 중국으로 건너가 시집까지 가서 아이까지 낳고 살았었는데 공안에 붙잡혀 조선으로 강제 송환된 사람들이었다. 고향이라고 돌아와도 맞아 줄 따뜻한 사람들도 없는 그들인데 어떻게 중국에 두고 온 자식과 남편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형벌이 있는 동무와 함께 나는 그 아줌마 2명을 데리고 또다시 중국행에 오를 것이다. 그들은 중국 아무데나 데려다 주면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찾아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또다시 도보행군으로 중국의 화룡시 까지 들어갔다. 그 다음은 내가 잘 아는 중국사람과 부탁하여 여자들을 데려 갈 것을 약속 받았다. 일은 예상대로 잘 되어 여자들은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중국돈 1천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한사람이 5백원씩 나누어 가진 후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돌아올 때 우리는 3일간이나 한지에서 잤다. 그것은 두만강 옆까지 와서 경비대의 경비가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풀숲에서 조선 쪽을 감시하며 3일간이나 기다렸다. 낮에는 건너지 못하므로 풀숲에 들어가 잠을 잤고 밤에 나와서 감시하였다. 경비가 어찌나 빈틈이 없는지 날쌔다고 자처하는 우리들도 건너갈 틈이 없었다. 3일이 지나고 4일째 되는 날 저녁 우리는 어두운 저녁을 타서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 벼랑으로 기어올라 집에까지 돌아왔다. 이렇게 다섯 번째 중국행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여섯 번째 중국행은 이 해 겨울에 시작되었다. 그때는 우리 일행이 모두 다섯 명이었다. 중국에 있는 친척을 찾겠다는 아주머니(40세) 한 명, 중국에서 살다가 나왔다는 그의 동생 한 명(37세: 여자) 그 외 우리 마을의 13살짜리 여자애가 속해있었다. 이 아이는 아버지는 안 계시고 4형제인데 막내였다. 위로 오빠 하나에 언니 둘, 그리고 어머니가 있었다. 집안이 너무도 가난하여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기에 그 집 어머니가 나를 찾아와 간절히 부탁하였다. 자기 집 막내딸만이라도 중국에 보내 달라고, 자기들은 돈을 받지 않겠으니 그 애만이라도 중국의 아무데나 가서 양딸로 들어가 부디 잘 살게 하여 달라고 말이다. 오죽 생활이 어려우면 자기 자식을 남의 나라에 양딸이라도 보내 달라고 할까? 그도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들과 꼭 같으련만 멀쩡한 정신으로 자기 자식을 보내려고 결심하였을 때에는 정말로 어떠했으면 그랬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실 나에게는 13살짜리 아이는 그 어디도 보낼 능력이 없었다. 자기도 살기 바쁜 세월에 누가 남의 자식을 키울 생각을 하겠는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아이를 데려가기로 하였다. 그것은 내가 데리고 가서라도 운수가 좋으면 아이가 잘 되는 것이고 안되면 데리고 도루 나오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결심한 것이다. 두만강을 건너선 우리는 처음부터 고생을 하였다. 다른 때와는 달리 조선 쪽에서부터 죽을 고생을 하였다. 국경경비대의 단속이 전례 없이 심하였기에 우리는 부득불 안전 통로인 산길로 에돌기로 결심하였다. 무산에서 출발하여 근 100리를 어렵게 돌아 도강하려는 장소에 이르니 그곳은 사람이 붙을 수 없는 절벽과 절벽의 기울기가 거의 80。인 정사각형의 골짜기였다. 며칠 동안 내려 쌓인 눈으로 하여 미끄럽기도 여간 미끄럽지 않았다. 이런 절벽에서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근 150m 높이의 벼랑으로 거침없이 떨어지는 것이다. 하긴 그런 위험한 곳이었기에 경비대도 드물게 순찰만 하였다. 우리가 절벽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경이었다고 본다. 일행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다음 우리는 골짜기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내려가는 동안은 누구나 긴장하였다. 바위틈으로 나무도 나 있었는데 싸리나무나 가시나무 같은 약간의 약한 나무가 있고 풀 이끼와 벼랑뿐이어서 정말 발붙이기 어려웠다. 대낮이라면 앞을 보고서라도 풀뿌리나 나무 가지를 잡고 좀 빠르게 내려가겠지만 어두운 밤이어서 매우 힘들었다. 다행히도 눈이 많이 온 탓에 그 눈빛이 어둠을 약간 가셔 주었다. 내가 앞서 나가며 몇 발자국 옮기면 그 뒤에 여자가 따라 내려오고 또 그 뒤에 동무가 서서 여자들을 데리고 내려온다. 이렇게 간난신고(艱難辛苦) 하여 벼랑을 겨우 내렸다. 나는 벼랑에서 내린 다음 두만강 얼음을 타고 100m 쯤 아래로 내려 온 다음 일행과 함께 순식간에 두만강을 넘어섰다. 넘을 때에도 한사람이 간 것처럼 발자국을 찍으면서 일렬 종대로 건너갔다. 여기서부터 내가 아는 중국인가까지 가자면 15리 정도 걸어야 했다. 거기서 또 우리가 가려는 화룡시 까지는 150리 정도 되었다. 강둑이나 밭을 지나 큰길에 들어선 우리는 급행열차처럼 질주했다. 그런데 어려움은 그 다음부터였다. 13살짜리 여자애가 절벽을 내릴 때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이다. 겨울 신발도 아니고 여름에 신는 편리화를 신었는데 발이 얼어서 겨우겨우 걸었다. 나의 동무는 애초부터 반가워하지 않았다. “네가 정신이 없지. 이런 아이를 어딜 데려온다고 그러냐. 인정만으로는 일을 하지 못한다. 네가 이제 무슨 일을 치는가 두고봐라. 네가 결심한 일이니 막지는 않았지만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 한 겨울에 맨발로 눈길을 그냥 가자고 할 수도 없고... 나는 그 애한테서 눈에 젖은 홑 양말을 모두 벗기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모두에게서 양말 하나씩 네 켤레를 벗겨 냈다. 양말을 신기고(4켤레) 걸으니 처음보다는 많이 나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것도 마찬가지다. 제일 위험한 이 구간에서 빨리 빠져야만 산길로 붙을 수 있는데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산 속 깊숙이 들어가야 불도 피우고 옷도 말려 입고 또 날이 밝으면 밥도 얻어오겠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할 수 없어 아이를 업었다. 100여 리 생눈 길을 헤치며 강행군을 하다나니 나도 많이 지쳤다. 정말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가고 또 갔다. 두만강 옆에 있는 이미 전부터 알고 있던 중국집에 들어가니 주인이 몹시 당황해하고 딱해하는 눈치였다. 중국 변방 부대가 계속 순찰을 하고 마을에 한두 명씩 상시적으로 와 있는데 이렇게 다섯 명씩 무리를 지어 들어오면 자기네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먹을 것이라도 좀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 따라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밥을 하자면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밥도 못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할 수 없어 우리는 아이에게 신발을 얻어 준 다음 다시 걷기로 하였다. 이제부터는 큰 길이 아니라 산길을 따라 또 다시 20리쯤 가면 다른 중국마을이 생긴다. 거기에 또 아는 집이 한 집 있었다. 거기 가서 먹을 것을 좀 얻자. 그리고 전화도 좀 하고… 나는 그 중국인이 야속하게 생각되었으나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제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인데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처녀애는 발이 얼어서 물집까지 생겼으나 신발을 신은 후에는 그래도 조심조심 따라왔다. 이렇게 어렵게 다시 걸어 다음 마을까지 갔을 때는 날이 이미 푸름 푸름 밝을 때였다. 우리는 여자들을 산 속에 숨겨 놓고 남자들끼리만 마을에 내려갔다. 그 마을에는 촌장네 집에 전화가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전에 올 때 촌장 집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촌장이란 사람은 없고 그 집 아주머니와 딸들이 우리를 반갑게 대해 주었다. 우리는 거기서 전화도 하고 밥도 먹었다. 물론 우리는 그때 수중에 돈이 있었으므로 돈 계산은 다 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우리 수중에는 중국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더구나 답답한 것은 그 집에 촌장은 있었으나 아주머니가 없다는 것이다. 전화를 하려고 하니 전화비를 내지 못해 전화를 못한다는 것이다. 밥을 좀 해 달라고 하니 밥도 못해 준다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고 도와주는 것이 들키기만 하면 벌금을 한다고 하면서 촌장이 부들부들 떨었다. 하여 그 집에서 나와 다른 집으로 가 보았지만 그 집들도 역시 똑같은 소리를 하였다. 정말로 막연했다. 먹을 것이라도 있으면 낮에는 산 속 깊이 들어가 불을 피우고 휴식하다가 어두우면 강행군하여 100리 정도만 가면 되겠는데 모두 지친 상태인데 다가 먹을 것도 하나 없으니 어떻게 하는가.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산길을 타고 10리 정도 더 걸었다. 또 다음 마을이 보였다. 그 마을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마을로 내려가 조선족 집을 찾아 밥을 빌기로 하였다. 일행을 산에 숨겨놓고 동무와 같이 마을로 내려갔는데 중국 한족 노친이 우릴 보고 고래고래 소리 친다. “조선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을 잡아라” 중국어로 소리친다. 이 고함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나왔고 이미 전부터 와 있던 경찰 두 명이 우리를 뒤쫓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 구야. 우리는 그 망할 여인을 보고 어쩌지도 않았는데 지나가는 것까지 저렇게 악을 쓴단 말인가. 정말로 화는 쌍으로 온다더니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하겠다. 우리 일행은 한패의 중국인들과 두 경찰에도 쫓기어 산에 따라 붙었다. 그 사람들이 계속 따라왔다. 그러나 아무리 굶주리고 지쳐서도 “빨치산”에 이골이 난 우리들인데 그들이 따라 올 수는 없었다. 돼지 같은 몸으로 겨우 숨을 몰아쉬며 쫓아오던 사람들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어 돌아갔다. 추적에서 벗어났지만 우리도 맥이 빠졌다. 불을 피워놓고 젓은 신발을 말리 우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어떻게 갈 것인가? 일단 들어선 이 길은 끝까지 가야 한다. 방향을 돌릴 것인가 그대로 전진할 것인가? 그러나 전진하려고 해도 지칠 대로 지친 몸이다. 다시 돌아서서 마을로 가자” 나는 나의 결심을 말하였다. 모두가 힘이 들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걸어 온 길을 따라 다시 20리쯤 되돌아서서 또 일행을 산 속에 숨겨 놓고 저녁 무렵에 마을로 내려갔다. 우리가 설득을 잘 한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긴 탓인지 그 집에서는 5인분의 밥과 반찬을 해 주었다. 만 하루를 추위 속에서 고생하며 굶은 우리들에게는 그런 찬밥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산 속에 불을 피우고 밥을 먹은 후 우리는 불모지를 중심으로 빙 둘러 누워 새우잠을 잤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서야 어디서 힘이 나겠는가? 날이 푸름 푸름 밝을 무렵에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계속 산길로 갈 수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대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하겠는데 대낮에 어떻게 대로를 걷는단 말인가? 부득불 산에 들어가 있다가 어두우면 걸어야 하겠는데 그렇게 되면 또 다시 굶은 상태로 걸어야 하는 것이다. 굶고서야 어떻게 하루 밤에 100리를 행군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다가 우리는 숲 속에서 나무를 패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로 가보니 중국인(조선족) 한사람이 큰길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막을 짓고 나무를 한다는 것이다. 나무를 하여 패서 시내에 가서 판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녁때까지 나무를 패주기로 하고 그 사람에게 먹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정말 죽을 길이 생기면 살길도 생긴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 대신 우리 남자 두 명은 죽을 고생을 했다. 여자들은 쉬고, 남자들은 밖에서 하루 종일 나무를 팼다. 일을 다 하고 나니 저녁때가 되었다. 우리 두 명도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는데 하루 종일 또 나무를 팼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저녁밥을 든든히 먹은 후 우리는 다시 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을 내어 30리쯤 걸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힘이 빠졌다. 온몸이 나른해져 졸고 졸면서도 눈이 내린 길을 걸었다. 너무 힘들어서 여자들 손을 한 명씩 쥐고 5m 간격으로 사이 두고 그들이 우리를 데리고 갔다. 너무 지치고 다리가 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자고 싶은 생각이 불끈불끈 하였다. 손을 잡고 교대로 자면서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길, 운명이 달린 길이기에 우리는 주저앉지 못했으며 끝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데려온 여자들을 용정에 있는 친척집까지 무사히 안내해 주었다. 이쪽 아주머니도 남편 되는 사람을 찾아 주고… 물론 우리는 수고 비를 좀 받았다. 13살짜리 아이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였더니 자기가 꼭 잘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정말로 수고하였다. 각처에 수소문하여 알아보고 끝내 자식이 없이 지내는 늙은 내외를 찾아내어 그를 큰 도시에 보내어 공부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너무 힘든 나머지 며칠동안 쉬고 가려고 작정했다. 그런데 이것이 큰 실수가 될 줄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나쁜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시내로 구경을 나왔던 우리는 그 사람들의 고자질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나쁜 사람들이 상금을 타 먹었을 것이다. 나는 애초에 그 사람들을 알지 못했으며 지금도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 사람들은 나와 함께 갔던 친구가 이미 전부터 아는 사람들이라도 하여 같이 갔는데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체포되어 변방 부대에 넘겨졌으며 조선으로 이송되었다. 조선 무산군 보위부에서 20일 동안 잡히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우리는 친척의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 잡혔다고 끝까지 버티는 통에 만 22일만에 다시 풀려나올 수 있었다. 내가 허약해 진 몸을 끌고 집에까지 왔을 때 집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13살짜리 여자애가 안전원과 함께 우리 집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죽을 힘을 들여 데리고 갔던 그 13살짜리 여자아이가 다시 두만강을 넘어 나오던 중 조선 경비대에 잡히게 되어 안전부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안전부에서 위협하고 심문하자 그는 겁에 질려 누구하고 같이 갔다는 것을 다 말해 버렸다는 것이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큰 도시로 간줄 알았던 애가 잡혀 나오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즉 여자아이는 우리와 같이 갔던 일행을 다 말해 버렸을 것이고 그러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전번 교화소 행도 그런 걸음이었고 이번까지 잡히는 날에는 더 말해 볼 것도 없었다. 어쨌든 알아보자. 나는 새벽녘이 되어 조용한 기회에 처녀애의 집으로 찾아갔다. 들어보니 사연은 실로 어처구니없기 짝이 없었다. 나와 약속한 중국 사람은 그 애를 자기 집에 두고 며칠 간 휴식시키고 도시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 도시인 즉은 베이징(北京)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무서워 못 가겠다고 떼질 을 썼다는 것이다. 안 가겠다는 아이를 어떻게 강제로 보낸단 말인가?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두만강까지 나와 조선으로 건너 보냈다는 것이다. 건너오던 중 경비대에 단속되어 안전부로 갔으며 거기서 우리의 사실을 다 말했다고 하면서 여자아이는 오히려 울면서 나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니 정말로 가슴도 아팠지만 눈물이 났다. 아니 그 보다는 억울했다 “네가 도대체 누구를 잡는 거야? 우리가 가면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일, 못 가는 곳을 너는 네가 안가겠다고 뿌리치고 왔으니 너 때문에 나는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렇게 말하며 하소연했으나 그것은 한갓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 짓이었다. 나는 이제 비로소 사람이 인정에 너무 깊이 빠지면 그 인정 때문에 손해를 보며 나중에 생명까지 좌우지 된다고 하던 윗사람들의 충고를 새삼스럽게 절감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나의 두만강 행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어머님과 동생들과 작별하고 남의 나라로 건너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나는 남의 나라 땅에 가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낯 설은 이국 땅에 가서 나 혼자 몸으로 어떻게 산단 말인가? 그러나 제 나라에서는 살수가 없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되게 한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내 책임도 있다. 그러나 이 길을 걷도록 한 것이 도대체 누구 때문인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부밖에 몰랐던 순진한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이 길로 걷게 한 장본인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당에서는 입만 열면 어머니 조국 어머니 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자식을 제대로 먹이지도 입지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에 도망쳐 가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면 그것도 과연 어머니라고 해야 할까 또다시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두만강을 건너면서 나는 나의 가정의 무사만을 빌었다. 중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하나님만 믿으면 뭐든 다 해결된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 같이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줄 수 있을지는 그야말로 하늘이나 알 일이다. 6. 인생의 모험(2003. 3 ~ 2003. 6) 두만강을 건너선 다음 나는 이름을 고치기로 결심하였다. 仁(인)자를 빼고 光(광)자를 넣어 광수(光秀)로 부르기로 하였다.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들어왔으나 갈데 가 마땅치 못하였다. 친척집에도 가지 않았다. 친척집들이라고는 하지만 먼 친척들인 데다가 나를 돌봐 줄 능력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지켜주고 도와 줄 사람은 어디 있겠는가? 생각 끝에 나는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집으로 갔다.. 그 사람은 나를 여러모로 도와주었고, 지켜주었고 나를 위해 늘 마음을 썼다. 친척보다 남이 났다는 소리가 이래서 나온 듯 싶다. 조선에서 건너온 때 사향 20g을 가지고 왔다. 그것을 팔아서 중국돈 1천원을 마련하였다. 그것을 가지고 얼마 동안은 살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였다. 이대로 주저앉아 말이나 배우면서 중국에서 살까? 그러나 중국 땅에서는 살기 힘들다. 더구나 연변지대에서 살기는 더욱 곤란하다. 검사를 계속하며 때없이 호구조사를 한다. 중국 호구도 없고 말도 잘 못하는 내가 들키기만 하면 끝장이다. 나는 기회를 보아 한국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 이 결심은 나에게 있어서 모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모험에서 성공하면 살고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은 끝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으로 건너가 내가 살아갈 기틀을 마련하고 나에 억울함과 내가 살던 사회의 허황함을 조금이나마 밝히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당해야 했던 모든 사실들을 공개하여 눈뜨지 못한 사람들에게 눈을 띄워 주자. 이것이 나의 결심이었다. 그러면 나의 이 결심을 지지해 주고 도와 줄 사람이 있어야 하겠는데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방법을 찾지 못해 안타깝게 헤매고 하는데 하소연도 하고… 반갑게도 다행히 내가 데리고 왔던 조선인 한 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중국의 큰 도시에서 살고 있다. 이 때부터 나는 그에게 내 사연을 말하고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되어 그와 나는 서로 연계를 가지었고 서로의 일을 위해 조선행도 함께 하였다. 그때 조선으로 나가는 나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나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고 감시가 조밀한 국경을 다시 넘어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앞날을 위하여 이 길을 선택하였다. 떠나기 앞서 우리는 자신들의 명복을 빌었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결심한 조선 땅을 디디는 나의 감정은 표현하기 어려우리만큼 이상하였다. 나는 최대한의 조심성을 가지고 조선 땅의 거의 600리를 왕복하였다. 다시 두만강을 건너 화룡에 까지 도착하여 지금은 중국의 큰 도시에 있다. 이제부터는 누가 나를 도와 주겠는가? 하나님이라도 믿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면 그가 나를 도와 주겠는가? 나는 진실한 감정으로 이 글을 쓴다. 아직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내 앞길에 많이 놓여 있으리라고 본다. 이 어려운 일들을 어떻게 하여 헤쳐 나갈 것인가? 아무튼 나는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는다. 나의 인생행로를 결정한 이상 그 행로를 따라 굽힘 없이 나갈 것이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상상봉에 오르면 나를 도와주고 이끌어 주신 고마운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릴 것이다. 맺는 말 “꿈으로 보이는 7년” 이런 제목을 달고 독자 여러분께 저의 7년 간 생활을 사실 그대로 전해 드렸습니다. 글을 쓰면서 표현력이 약하고 글귀가 맞지 않는 결함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이 글을 마지막까지 보아주시고 저에 대하여 이해하여 주시고 오늘의 저 북을 아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2003년 5월) - 필자는 2003년 11월 경 중국 어느 도시에 숨어살다가 공안에 잡혔다고 합니다. 북한으로 강제 이송된 이후 그는 시범에 걸려 공개 사형 당했다고 합니다.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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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완전한 사회주의국가도 아닌데다가, 북한에게 더이상 무슨 덕을
볼게 있기에 도와주는건지원. 외교적인 문제때문에 도와주는 것이라면
하는듯 마는듯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며 탈북자들을 너그럽게 봐줘야
하는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 중국이란 나라도 막되먹은 나라다.
북한은 곧 망할 것이지만 중국도 지난날의 악랄한 행위에서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무저갱으로 처넣으소서.
그렇게 스러져간 이나라의 청년들이 얼마이며 또 죽어가고 있는가!
이글은 무심히 볼수없는 현실입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한국에서 조금 터를 잡은 저로서는 이분같은 처지의 분들을 돕고 싶네요.. 정말 1편에서 대학생활에 대한 글 많이 공감이 갔어요.. 아까운 인재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네요.. 아무쪼록 하늘나라에서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통일 된 강토에서 우리는 역사 앞에 영웅들의 영혼을 김정일과 함께 계산해야 합니다.
마지막글에 그것도 공개총살당하셧다니 ...
짦은청춘 미쳐 피어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돌아올수없는 먼길을 가셨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인정을 베풀다가 봉변을 당하시다니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