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도 인간이다.(2) - 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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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세상 속에서 - 김혁 그러던 9월 어느날 나는 재판 받으러 가게 되었다. 헌데 10호 감방에 있을 때 함께 친숙했던 왕창룡이라는 죄수가 내가 재판가는 날 도망치겠다고 했다고 말해버렸다. 그통에 나는 귀쌈을 30개나 맞았다. 여윈 얼굴이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지만, 그 호된 매에 퍼렇게 변해버렸다. 사형수처럼 뒤로 포승을 묶어 재판 받으러 갔다. 홀로 감방에 갇혀 포승도 풀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쪽잠을 자느라니 새벽이 밝아 왔다. 내가 어찌하여 이처럼 재판 받는 날을 고대히 기다렸으며 내가 오늘을 어찌하여 이런 재판장으로 끌려 나와야 하는지를 새삼스럽게 내 머리 속에 일으킨다 나를 고발한 여자, 나는 그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다. 다 굶어주게 된 그녀의 3 식구를 내가 먹여 살렸다. 물론 수단은 온전하지 못한 농장 강낭이밭 도적이었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들과 같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나는 물론 그 3식구까지도 먹여 살렸다. 그런데 그녀가 어찌하여 나를 고발하였는가? 그것도 자기 생명의 은인을 왜 감옥에 잡아 넣어 오늘날 이처럼 재판까지 받게 만들었는가? 여인은 괴물이다라는 소설책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있다. 나 역시 이 당시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저주스러운 그녀 나는 1998년 9월경 그녀를 만났다. 집에 들어서니 집에 먹을 양식이란 전혀 없었다. 송구공 만한 곰팡이 낀 호박 2 개 반 외 먹을 것이란 쌀알 한 알도 없었다. 그녀 역시도 2일 동안 굶었고 그의 자식 오누이도 매 한가지였다. 불쌍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하며 남자 손이 없으니 혼자서 나무와 먹을 것을 얻기에 너무나 힘들다며 집에서 동거하자고 했다. 요구 조건은 나무를 해달라는 것과 식량을 얻을 수 있으면 가능한 함께 협조하여 살자는 것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살이었지만 나는 누나라고 불렀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농장 강낭이밭에서 도적질을 했다. 30kg배낭을 단번에 두개씩 이삭을 넣어 가지고 집에 내려왔다. 매일 근 6배낭의 이삭 강낭이를 훔쳐다 집에 쌓아놓기 시작했다. 먹지 못해 여윈 7살 짜리 소녀와 5살 짜리 남자 애는 차츰 피어나기 시작했다. 역시 보잘 것 없는 강낭이지만 조선에서는 큰 식량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농장 밭 도적질이란 마지막 생명유지의 수단이었다. 그렇게도 많던 사람들과 그들의 인심은 다 없어지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기에 모두들 도적질이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때 현실의 참혹한 ? 사람들의 구호였다. 머저리처럼 왜 굶어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굶어죽는 사람들을 이전에는 불쌍히 여겼지만 지금은 머저리라고 하는 판이지 누구나 식량 도적질을 해도 도적이라고 생각지 않기에 나 역시도 서슴없이 도적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나뭇잎은 다 떨어져 앙상한 대만 남겨 놓았다. 저축한 강낭이는 250kg 정도 되었고 그녀의 돈 빚으로 300kg이나마 되는 강낭이가 나갔다. 그 강낭이로 빚을 물어줄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왜 내가 남의 빚을 물기 위해 땀을 철철 흘리며 도적질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그녀를 진정으로 믿었기에 진정으로 도와주며 그녀가 남편 만날 때까지 굶지 않게 빚에 시달리지 않게 하고 싶었다. 캄캄한 그녀의 앞을 밝혀주고 싶었다. 그러던 초겨울 어느날 그녀와 나는 중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단지 돈을 좀 얻기 위해서였다. 그녀와 나는 무사히 넘어왔다. 그 후 그녀는 한 군관을 사귀었다. 나는 중국을 자주 다니다가 잡히기도 하며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남편이 나에게 하루벌이라도 하며 살자고 했다. 하루벌이를 하기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말자고 했다. 너무나 어색하고 뻔한 말이었다. 결국은 나를 집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사회적 현실에 익숙하지 못한 나인지라 나는 순순히 그의 집을 나섰다. 당신들이 없다고 내가 살지 못하겠는가. 그때 첫눈이 퐁퐁 내려다. 나는 첫눈을 밟으며 수옥의 집을 나섰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여 좋은 낟알을 자신들의 것으로 완전히 만들고 입을 하나 덜면 그만큼 몇 일을 더 살 수 있기 때문에서였다. 결국 자신들의 목숨을 더 연장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끊어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쉽게 넘어질 내가 아니었다. 10살 때부터 깨기 시작하여 고생을 겪어온 내가 아무도 모르는 땅 풀도 없이 눈만 내리는 계절의 풍파 속에서 쓰러질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너희들이 강낭이 죽을 쑤어 먹을 때 나는 이밥을 먹으며 너희들의 낯을 뜨겁게 만들리라. 나는 그 후부터 (강타기) 비법월경을 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들은 놀랍게 발전하는 나의 모습에 인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저주스럽게 보며 대상하지 않았다. 그러던 1999년 3월 어느날 오후 나는 한 아저씨 집에서 나무를 패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의 불안이 갈마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항상 잡힐까 염려되는 불안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날만큼 새삼스럽게 느끼긴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분 안지나 보위부 소장과 지도원 130호 요원들이 나타났다. 나는 끝내 잡히고야 말았다. 나는 수쇠에 묶이운 채 거리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보위부에 갇혔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폭력에 시달렸다. 채찍과 부삽으로 마구 때리니 꼭 미친놈들 같았다. 함께 온 두 명의 중국인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넘어간 뒤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터져 얼굴은 온통 피 범벅이 되었고 허리와 종아리 등 할 것 없이 퍼렇게 멍이 졌고 밤이면 눕기가 힘들었다. 상처 자국들이 아파서 몸을 바닥에 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무 각자를 들고 어깨며 허리,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려치니 몹시 참기가 힘들었고 저녁이면 너무나도 폭행해 변해버린 몸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과연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하는 것이 제일 궁금했다. 거의 99%추측이 그녀인 것이었다. 내가 중국인과 함께 온 것도 그녀 외 누구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는 것 같아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러던 3월23일 아침, 뜻밖에 그녀가 보위부에 나타났다. 보위부 소장은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진술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보위부 소장이 주는 나의 진술서를 보던 도중 그녀의 자백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자수 및 고소하는 글이 적혀있고 고소된 자의 이름은 내 이름으로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그 글을 보면서도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 다음날 나는 온성군 안전부로 이관되었다. 아직도 보위부 소장이 그녀에게 욕한 말이 생각난다. 그때 보위부 소장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때만큼 여자에 대한 실망이 커본 적은 없었다. 그때 나는 무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감옥에서 수치스러운 치욕을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그때 보위부 소장이 한말은 내가 알라는 뜻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던 4월 중순 나는 예심원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다른 곳으로 넘겨 갔다는 것이다. 나의 머리 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잡히면 자신을 고발 할 까봐 먼저 자신이 고발하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 분주소에 고발하려 하면 자신의 범죄권 증인을 내세우지 못하는지라 잘못하다가는 자수가 오히려 감옥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보위부에 고발하기로 했다. 보위부는 권위가 있으므로 자수인을 살려 줄 것이고 나는 잡히게 될 것이다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보위부에 고발하고 수사가 분주소에서 수옥이 사건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한 것 이다. 결국 보위부에서 조사하고 그녀를 놓아주면 분주소는 물론 누구도 감옥에 넣을 수 없다는 점에서 미리 나를 잡아 자신에게 다가올 것 같은 불행을 피하려고 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본적을 떼서 딴 곳에 옮겨놓고 본거주지 분주소에서 나의 동범으로 잡아 넣으려고 해도 자신들의 관할 구역이 아니기에 넣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구 분주소에서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적을 딴 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무서운 그 무언가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해 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의 마음은 심한 갈등을 느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내고 나니 단 1%도 차이가 없는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가 그런 음모를 꾸미다니 자신이 살기위해 자신들을 살려 준 나를 미끼로 던지고 자신의 인생을 찾으려 하다니 저주스러웠다. 나는 나의 생각을 예심원에게 이야기 하였다. 예심원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놀라워했다. 나는 예심원에게 거의 간청하다 싶이 했다. 그 악마 같은 년을 감옥에 함께 넣어달라고. 나는 복수하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다 그때만큼 여자가 저주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했다. 누나가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친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맛보지 못해서인지 나는 여자를 무척 존중해 주었다. 나는 학교 때도 여자들이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나에게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여자 애들은 나에게 못할 말이란 전혀 없을 정도로 나는 낙천적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뒤 나는 여자를 멀리하게 되었다. 아직도 좋아하는 옛습관은 있지만 그때보다는 강렬하지 못했고 증오의 미련이 더욱 강렬해졌다.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다. 남이 불어서 들어왔다 했지마는 나처럼 먹여주고 살려준 이를 고발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 너무나도 분통하고 억울한 노릇이었다. 나는 그녀를 감옥에 잡아넣고 싶었다. 네가 조작한 일에 너도 무사할 것 같으냐 하는 식이었다. 악한 놈은 악에 망하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 감방에는 이런 범죄 속담이 있었다. 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악을 행하는 자는 물론 그 누구에게나 다 이해갈 수 있는 속답이었다. 나는 이 범죄 속담을 그녀에게 깨우쳐 주고 싶었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여학생이 해준 이야기는 라는 책 이야기였다.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버리고 떠난 여자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결혼식 날에 죽고야 말았다. 그 남자는 그런 여인들을 괴물로 생각했고 여자를 죽이는데 나섰고 마지막에는 결국 사형당한 이 이야기는 어찌 보면 내 현실을 거의 맞먹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3년이 거의 남아 되었지만 그때처럼 생생하게 떠오른 적도 업었다. 여자는 괴물이다라는 그 글이 그때 나의 마음 속에 현실로 느껴졌다. 저주스러운 그녀 복수하고 싶었다.(계속) 20005년 9월 김혁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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