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도 인간이다.(5) - 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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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전거리교화소 경험자 2001년 9월 입국 [1993년 3월부터 2000년 7월 6일까지 7년 4개월동안 가장 힘들었고 미래와 인권까지도 박탈 당해야 했던 쓰디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우리는 계호원들과 함께 회령으로 왔다. 역시 북쪽이라 날씨는 추웠고 식량이 없어 2끼를 굶었다. 기차가 없다 보니 우리는 화차를 타고 온성을 향해 떠났다. 사실 그 기차는 삼봉이라는 곳까지 밖에 안간다고 했다. 어쨌든지 한걸음이라도 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이었다. 삼봉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명이 죽었다. 배고픔에 허약한 몸인지라 자그마한 늦가을 바람에 추워서 떨다 죽은 것이다. 세상이 한스러웠던지 눈을 크게 뜬 채로 죽어 있었다. 우리는 삼봉에 시체를 맡기고 온성까지 오던 도중 또 한명이 죽어감을 알았다. 전혀 힘을 못쓰고 약간의 추위에 떨며 죽어가는 그를 보노라면 참으로 사람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온성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죽었다. 죽은 시체를 온성 병원에 맡기고 우리는 온성구류장 4호 감방에 5명이 들었다. 예심과에서도 탁구알이 죽으면 자신들에게 추궁이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남의 면식도 나누어 먹이기도 했다. 한 명이 그 다음날 병보로 나갔다. 그 후 두 명이 또 다시 병보로 나갔다. 4호 감방에는 단 두명이 남았다. 나와 다른 한 명이 말이다. 사실 병보라고 하면 사회에서 병을 고치고 병이 다 완치되면 도 다시 감방에 들어와야 하는 임시 병치료 해결 정책이었다. 이런 방식에 적용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보호자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다른 한명에게는 보호자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보호자가 없었다. 그 후 11월 초 마지막 한명이 나가고 나와 중국인이 한 감방에 둘만 갇혀 있었다. 나의 병이 심해지자 감옥에서는 남의 면식도 갈라 먹이고 남의 약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약은 아무 효과도 없었다. 하지만 음식이 나에게는 약이 되었고 결국은 자취를 감춰버릴 정도로 나아졌다. 1999년11월12일 , 나는 또다시 추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교화소로 향했다. 과연 이제 들어가면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도 많았고 꼭 살아야 한다는 미련도 많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17살에 죽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했다. 절대로 죽지 말아야 한다는 미련이 나의 약한 마음을 위로하게 했다. 죄수도 인간이다. 어마어마한 철대문을 지나 신체검사를 받으러 들어갔다. 신체검사에서 합격된 12명이 본소에 있는 신입반에 입소했다. 신입반에는 30명 정도의 신입생이 있었다. 이틀만에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폐렴이 재발되었고 거기에 열병이 겹쳤다. 입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보니 동복을 쓰고 자야했다. 불을 많이 땐다 해도 온돌이 뜨겁지 않았고 냉기가 많아 아침이면 또 다시 열병환자가 생기곤 했다. 교화소에서 제일 무서운 병이 열병과 설사병, 폐렴, 결핵 등이었다. 이런 병을 만나기만 하면 뼈만 남는 것은 몇 일에 불과했다. 그 이상 더 지속되면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바로 한 발자국만 옆으로 비끼면 바로 죽는 것이다. 지옥은 멀지않은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이런 조건을 만들어 놓은 것은 지금사회의 정치였고 일명 개변개조의 노동형인 것이었다. 약이 없다 보니 몸은 날로 쇠약해졌다. 교화소야 정말로 험악하고 인정이 없고 도리가 없는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 하나 병에 걸렸다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곳이야 말로 악한 세상을 이겨내는 자기자신의 실력전이 나타나는 곳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였다. 병은 험해졌고 열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교화소밥은 일명 가다 밥이라고 하는데 서랍밥을 가져다 콩과 함께 섞은 다음 150g드는 고뿌만한 틀로 찍어서 공평하게 만든 덩어리 밥이었다. 국이란 모래가 많은 염장 무우국이었다. 그 무우마저도 제대로 썰지 않아 통째 둥둥 뜰 때가 보통이었다. 조절을 잘 못하다 보니 짜갑기도 했고 어떤 때는 너무 싱거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맹물이었다. 밥에 너무 물이 많이 들어가고 딴딴하게 찍지 않아 그릇에 담기도 전에 깨지고 만다. 그 밥도 없어 못 먹는 판에 깨지는 밥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높이가 8~9cm정도 되었고 7cm정도 직경인 둥근 원형 밥이었다. 밥에도 1급, 2급, 3급, 4급, 5급까지 있었는데 1급은 본소에서 힘든 일이 제기 되거나 반장들의 밥이 1급에 오르곤했다. 그 밥 높이는 13cm정도이고 직경이 9cm정도의 큰 밥덩이였다. 2급은 그보다 2cm정도 낮았지만 지금의 상태에서 2급이 제일 높이 올라가는 밥이었다 1급 밥이란 이제는 보기 힘들 정도로 그 자체가 없어졌다. 그 다음 3급 밥은 내가 앞서 말한 가다 밥이고 4급은 낙후자, 병반, 신입반에 주며 3급에 비해서는 조금 작은 밥이었다. 5급은 독감방 대상들이 먹는 밥인데 3급밥 보다 더 절반이나 작은 가다밥이었다. 평균 3급은 보통 교화반들이 먹는 밥이고 오직 벌목만이 2급밥을 자주 먹곤 했다. 제12교화소에는 사회의 기계 작업장 등 건설까지도 다 있었다. 벌목반, 공무, 목공, 상하차, 건설, 낙후자, 창고, 차수리, 농산, 축산, 취사반, 병반, 신입반 등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본소의 교화반은 이것이 전부였다. 기본 생산품은 나무 절과, 가구, 성광 가루, 가구목, 차부속 등 여러가지 제품을 생산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지 못하고 있었다. 가구류는 그럭저럭 생산을 할 수 있지만 공무 같은 반은 쇠물 녹이는 보일러가 서다보니 내부 본소 부속이나 조금씩 깎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식량 때문에 교화소가 악화되고 생산량이 줄어 드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미련마저도 떠나 버린지 좀 되었다. 위험한 병에 걸리니 별난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이제 설사 살아서 나간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반겨 맞아주며 나를 돌보아 주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어미니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고 사랑이란 말을 깨닫기도 전인 13살에 아버지는 사망하셨느니 나에게 의지가 되어 줄만한 사람은 오직 형님 한 명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헤어진지 1년이 거의 다가오는데 그 큰 중국 땅 어느 곳에서 형을 찾는단 말인가 하는 마음에 몹시도 괴로웠고 살기도 그렇게 달갑지가 않았을 뿐 아니라 병은 더욱 악쇠를 부렸다. 그러던 중 설을 얼마 남기고 나는 사촌 형을 만나게 되었다. 사촌 형은 얼굴이 여위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먹고 싶지 않던 밥을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다 사촌 형에게 주었다. 근 6일 동안을 나는 맨 국물만 마시며 살았다. 6일 후 사촌 형은 교화반으로 입소했는데 본소에서부터 한 5리쯤 떨어진 성광장으로 올라갔다. 그때 나에게 제일 먹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당가루를 먹고 싶었다. 때마침 신입반 조장이 와서 밥을 왜 먹지 않냐고 하며 자신의 강낭 튀김 가루 중 한 80g 정도를 쥐어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밥을 먹지 않으면 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가루를 먹어보니 참 달았다. 나는 그 형에게 밥을 주었다. 그 후부터 조장과 나는 밥과 펑펑이 가루와 바꾸어 먹었다. 밥은 전혀 입에 대기가 힘들었으나 펑펑이 가루는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다. 드디어 2000년 새해가 왔다. 설날이라 이밥에 콩을 섞어 만든 가다밥을 주고 반찬은 염장 무우에 미역찬을 주었고 비지죽을 주었다. 그럭저럭 설날이라는 기분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나는 병반 선생(지도원)의 신임으로 배식이라는 탁자리에 올랐다. 일명 탁자리라고 하면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먹을 수 있는 자리(국물이라도 더 얻어 먹을 수 있는)를 말한다. 배식을 하다 보니 신입반장이 나를 보고 남은 주은 너네 배식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우리 배식은 거의 5그릇씩 나누어 가졌다. 나는 그 다섯 그릇으로 내복도 하나 바꾸고 동복을 하나 바꿔 입었다. 먹고 싶지 않은 걸 차라리 옷으로라도 바꿔 입는 것이 나았다. 나의 병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열병이 떨어지고 폐렴만 남았는데 밥이 조금씩 당기는 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밥을 먹기 시작해서 3일만에 나는 교화반에 입소했다. 나는 소지품을 다 가지고 6일날 저녁 8시경 교화반 감방 보도에 들어섰다. 내가 들어간 교화반은 xxx 반이었다. 감방은 불을 많이 떼다 보니 모두들 훌떡 벗고 있었다. 참으로 감방은 훈훈했다. 우리는 두명의 조장에게 몸수색을 당했다. 반장은 제대군인으로 규율을 세우는 놈이라 헐치 않게 생겼다. 조장 한명은 철호(가명)라고 하는 놈인데 얼굴 자체가 무서울 정도였고 허약자들을 잘 때리고 압박하는데 이골이 난 놈이었다. 다른 한명의 조장은 이름이 김철광(가명)이었는데 마음이 좀 괜찮고 허약자들을 구박하는 것을 질색하는 편이다. 나는 허약2도에 들어섰다. 담당선생은 나를 보고 감방에 남아서 절가치를 만들라고 했다. 하루에 500대씩 깎는 일이란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재료는 교화반에서 분비 나무를 한 뼘 정도씩 토막을 내서 적당히 쪼개 들여 보내 준 것으로 깎아서 절가치를 만들었다. 만들려고 보니 칼이 없어 채무지에서 철쪼각을 주어다 갈아가지고 손잡이를 천으로 감은 칼로 나무를 깎아야 했다. 금방 병을 앓고 난지라 몸을 겨우 움직이는 정도였다. 그런데 또 다시 설사병을 앓게 되었다. 그 병으로 인하여 3호 병반에 옮겨졌다. 병반에는 1,2,3호 감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3호 감방은 병세가 있는 사람들이고 2호 감방은 약을 쓰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환자들의 방이었고 1호 감방은 악을 써도 살 수 없어 오늘 밤이든 당장 죽을 환자들을 넣는 마지막 시체실이나 다름없는 방이었다. 그런데 병이 악화되다 보니 아무리 밥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일어서기조차 힘든 상황에 처하자 병반에 온지 3일 만에 나는 2호 감방으로 넘어갔다. 그때 나의 마음 속은 엉망진창이었고 미련이란 거의 사그라져 있었다. 여기에서 살아나지 못하면 나는 죽은 놈이나 다름없다 하는 생가에 밤이면 불행을 겪은 나의 지난 날을 추억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과연 죽으면 어떻게 될까? 과연 죽으면 어데로 가야 하는가? 죽어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는 있을까?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과연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드디어 죽음의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2호 감방에 온지 일주일이 되어서부터 나는 혼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뜨면 낮이고 눈을 뜨면 밤이고 정말로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변을 볼 힘이 없어 옷에 그대로 나갔고 병반 조장이 받아주었다. 음식맛을 잃은 지는 4일이 남아 되었고 2~3일에 한번씩 보던 변마저 일주일이 다가오도록 한번 밖에 보지 못했다. 변이 마려워 조장이 일으켜 앉히면 나가는 것은 변이 아니라 물이었다. 나는 일주일 되던 날부터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병반 선생은 나의 이런 경과를 보고 1호 감방에 옮기자고 했다. 맥박이 뛰는지 안 뛰는지 모를 정도로 미약했고 주사를 놓으려고 혈관을 찾아도 혈관을 찾지 못할 정도로 뼈만 남았다. 아무리 먹는 약을 써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실 교화소에서는 약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으로 살아가는데 나는 먹을 것을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는 드디어 1호 감방에 옮겨졌다. 나는 결국 병반에 온지 열흘 만에 죽게 된 것이다. 1호 병반에는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 있었는데 그 역시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었다. 그 방에 일단 들어간 사람은 여태껏 살아나온 일이 없기에 굳이 간병원이 붙어 있을 수도 있을 필요도 없었다. 단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머리맡에 미음을 놓고 나갈 뿐 한 낮에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들어온다고 하면 새벽 5시 반경에 병반 조장이 들어와서 죽었나 살았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갈 뿐이다. 1호 병반에 들어와서 새 아침이 밝아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보니 어제 함께 있던 환자가 없어졌다. 그는 이미 죽었고 그를 시체실로 내갔던 것이다. 그 1호 병반에는 불도 없었다. 초저녁부터 캄캄한 곳에 외로이 누워있어야 했다. 그러던 그날 저녁 두 명의 환자가 들어왔다. 죽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각 내 양 옆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모두가 살아있었다. 고개 한 번 돌리기도 힘든 심정이란 그야말로 뼈를 깎아냈다. 마치 지옥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연기에 그슬려 있는 꺼먼 방과 쇠찰상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니 무서움을 한층 더하는 기분이었다. 온 하루를 밥 한끼 먹지 못하고 또다시 저녁을 맞이했다. 오늘 밤은 정말 죽을까 하는 생각이 온 뇌를 지배했다. 무엇인가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간신히 몸을 들고 땅바닥에 엎디어 숫구이로 “살고싶다”라는 자그마한 4글자를 남겼다. 나는 온밤 고달픈 꿈속에서 헤매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꿈 그대로 온 몸이 떨렸다. 나는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절망에 빠진 나였다. 죽은 내가 하얗게 질려 시체실에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가져다 기계에 넣었다. 사람을 가루로 만드는 기계였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발악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정없이 나를 기계에 넣었다. 악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정신은 들었으나 차마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시각이 붉어지는 감을 느껴 나는 눈을 떴다. 3일 날 아침이 밝았고 살창너머로 햇빛이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두리에는 몇 명의 간병원 조장 반장이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은 왠지 놀라는 기색이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내가 3일 동안 살아 있었으니 잘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또 다시 악몽 속에서 허덕이다가 눈을 떴다. 왠지 양 옆에 누운 이들이 죽은 것 같은 감을 느꼈다. 손을 뻗쳐 얼굴을 다쳐 보니 그들은 굳어 있었다. 이미 영혼은 한많은 지옥을 떠나버렸고 불쌍한 육체만이 싸늘히 식은채 누워있었다. 거의 동시에 죽은 듯한 시체에 쪼각달의 뿌연 빛이 뿌리워 살을 더욱 하얗게 만들었고 나의 마음을 한층 더 무서움에 헤메이게 했다. 아무리 간병원을 찾으려고 해도 말할 기력이 없어 부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죽은 시체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 몹시도 무서워 감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할 기력도 없었거니와 그 말을 들으면 그들이 갑자기라도 깨어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온밤 나는 지나온 행복한 시간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무서운 영화나 이야기를 생각하면 금시라도 기절해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잠들었던 것이다. (계속) 2005년 12월 김혁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죄수도 인간이다.(1) 죄수도 인간이다.(2) 죄수도 인간이다.(3) 죄수도 인간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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