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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기]빛을 찾아 만리3 - 홍은영
동지회 10 6963 2005-10-26 10:48:38
빛을 찾아 만리

홍은영

? 첫좌절

우리가 추방되어 가는 곳은 자강도 위연군 위연 임산산업소라는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강계까지는 백 팔 십리, 초산까지도 백 이 십리, 정말로 산골 중에 산골이었어요. 평양에서 그곳으로 갈 때 우리는 이삿짐이 도착하지 않아 강계역전에서 사흘간 묵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우리는 첫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어요.
참으로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게도 험악하다는 것을 우리는 거기서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날도 아침부터 궂은 비가 내렸어요. 그래도 언니와 저는 혹시나 하고 역전수화물 칸에 나가 보았으나 역시 짐은 오지 않았어요
그러자 언니가 낯선 고장에 가면 뭐니뭐니 해도 식량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가지고 간 물건들 중에서 고압 밥 가마를 꺼내 옥수수 바꾸러 가자고 하여 우린 함께 떠났어요.

언제인가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그 고압 밥 가마를 사가 지고 와서 그렇게도 기뻐하셨던 것인데 우리 형편이 그렇고 보니 어쩔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언니도 저도 고압 밥 가마는 평양에서도 귀한 물건이니 적어도 강냉이 열 다섯 킬로쯤은 바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사람들이 물건을 보고는 쉽게 놓지 못해 하면서도 강냉이 열 다섯 킬로라는 말에는 돌아서고 말더군요.
빗속을 헤치고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옷은 이미 흠뻑 젖었는데 그래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안타까워 어쩔까 하는데 다행이 장마당 입구에서 만난 웬 중국 사람이 바꿔주겠다고 나섰어요. 정말 흉물스럽게 생긴 사람이었어요
입도 눈도 그리고 생긴 모양까지 모두가 꼭 중국 영화 손오공에 나오는 저팔계같이 생긴 놈이었어요.
중국은 개혁?개방을 해서 모두 가 잘 산다고 하던데 이놈만은 그렇지도 않았어요. 입고 있는 덧 저고리조차도 기름때가 반질반질한 것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담배 진으로 누래진 이빨은 생전 한번도 닦아 본적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놈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언니를 올려 보고 내려 보고 훑어보더니 바꿔주겠다며 따라오라는 것이었어요.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 가만히 언니의 손을 꼬집었어요. 그런데도 언니는 강냉이 열 다섯 킬로를 단념할 수 없어서인지 저의 손을 끌었어요. 그놈의 집은 시내에서도 한참 먼 구석진 곳에 있었어요. 가면서도 그놈은 계속언니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데 꼭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놈은 히죽 히죽 웃으며 자기 집에 돈이 아주 많다는 자랑을 늘어놓았어요.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는 강냉이만 바꿔오면 되겠기에 집까지 따라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놈의 집도 꼭 그처럼 음침하게 생겼던 것 같아요.
3미터는 실히 될 널판자 울타리를 둘렀는데 그 위에는 넉줄당콩 같은 것을 올려놓아 얼핏 보면 무슨 요새처럼 보였어요. 이중 자물쇠로 된 대문을 열자 중송아지 만한 개가 달려 나와 길길이 뛰었어요. 장말 혼비백산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중국 사람이 뭐라고 소리치자 한쪽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좀처럼 경계하는 빛을 늦추지 않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개 때문에 초벌 얼이 빠져 언니 뒤를 따라가는데 그 중국 놈이 문득 저보고 문가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거예요. 집안에는 언니만 데리고 들어가려는 것이었어요. 언니도 잠시 망설이는 듯 하였으나 저보고 기다리라 눈짓하고 따라 들어갔어요 집안 쪽으로 빗장 지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요. 그때는 벌써 날이 컴컴해지기 시작하였는데 언니까지 없고 보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옥수수고 뭐고 공연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런데 금방 돌아 나올 줄 알았던 언니까지 시간이 웬만큼 지나도록 나오지 않자 더럭 겁이 났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집안 쪽 깊은 어느 곳에서 갑자기 악쓰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었어요.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 같은데 한쪽은 언니였고 다른 쪽은 데리고 들어간 중국 사람이 틀림없었어요. 제가 깜짝 놀라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안으로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너무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르는데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중국 놈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이어 다급한 발자국 소리 문여는 소리 언니가 나타났어요. 그러나 언니를 보는 순간 저는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 찢어진 옷 앞자락, 그래도 언니는 강냉이 자루만은 꼭 껴안고 있었어요.
“은영아, 가자”
언니가 소리쳤어요. 하지만 언니가 문가에서 두 걸음도 나서기 전에 중국 놈이 뒤따라 나타났어요.
찢어진 이마에서 피까지 줄줄 흘러 꼭 귀신같은 몰골이었어요. 성이 잔뜩 올라 흰자위만 번뜩거리는 눈을 해 가지고 당장 잡아먹을 듯이 언니의 팔을 휘여 잡았어요.
사정없이 언니를 붙어 안아 집안으로 끄는 것이었어요.
“타마디 조선 여자나 중국 돈 3원이면 충분이 해 그런데 네년이나 10원이나 주는데도 거절이 해.”
언니는 그놈에게서 벗어나려고 꼬집고 할퀴고 하는데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놈의 억대우 같은 힘 앞에 엿가락처럼 휘어들고 있었어요. 언니를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달려들었어요. 언니를 껴안은 놈의 손을 풀어보려 했으나 어림없었어요. 너무 안타까워 신발을 벗어 그 놈을 때렸어요. 그러자 문뜩 그놈이 돌아서더니 허깨비같이 저를 차버렸어요. 제가 갑자기 숨이 막혀 저만큼 나가동그라지는데 언니 절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은영아!”
대답을 해야겠으나 숨이 꼭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슴만 쥐어 뜯는데 그때 언니가 그놈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놈이 갑자기 악 소리를 지르더니 더욱 미쳐서 언니의 찢어진 옷 앞자락을 확 잡아 당기였어요. 언니 젖가슴이 그대로 쏟아져 나오더군요. 언니는 두 손으로 앞을 가리며 풀싹 주저앉는데 놈이 사정없이 걷어 찾어요.
갸날픈 비명소리와 함께 언니는 한쪽에 쌓아둔 옥수수 짚더미에 나가떨어지더군요.
“호, 순순히 말이나 들었으면 돈이나 벌지 이젠 강냉이도 메유.”
놈이 씨근거리며 언니에게 다가갔어요. 언니는 파들파들 떨 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 놈은 내가 보는 앞인데도 상관없이 짐승 같은 짓을 하려는 게 틀림없었어요.
“안돼. 그러면 안돼”
제가 목청껏 소리쳤으나 소리조차 제대로 나가지 않았어요. 바로 그때 대문소리가 삐걱 났던 것 같아요. 하지만 놈은 그 소리도 듣지 못하고 숨이 막혀 쓰러져 있는 언니에게 달려들었어요.
그러고는 꼭 정신나간 놈같이 언니의 옷을 찢어 벗기였어요
문득 대문 쪽 해바라기 숲 사이로 안전원 둥글 모자가 보였어요. 삐쩍 마른 대위견장을 단 안전원이 나타났던 거예요.
“안전원 동지. 우리 언니를. 우리 언니를 살려주세요.”
사실 전 그때까지 안전원을 특별히 좋은 사람으로도 나쁜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어요. 저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때만은 정말로 하늘같이 고마웠어요.
제가 어떻게 기어가 안전원에게 매달렸는지 몰라요.
하지만 뜻밖에도 안전원은 너무도 냉담했어요. 울며 매달리는
저를 차갑게 밀쳐 버리는 것이었어요.
“어이, 왕가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이야?”
그때까지도 언니의 속옷을 헤치느라 정신이 없는 중국 놈에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엉?? 너 백가?”
중국 놈이 깜짝 놀라 일어섰어요. 그러나 겁내는 기색은 전혀 없었어요.
“왕가, 미안해. 저녁에 안전부 정치부장을 불렀는데 사실은 ...”
안전원이 오히려 애써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어요.
“써마? 그거나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 또 술이나 달라는거야?”
중국 놈은 오히려 화가 독같이 올라 소리쳤어요. 다 잡은 새를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겠죠.
‘아 늘 잘 도와주다가 뭐야, 오늘 저녁에는 정치부장이라고 하잖아“
안전원이 헷 웃음을 날리며 낯 간지럽게 낮추 붙더군요.
정말 기가 막혔어요. 안전원을 보고 순간 그야 말고 구세주를 만난 줄 알았는데 그게 오히려 그 놈한테 절절 기는 놈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부지도. 내나 당신 정치부장 하고 무슨 상관인가”
중국 놈은 오히려 게사니 고기 먹은 놈처럼 꿱꿱거리었어요.
“아, 왜 또 이러는 거야. 이번엔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그런다는 말이야”
안전원이 더욱 게걸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끈질기게 다가들었어요.
그새 쓰러졌던 언니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어요.
전 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안전원아저씨 이놈을 그냥 놔둬요. 이놈이 우릴 죽이려 했단 말이예요”
그대로 보고만 있으면 술 흥정이나 하다가 말 것 같아 안전원에게 매달렸어요.
“저놈을 잡아 가야해요. 저놈이 우리 고압밥가마를 가지고 옥수수를 주겠다고 해서 왔던거란 말이예요.”
안전원이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러지 않나 생각되어 말했어요. 알면서도 그렇게 술 흥정이나 하고 있으리라 고는 정말 도저히 믿겨 지지 않았던 거예요.
“뭐야? 이 썩어 문드러질 것들아! 썩 없어져버리지 못하겠어.”
문득 안전원이 우리보고 소리쳤어요. 꼭 승냥이 같이 말이예요.
방금 전까지 중국 놈한테는 그렇게도 살갑게 헷웃음을 치던 안전원이 말이예요.
“아니??”
전 정말 기가 막혀 더 말이 나가지 않았어요.
“은영아, 가자”
언니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저의 손을 끌었어요.
“아니, 너희들 마음대로 못가 했소”
중국 놈이 안전원 앞인데도 다시 달려들려 했어요.
‘아, 왕가 저런 건 역전에 가면 득실득실 하잖아. 빨리 들어가 그거나 해결해 주지. 이 쌍년들 썩 사라지지 못하겠어.“
안전원이 우리한테 다시 소리쳤어요.
너무 억울하고 분하니까 말은 나가지 않고 눈물만 나오더군요.
“은영아, 더 말해볼 것도 없다. 어서 가자고 하잖니”
언니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저의 손을 끌었어요.
우리 자매는 간신히 몸을 가누며 나오는데 안전원한테 밀려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가던 중국놈이 말했어요.
“꾸냥 아무 때에도 좋다 바쁜 일이나 있으면 찾아 와라 내 돈이나 많이 준다”
그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더러운 누렁이빨을 드러내며 말이예요.
‘에이, 더러운 되놈아. 벼락이나 콱 맞아라’
우리는 나왔어요. 하지만 그때로부터 몇 달 후 정말 우리가 다시 제 발로 그놈을 찾아 들어가게 될 날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나 그건 뒤에 일이고 우린 역전을 향해 걷고 걸었어요. 분하고 춥고 배고프고...
다행이 날이 어두워져 중국 놈한테 찢긴 언니의 옷을 유심히 살피는 사람은 없었어요.
인풍루까지 거이다 왔을 때예요. 갑자기 또 비가 쏟아지더군요. 우리는 어쩔 수없이 비를 그으러 인풍루에 들어갔어요.
인풍루라면 평양 련광정, 안주 백상루 등과 녕변의 약산동대 등과 더불어 옛날부터 관서 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지요. 하지만 그때 그게 우리한테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저 그 유명하다는 인풍루도 우리한테는 처마가 있으니 비를 그을 수 있는 곳이었을 뿐이에요.
다 퇴색한 단청에 붉은 기둥 거기에 기대앉고 보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어요. 언니도 저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붙어 안고 울기 시작했어요. 정말로 처음으로 실컷 울었던 것 같아요. 처음 흐느끼기 시작한 건 저였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언니가 오히려 더 슬프게 울었던 것 같아요.
“은..은영아. 아버지가 뭐라고 했다구 삼..삼년만 어떻게 하던지 죽지 말구 살라구 했다구?”
언니가 헉헉 느끼며 말했어요.
“응. 그...그래. 삼 년 새 무슨 변이든 일어 날 것이라구.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부지하라구 했...했단 말이야”
저도 흐느낌 때문에 말이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래. 우...우리 어떻게든 꼭 살아야 돼. 죽지 말고 꼭 살아야 돼”
아래쪽 깊은 계곡에서는 독로강물 소리가 세차게 들려 왔어요.
울고 울다 깨고 보니 사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더군요. 멀리 가깝게 보이는 아파트 창문들마다 하나 둘씩 등잔불이 켜지기 시작하더군요 거기는 정전이 되었어도 기름들을 아끼느라 불을 얼른 켜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때 그 등잔불을 보느라니 거기에는 그래도 나름대로 따뜻함이 있고 행복이 있을거라 생각되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 본 것 같지도 않게 생각되었요. 갈곳도, 오라는 곳도 없었던 우리들. 우리는 그대로 거기 앉아 오랫동안 앉아 있었어요.
언니는 스물 한 살, 저는 열 여섯 살, 정말 우리 앞길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다행히 그날 저녁참에 짐이 도착하여 우리는 목적지인 위연 림산사업소로 떠날 수 있었어요.

(다음호에 계속)

탈북자동지회 회보 2003년 2월[탈북자들] 연재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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