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긴 여정 속에서 - 이순희
동지회 17 9589 2005-12-15 14:17:21
이순희 북한인권국제대회 에세이공모 가작

집 앞으로 강이 흐르고 언덕이 보이고 뒷산은 살구꽃으로 가득하여 냄새가 온 동네에 퍼져있다. 안개 가득한 길거리를 등교하는 친구들과 손잡고 걷고 있다. 나에게 친숙한 고향은 항상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이다. 친구들도 변함없는 14살 사춘기들이다.

갑자기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고향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나 홀로 넓은 창문이 있는 방에 누워있다. 일어나서 내 주위를 들러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부엌은 없고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밥이 되고 반찬을 만드는 낮선 부엌과 고향집에 있던 텔레비전과 전혀 다른 텔레비전이 놓여있다. 내가 서있는 곳은 푸른 산이 있고 시원한 강이 흐르던 고향집 0000가 아닌 대한민국에 와있는 것이다. 잠시 멍하니 꿈속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나날들을 회상하게 된다.

나는 00에서 태어났다. 4형제의 세 번째로 태어나 시끄러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연년생인 우리 형제는 엄마가 오시는 길목 큰 바위에 모여앉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곤 했다. 언니 따라 처음 산으로 가봤고 도마뱀을 보고 기겁하며 뛰어 내려오기도 하였다. 물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엄마의 당부에도 친구 따라 강가도 놀러가 고기도 자고 수영도 했다. 나의 어린시절 간식은 사탕 과자 콜라가 아닌 감자와 옥수수 엄마가 만들어 주시는 꼬장떡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된장을 좋아하고 매운 김치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조선인으로 자라났다.

나에게는 부모님만 있으면 됐다. 친구들과 싸워서 울고 들어오면 나가서 이기고 오라시던 강한 엄마가 계셨고 튼튼한 썰매를 만들어주신 아버지가 계셔서 항상 친구들이 내 썰매에 눈독을 드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언니가 두 명이나 있어서 외롭지 않게 자랐다. 유치원에 들어가서 글을 배웠다. 글을 처음 배울 때 제일먼저 쓴 글씨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님”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선생님” 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교육은 내가 북한을 나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사는 내 나라가 제일 좋다. 세상에서 북조선이 제일 잘산다.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이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우리 민족이 잘 산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정체성은 북한의 제한된 교육아래 다져져 있었고 부모님 세대들은 이미 고착되어있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로 시작된 식량난으로 우리가족도 피해갈수 없었다. 엄마는 이리저리 쌀 구하려 다니셨고 날이 갈수록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학교를 나오지 않는 학생이 늘어났다. 선생님과 학생은 결석한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일도 많아졌다. 몸은 빼빼 말라가고 영양실조로 배만 볼록 나오는 아이들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우리가족도 하루하루 죽으로 살았다. 먹을 것을 찾아 엄마는 어디든 찾아다녔고 다치시기도 하셨다.

이러한 생활에 우리가족은 97년에 탈북을 결심한다. 나는 죽어도 가기 싫었다. 부모님 따라 가는 거라지만 나는 무서웠다. 지금까지 살던 나의 고향 나의 친구들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엄마 아버지가 없이는 살수 없었다. 14살 나에게 충격적인 그날의 탈북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게 한다. 우리 6식구는 함께 두만강을 건넜고 오라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중국 땅을 밟게 되었다.

무엇이 우리를 이끈 건 아니었다. 자유를 찾은 것도 아니었다. 오직 우리는 배고픔이었다. 다른 세상을 볼 수 없는 북한에서 제한된 보도(뉴스)로 보는 관점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족의 중국체험기는 나의 정체성과 관점을 깡그리 바꾸게 되었다. 굶지 않았던 중국 생활이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하루하루 마음 졸이고 불안에 떨면서 지내야했다. 지긋지긋한 눈칫밥과, 돈 앞에서 사람이 변한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숨어서 지내는 중국 땅에서는 희망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자유를 찾아 한국행을 결심했다. 수없는 도전을 하였다.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도 들어가 봤지만 돈 500원 받고 나와야 했다. 러시아 쪽으로 가면 갈 수 있다는 말에 추운 겨울 우리 가족은 러시아 근처도 가봤다. 그러나 한국행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무서운 러시아의 추위에 우리가족은 한국행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선교사님을 만나 일년 반이라는 시간을 성경공부를 하였다. 매일 쉬지 않고 선경 책을 읽었고 나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신앙의 또 다른 눈을 뜨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인 나에게 철없는 사춘기는 없었다. 부모님과 헤어져 지내야 했던 일년 넘는 시간은 어린시절 장난꾸러기인 내가 아닌 신앙에 불타있는 소녀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루고 싶은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공부였다. 매일 아침 마다 창문으로 등교하는 중국 아이들을 보면서 눈물 흘리기도 했다. 내 처지를 원망도 해봤고 눈을 감고 한국에 가있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 있지 아니한 상상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은 그곳에서 나가기를 결심하셨다. 비록 보호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지만 우리의 목소리와 자유가 없었다. 어디까지 우리는 숨어사는 사람인 것이다. 비록 멀고 성공한다는 확신도 없는 한국행을 우린 다시 준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와 우리는 산동성이라는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년 동안 우리는 한국으로 가는 준비를 하였다. 대사관으로도 갈수 없었고 러시아로도 갈 수 없었기에 이번에는 배로 가기로 하였다. 일본에 있는 친척이 있어서 우리는 자그마한 배를 살 수 있었다. 1999년 말쯤에 우리 6식구는 목숨 건 한국행을 시작하였다.

“아버지 이번에는 우리 갈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번에는 꼭 가야지”
“어머니 한국가면 공부할 수 있겠죠?”
“그럼... 집도 있고 숨어 지내지도 않고 맘껏 공부할 수 있다”

꼭 가야했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야했다. 경찰만 봐도 가슴 떨리던 지난 3년간은 어린 나에게 감당하기엔 너무 잔인했다. 우리는 이른 새벽 중국인의 눈을 피해 배에 올랐고 서쪽으로 남쪽으로 배를 뛰어갔다. 어느 정도 눈을 피해 배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환호를 질렀다. 이제는 가기만 하면 한국에 도착하는 것이다. 어떠한 장애물도 막을 수 없었다. 공해를 지나 한국바다에 들어서 한국 배에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날아가는 갈매기에 손을 흔들고 콧노래 흥흥 부르기 시작하였다. 배는 유유히 바다를 가로질렀다. 동이 트고 해는 점점 머리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지도 못하면서 저마다의 꿈을 꾸고 있었다. 해가 머리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 물을 퍼내는 손잡이가 고장 난 것이다. 그랬더니 고기를 담아두던 칸에 물이 차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물이 차이더니 시동이 꺼지는 것이다.

소래를 들고 들어가 물을 퍼내기 시작하였다. 시동은 다시 켜지고 우리는 바꿔가면서 물을 퍼내가 시작하였다. 저녁이 되어 우리 가족은 점점 지쳐갔다. 겨울 해는 무심하게 망망한 바다 너머로 넘어가버렸고 우리 가족은 어두운 바다에 물이 차는 배에 몸을 맡겨야 했다. 멀미를 심하게 한 엄마와 동생은 이미 기진하여 있었다. 나도 멀미를 시작하여 아무 힘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힘없이 파도에 휩쓸려가는 배에 쓰려져 있어야 했다. 저녁 파도는 거셌다. 2m 씩 들썩이었고 바닷물이 누워있는 우리 가족이 쓰려져 있는 배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구토를 하면서 배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 가면 멀미가 덜할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파도가 거세지더니 바다에 빠질 듯한 높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안돼 여기로 와 거기 위험하다” 엄마의 기운 없는 간절한 소리에 나는 조심스레 엄마 곁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바다는 더욱 거세게 우리 배를 내리쳤고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꺼먼 바닷물만 우리는 노려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바닷물에 빠지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고 살아남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엉금엉금 기어 엄마의 손을 잡았다. 우리 6식구는 동이 트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비닐을 뒤 집어 쓰고 한참을 지나 나는 잠이 들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멀미도 무서운 바다도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반기고 우리 가족은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구나! 이제는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꿈이 아니길 하나님께 기도했다. 따가운 느낌에 눈을 떴을 때 아직까지 우리는 배위에 있었고 날은 밝아 아침이 되어있었다. 나는 꿈을 꾼 것이다. 아버지는 힘을 내어 사탕 한 알을 입에 무시고 물을 퍼내기 시작하였다.

밤새 바닷물로 온몸이 젖어서 축축한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힘들었다. 큰언니가 일어나 아빠와 함께 물을 펐다. 이제 남은 건 시동을 걸어 남쪽으로 가는 것만 남았다. 그런데 시동을 걸려면 바퀴처럼 생긴 것에 끈을 감아서 있는 힘껏 당겨야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상태이기도 하고 밤새 바닷물에 시달려 있는 상태라 아버지는 힘이 없으셨다. 한번……. 두 번…….세 번…….아무리 돌려도 시동은 말을 듣지 않았다.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이어서 어느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참동안 숨을 고르시고 다시 힘을 주어 당기셨다. “퉁 퉁 퉁 퉁…….” 시동은 기적같이 되살아났고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나침판 하나에 우리는 방향을 의지하고 나아갔기에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서쪽으로 남쪽으로 방향을 향해 나갔다. 시동을 멈추면 안 되기에 우리는 물을 퍼내야 했다. 이미 절반가까이 차오른 물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퍼내도 물은 그 자리에 있었다.

오후가 되어서 언니들은 쓰러져 있었다. 이어서 내가 물을 푸기 시작했다. 물과 기름이 섞여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한 시간 넘게 물을 푸니 다리에 힘이 없었다. 정신도 혼미해졌다. 물을 퍼서 바다로 버려야 하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로 쏟아 부었다. 기름 섞인 바닷물이 어떤 맛인지 그때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 우리는 한명씩 바꿔가면서 물을 퍼냈고 다시 밤이 되어 우리는 새까만 바다에 몸을 맡기고 곤히 잠들었다.

3일째 아침은 모두 일어나 힘을 모았다. 억지로 사탕과 김치를 먹었고 노래도 불렀다. 물을 퍼내고 시동을 힘들게 걸어 다시 통통배를 타고 남쪽을 향해 갔다. 3일째 오후에 배 밑에 있는 바람개비에 밧줄이 끼우는 사건이 벌어져 아빠가 차갑고 퍼런 바다 밑에 들어가야 했다. 엄마 언니 동생 모두 숨죽이고 아빠가 나오기를 기다려야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수영을 할줄 아셔서 무사히 고치고 나오셨다. 이렇게 가다가는 모두가 위험했다. 지나가는 배도 없었고 우리를 쉬게 해줄 무인도조차 없었다. 언젠가는 배가 가라앉고 우리 가족모두 고기밥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잡고 싶었다.

가끔 저 멀리 수평너머에 큰 배가 지나가지만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하였다. 한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보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모두가 힘을 놓고 우리는 기적을 기다려야했다. 모두가 쓰러져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언니들도 어린 남동생도……. 나는 바닷물에 젖어 희미하게 나오는 손전등을 쥐고 “살려주세요!”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나님 난 죽기 싫습니다. 아직 어립니다. 살게 해주세요. 한국안가도 좋으니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탄식과 절교와도 같은 소리로 나는 살려달라고 외쳤다.

해는 이미 지고 있었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밝은 빛을 내뿜으면서 배 한척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 꺼져가는 불을 돌리면서 여기를 봐주길 원했다. 잠시 배는 넘어가는 듯 하더니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다. 그 배가 우리 쪽으로 오는 시간은 일년과도 같았다. 드디어 배가 가까이 다가왔고 쓰러져 있는 우리 가족을 하나둘 그 배에 옮겼다.

한국 사람이길 간절히 바랬다. 이 어둡고 춥고 무서운 생활이 제발 행복하게 끝나길 바랐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중국 사람이었다. 30일 동안 바다를 돌면서 골뱅이를 잡는 어부들이었다. 잠시 후 우리를 태웠던 배는 물에 가라앉았다. 한국에 가서 하고 싶었던 공부 한 가족이 모여서 오순도순 사는 꿈도 모두 배에 실은 채로 배는 그렇게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선택이었던 우리가족의 한국행은 3일간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남긴 채로 그렇게 실패하게 되었다.

우리가 탄 고기 배는 대련으로 향했다. 우리의 중국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또 다시 중국으로 가게된 것 이다. 목표도 희망도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오직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했다. 교수형을 당하기 바로 전에 살아난 기분이었다. 대련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했는지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손에 수갑을 채우고 누워있는 우리 형제를 꽉 잡고 부두에 있는 감옥으로 데려갔다.

엄마는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셨고 우리는 묵묵히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여야 했다. 엄마가 몇 시간 후에 오셨고 조선족이라고 우기라고 하셨다. 중국말도 할 줄 모르는 우리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6식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별금을 내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돈이 없었던 우리는 아버지를 내보내 돈을 가지고 오게 하고 나머지 우리는 올 때까지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혔지만 누울 수 있는 바닥이 있었다. 나에게 자유가 없지만 나는 3일간의 죽음 앞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대련 감옥의 첫날밤은 달콤하게 깊게 빠져들었다. 15일후에 아버지가 돈을 구하여 돌아오셨고 우리 가족은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또 다시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어서 배를 타고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희망에 부풀어있던 3일전과 다르게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린 채 달랑 몸 하나만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아직 어린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포기할 수 없다면서 무조건 나가서 돈을 벌라고 하셨다. 일할 수 있는 언니들과 나는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신분을 속인채로 일자리를 구해 한달에 500(6만원)원을 받고 일하게 되었다.

살아남은 우리에겐 길이 보였다. 하나둘 중국에서 익숙하게 살아갔고 남동생도 학교를 보내게 되었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신분을 속이는 일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사장의 목소리에도 놀라서 컵을 떨어뜨리기 일쑤였고 경찰들만 들어와서 화장실로 급히 가서 피해야 했다. 또래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면서 밤이면 혼자서 눈물 흘렸다.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했기에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

월급을 받는 날이면 엄마가 근처에 오셔서 돈을 받아가곤 하셨다. 엄마를 만나는 그 짧은 시간은 천국과도 같았다. 부모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힘든 중국 땅에서 알게 되었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 일년을 넘게 일했다. 우리가 일년 넘게 모은 돈을 가지고 다시 한국행에 올랐다. 남방으로 가는 차비만 가지고 죽기 살기로 갔다. 60일 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뜨거운 중국의 남방에서 보내야 했다. 두 번씩 잡히기도 하였지만 우리 가족은 지혜롭게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배에서 보냈던 3일을 보상 받기라도 하는 듯 2001년 꿈에서 보았던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도 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면 눈물이 나온다. 그리고 3일 동안 내가 간절히 찾았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봤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었다. 내가 살아야만 자유도 평화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5년 12월 이순희

자료제공 : 데일리엔케이
좋아하는 회원 : 17
고담녹월 태기산댁 동자산삼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sansam3424 2005-12-15 16:19:27
    이순희씨 정말 감동 깊게 읽었네요.
    생명의 귀중함은 김정일이건 그누구건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순희씨 가족을 소중하게 쓰시기위하여 시련을 주신것 같네요
    주님 안에서 가족들 모두 행복 하기를 기원 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이민복 2005-12-23 12:56:54
    나도 그쪽 동네 사람입니다.
    내동생같아서 눈물을 흘리며 잘 읽었어요.
    생명을 지키는 믿음을 가지고 꼭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a href=mailto:leejnk@hanmail.net>leejnk@hanmail.net</a>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미은이 2005-12-26 17:40:31
    잘 오셨습니다...행복하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서울시민 2005-12-27 18:41:29
    님의 글을 보고 너무 감동 받았습니다. 전 한국에서 자란 30대 직장인이지만 제 삶을 돌이켜 보니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네요.. .. 자유를 찾아 오신 이 땅에서 바라던 것을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님과 같은 분들이 더는 없으시도록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꼭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건승 2006-02-19 11:38:01
    쇼생크탈출이란 영화가 있지요. 악질범들만 수용한다는 지옥같은 교도소 쇼생크에서 복역 중인 '앤디 듀프레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죄임을 주장하는 선량한 그는 쇼생크에서의 참혹하고 악몽같았던 경험들을 뒤로하고 복역 19년만에 쇼생크를 탈출합니다. 극악범만 수용한다고 알려진 쇼생크는 부패하고 비리를 일삼는 교도소장과 간수들의 왕국이었고 차라리 복역수들은 최소한의 자유 속에서 스스로 사람임을 확인하며 살려하는 '인간'들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주인공 앤디가 죽기를 각오하고 교도소 전체에 음악을 크게 방송했던 장면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곡이었습니다.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 아름다운 선율이 메마른 교도소를 촉촉히 적시는 것 같았습니다. 앤디는 불과 몇 분 후 간수들의 몽둥이 찜질이 날아올 것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지만 노래를 듣는 잠시나마 눈을 감고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표정으로 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곧 간수들의 모진 매질과 함께 독방에 수감되었고 이러한 경험들은 앤디의 탈출에 대한 의지를 더욱 결연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저들이 지상의 낙원이라 말하는 북한.. 단 한 순간이라도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인가요? 아니.. 인간이 살기에 쇼생크 교도소 보다 북한이 조금이라도 나은 곳인가요?)

    이후 교도소를 무사히 탈출하여 멕시코의 어느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살고 있는 앤디에게 교도소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인 '레드'가 40년의 복역을 마치고 찾아 왔습니다. 그 만남의 장면에서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 두 사람의 극적인 재회 처럼 여러분도 잃어버린 가족, 헤어진 친구를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시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탈북자 수기를 읽다가 갑자기 오래전 보았던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는 것은 이곳에 수 없이 많은 '앤디 듀프레인'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힘 내시고 남한에서 정말 아름다운 삶 가꾸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앤디는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교도소의 벽을 긁어내었고 드디어 19년째 되던 날 세상과 단절시키고 있는 교도소의 벽을 뻥 뚫어놓고 말았답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아주 조금씩 성공을 향해 다가 가시기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골목길에서 2006-03-14 15:08:33
    정말 대단들 하십니다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존경스럽기 까지 하내요
    모두들 힘내시길- 그리고 행복하시길...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나암 ip1 2016-06-08 11:02:58
    순희님 정말 잘오셨어요,,,,대한민국운 당신과 가족을 사랑합니다,,,,,^^ 꿈을 이루시고 기적을 꼭 만드시길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태기산댁 ip2 2017-01-14 08:35:38
    어린나이에 너무큰 삶의 고통들을 겪으셨네요
    머리숙여집니다 ...
    앞으로의 삶이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더욱 행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댓글입력
    
이전글
두가지 악몽 - 한영수
다음글
핑크빛 사과 - 김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