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에 대한 생각 - 김춘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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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저문다.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한일 없이 먹었다 싶은 쉰다섯 살의 나이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세상에 와서도 때 없이 찾아드는 감기, 몸살도 걱정이다. 20대 초반, 여성고사총 중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때, 신체조건을 따지지 않고 피를 뽑았던 것이 지금까지도 허약한 신체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1974년 3월 1일,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북한의 (지방주권)선거철을 맞아 군중무용연습을 하고 있었다. 3월 4일이 선거 날이기 때문에 소대와 중대, 대대의 모든 일정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대대 정치지도원의 “집합”구령이 떨어졌다. 대대가 운동장에 모두 정열하자 “피 형이 O형인사람들은 대렬 20보 앞으로 갓”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도 초개같이 바치겠다던 나, 더욱이 갓 소대장으로 임명된 내가 대대 정치지도원의 명령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와 또 다른 중대의 몇몇 지휘관, 그리고 병사들이 한 걸음씩 대열 앞으로 나섰다. 대열 앞에 나서서 들은 사연인즉 대대 통신소대 전사 한명과 소대장이 명령 수행 중 3도 화상을 입었다는 것 이었다. 어떠한 명령 수행중이였으며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대대 정치지도원이 명하는 대로 운수차를 타고, 부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황해북도 신계군 인민병원으로 실려 갔다. 가면서 들은 이야기지만 두 군인이 “김일성동지혁명력사 연구실”에 걸려있는 도록 판 도색작업을 하다가 화재가 발생, 초상화며 도록들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려다가 심한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화재와 같은 재해 상황에서 김일성의 초상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높이 평가되던 시절이어서 ‘드디어 우리 대대에서도 영웅들이 탄생 하는구나’고 감탄하면서도 그들을 위한 수혈 때문에 선발되었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나야말로 군관학교(사관학교)신체검사를 겨우 통과한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급박한 환경은 “허약한 체질”따위를 운운할 수 없게 했다. 병원에 당도하자 마차 피형 검사가 시작되었고, O형으로 확인된 남성군인 다섯 명은 각각 200그램씩의 피를 뽑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여성군인 세 명은 첫날 300그램, 이튿날 또 다시 200그램을 뽑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여성들의 경우에는 체내에서 피가 자체생산 된다는 군의관의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병원이라서 준비된 혈청이 없는가’고 했더니 군인들의 전속병원인 “군의소”는 더한 실정이라는 것 역시 동행한 대대 군의관의 설명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막강한(내 생각으로는)피를 수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신소대의 전사는 일주일도 채 못 넘긴 채 수명을 달리하였고 소대장도 보름 만에 끝내 사망하고 마는 “슬픈 사태”가 벌어졌다. 사망자들의 시체가 부대로 되 실려 오고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고 부대를 찾아온 고향의 부모들께는 “아들의 영웅적 소행”이 장황하게 설명되었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수혈을 한 이튿날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부대에서는 군관들의 월급을 떼어 수혈에 참가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영양보충을 실시하였으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압박감에 시달리던 나는 그해 6월의 농촌지원전투장에서 저혈압증상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특별한 대책과 “약”이 없었다. 그 후로는 줄 곳 빈혈증 증세로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끝내는 중대장 진급을 앞둔 1980년 가을, 제대자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제대후 어느날, 임신중이던 내가 또다시 빈혈증세로 평양의 한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여자들이 자체로 피를 생산한다는 말이 어느 사전에 있는가”고 군의관들의 무지를 꾸짖는 것이었다. 속았다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대한민국-서울에 왔는데, 와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몸에는 활동에 필요한 충분한량의 혈액이 있고 매일 일정한 량이 새로 생기기 때문에 건강한 성인의 경우 320~400그램 정도의 헌혈은 오히려 건강에 이롭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헌혈을 통하여 새로운 피를 공급해줌으로써 자신의 몸에 활력을 줄 수 있다니! 도대체 북한 의학에 상식이라도 통하는지가 궁금했다. 이곳 남한에서는 그렇게 흔한 헌혈을 북한에서는 왜 그렇게 두렵게 생각하는 것이며 영양보충을 시켜준다, 만다 하면서 난리를 피워대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기초 영양상태가 하도 좋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취해지는 조치라고 미루어 짐작은 하지만 인생자체가 혼란의 연속이었던 과거에 대고 더 이상의 할 말을 찾을 수도 없다. 바램이 있다면 김일성의 초상화 따위를 위해 죽기조차 각오하는 북한의 군인들, 그리고 주민들이 이제라도 제 정신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2005년 12월 김춘애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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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된 표현이지만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네요.
님의 건강을 빌어 드립니다.
건강하세요...행복하세요...열심히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