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죄수도 인간이다.(6) - 김혁
동지회 16 8804 2006-01-13 09:46:09
김혁 전거리교화소 경험자 2001년 9월 입국

[1993년 3월부터 2000년 7월 6일까지 7년 4개월동안 가장 힘들었고 미래와 인권까지도 박탈 당해야 했던 쓰디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다음날 4일 째 되는 아침 병반 조장과 간병원이 시체를 내갔다. 병반 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무엇인가 먹고 싶었다. 나는 선생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선생은 놀랍다는듯 나를 바라보더니 뭘 먹고 싶은 가고 했다. 나는 미음을 먹고 싶다고 했다. 선생이 나가고 2시간이 지난 후 미음이 들어왔다. 나는 파를 섞어 쓴 미음을 한 그릇 다 먹어버렸다 더 먹고 싶었지만 배가 허용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 세끼 미음을 먹으며 1호 감방에서 시체와 함께 지냈다. 매일 죽어가는 시체를 옆에 두고 잠을 잤고 담가에 실려 나가는 시체를 보며 아침을 맞았다.

그렇게 5일을 지내고 드디어 2호 감방으로 옮겨졌다. 사체의 감방에서 근 열흘 만에 죽음에서 살아났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밥맛이 돌았고 나중에는 3호 감방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한번 죽음을 면한 인생은 살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죽어도 값이 없는 인생이기에 값있게 죽고자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나는 죽음에서 살아나온 기적을 냈던 거이다. 나는 1달이라는 병반 생활을 끝마치고 드디어 3월 초에야 교화반에 들어왔다. 서로가 살아난 데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는 알지 못해도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되어 죽음을 떨쳐 버리고 살아날 수 있는지를 그런 강렬한 힘이 어데서 나왔는지를 오늘날 나는 깨달았다.

담당선생은 나를 보고 절가치를 깎으라고 했다. 병반에서 금시 나왔기에 좀 쉬며 하라고 했다. 하지만 죽음까지도 이겨낸 내가 쉰다고 괴로움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괴로우면 괴로웠지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조장인 철호가 교화반 허약자들을 압박하기 때문이었다. 교화소 내에서도 살찐 놈은 허약자의 마음을 다 모른다. 그것은 그가 그 상황에 처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압박 받는 허약자들의 심정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철호는 자신이 허약자들을 어떻게 죽음까지 몰아가는지도 모르고 구박한다. 허약자들은 모든 신경이 세밀할 뿐 아니라 남의 구박에 약해지고 심지어 살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지는 것이다. 허약자들과 살찐 놈들과의 사이는 마치 고양이와 쥐 사이였다. 마치 자신들이 허약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때리고 억압하는 철호는 승냥이였다.

사실 그들은 교화반에 내려진 과제를 하느라고 힘든 것도 있다. 하지만 허약자들도 놀지 않고 절까치를 깎아 4급 밥이라도 먹는다. 물론 그에게 반말하기도 모두가 꺼려할 뿐만 아니라 반장까지도 얹혀사는 판이니 누가 반장이고 누가 조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 교화반에서 나와 함께 입소한 2명이 그의 압박과 몰매에 맞아 병반에 옮겨진 후 죽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식도 있고 아내도 있는 한 가정의 기둥들이었다. 그나마 남았던 한명은 구박에 이겨내기가 힘들어 병보를 받고 나가던 도중 교화소 1호 정문을 통과하다가 감정타격으로 죽고 말았다. 사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한 날 한시에 입소한 24명중 나와 한명이 살고 22명이 억울한 세상 저주스러운 지옥을 보며 만나지 못한 처자 부모들을 생각하며 죽었다. 그 중에서 살아난 나 역시 운이 좋은 놈이었다. 전과자들과 교화소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1996년~97년 중순까지 죽은 사람 수는 무려 천 여명을 초과한다고 했다. 1년이라는 자그마한 세월 속에 천 여명의 영혼이 산지옥을 저주하며 떠나갔다. 사실 그때라면 나 역시도 이들 속에 끼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이런 수는 절대 다수가 먹지 못해 죽은 것이다. 먹을 것이 있어야 살지 않겠는가. 조막떼기 만한 밥을 먹으며 살라고 해도 살아날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면식에 매달리거나 취사장과 거래하거나 교화소 돈이 있었기에 살았을 것이다. 사실 교화소 돈이라면 담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연약한 자는 죽과 살찐 놈은 체통을 믿고 허약자들을 졸라대니 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철호는 늘상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자신의 신발을 따뜻한 곳에 놓고 그 자리에 있던 허약자를 밀어내고 자신의 신발을 말리려는 것이었다. 밀린 자는 허약자였다. 그는 너무도 추워 신발을 앞에 놓고 기대어 앉았다. 이것을 본 철호가 달려들어 일도 안하는 주제 일하는 사람 신을 밀어 낸다며 다짜고짜로 몰매를 퍼부었다. 이런 행위를 본 나는 분노감이 치솟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그가 나를 보더니 걸레를 들고 방바닥을 닦으라고 했다. 내가 닦으려고 걸레를 쥐는 순간 발이 나의 목을 걷어찼다. 나는 그만 땅에 쓰러졌다. 발이 사정없이 내 허리며 다리를 밟아 놓았다. 그는 철호였다. 코피가 흘러나왔고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담당선생이 감방에 들어와 있었다. 채 나오다 만 피가 코에 엉켜 있었고 담당 선생은 어찌된 일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다른 허약자들은 감히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만하면 철호가 또 다시 들어와 앙갚음을 하기 때문에 매가 두려워 말도 못했던 것이다.

나는 감방에 떨어진 11~13명 정도의 허약자들의 병상태를 관리하는 관리자였기에 숨겨둘 필요가 없이 허약자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 말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엉엉 울며 여태껏 쌓여온 슬픔을 선생에게 다 말했다. 어느날에는 철호가 누군가를 때려 피를 보게 했고 이유까지도 시간까지 따져가며 다 말해 버렸다. 내 나이가 어리다보니 선생은 나를 감싸주곤 했다. 교화소적으로 17살짜리는 몇 명 안되다보니 선생도 관심을 주었다. 나는 선생이 나간 다음 절을 깎기 시작하는데 철호가 완전히 쪽을 못쓸 정도로 반 쪽이 되어 들어왔다. 얼마나 매 맞았는지 눈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나의 마음은 왜서인지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당연한 매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아무말 없이 따뜻한 그들목으로 올라오더니 허약자들을 다 밀어내고는 자기가 거기에 누웠다.

그렇게 점심이 지나가고 저녁이 되어 교화반이 입감하고 선생도 퇴근한 뒤였다. 아무말 없던 철호가 일어서더니 나에게 물어먹는 새끼라며 주먹으로 치고 바로 걷어차며 때리기 시작해서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이 막 혼미해지는 감을 느꼈다.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담당선생이 들어서자 나는 어제 밤에 일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러며 나는 선생에게 나도 일하고 싶다고 했다. 반장이라는건 말리기는 고사하고 일안하는 주제에 일 잘하는 사람을 물어였는다면 짝짝쿵하는 것은 정말로 보기 싫다고 했다. 선생은 살점 붙은 놈이 몇이 안되다보니 그들을 때려 일 못하게 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계속 매맞는 것을 볼 수도 없고 해서 승낙했다. 떳떳히 일해서 뒤소리 즉 일 안한다는 말을 듣지 말라고 했다.

그 다음날 나는 교화반과 함께 출력하려고 앞마당에 줄을 지어섰다. 이때 철호가 나를 보더니 너는 왜 나오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이 나오라고 했다고 당당하게 맞섰다. 절대 주눅이 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철호가 한다는 소리가 부식을 먹기 위해서 나오려고 한다며 들어가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반장은 나를 증오의 말을 못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깡자로 번호까지 부르고 대렬을 따라 교화반 사무실에 들어갔다. 선생은 나무를 끌겠으니 끌바와 도끼를 다 준비하라고 했다. 선생은 나를 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러는 선생이 정말로 고마웠다. 하지만 나무 끌기란 말처럼 쉽질 않았다. 평길도 500m 정도를 걸으니 다리가 비틀어졌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45도의 경사가 시작되자 처음부터 나는 발을 내디디지 못해 뒤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생은 반장을 시켜 나를 제일 앞에 서게 하고 반장이 나를 밀어주게 했다. 그렇게 약한 경사도 나는 눈에 푹푹 빠지며 손까지 동원해서 기어올라갔다. 선생은 허약자 7명 정도를 산마루에서 나무하게 하고 계호원 두명을 붙여준 다음 나머지 인원을 이끌고 산마루를 넘어갔다. 우리는 불타거나 마른 통나무를 잘라다 조제하고 끌바를 맨 다음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안하던 일이라 통나무가 나보다 더 빨라 나의 다리를 치는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철호가 훈계하지 못하게 남이 하는 일만큼은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그들이 나를 감히 밥벌레라고 말 못하게 말이다.

1년 만에 강도 높은 일을 하고 나니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오후에는 나무하러 가기조차 싫었다. 너무다 다리가 떨려서 해낼 것 같지 못했다. 하지만 철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악을 쓰며 가기로 결심했다. 입감하고 감방에 들어오니 온몸이 나른해 졌다. 뼈만 앙상한 몸이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뼈가 쑤시는 감도 나른한 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나를 철호에게 보이기 싫었다. 왠지 마음은 기뻤다. 육신은 힘들지만 마음은 훨훨 날 것만 같았다. 나는 반장과 철호의 미움을 쌓으면서도 일주일을 견디었다. 한 겨울이라 추었지만 나무를 끌고 나면 더웠다. 살진 놈보다는 작은 나무를 끌지만 내 체격에 맞는 나무를 끌기에 그들이 욕을 하려고 해도 적당치 안은 욕이었고 오히려 나한테 건덕지를 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아침 청소를 잘하지 않는다고 허약자를 때리고는 나에게 손질하며 내가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감방에 떨어진 사람들이 하게 되어 있는 일이었고 그에게 쥐어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버티다가 다른 일을 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도 악이 받혀 나는 비서 선생에게 말하겠다고 했다. 마치 아이놀음 같았지만은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나로써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떨면서도 말하라며 더 세게 때렸다. 그 광경을 본 선생이 달려와서 큰 몽둥이로 철호를 사정없이 때렸다. 죄수에게 누가 때릴 권리를 주었냐고 너를 보위과에 넘겨 가형을 받게 하겠다며 쓰러진 철호를 사정없이 때렸다. 얼마나 성이 났는지 선생은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때려 놓았다.

그 다음날부터 선생은 나에게 감시라는 권력을 주었다. 일단 감시라고 하면 선생님에게 신임 얻은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감시는 일하는 도중 도주자를 잡아내는 일과 교화반 사람들이 휴시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범칙하거나 다치지 못하게 통제하는 것이 감시였다.

낮이면 내가 다루는 세상이었다. 나에게도 인제는 조장까지도 감시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감방 안에서는 조장에게 눌려 살 수 있지만 일하러 나갈 때부터 저녁 입감하기 전까지는 내가 조장을 내가 조장을 다스릴 수 있었다. 조장 철호는 범칙하러 자주 다니므로 나에게 쪼들릴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범칙이라면 자신의 물건이나 또는 담배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며 다른 교화반 사람들과 바꿔치기를 하러가는 것이었다. 교화소 내에서는 그런 금지 대상을 범칙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권력을 가지고 허약자들의 원을 풀어주기로 결심했다. 나는 역전에랑 나갈 때면 점검을 하고 이름 점검을 했고 산에 올라갈 때는 번호 점검을 불렀다. 어떤 때는 철호가 점검을 제대로 부르지 않아 계호원에게 매맞을 때도 많았다. 그럴때면 나는 허약자들과 그에게 원하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용사마냥 마음이 기뻤다.

사실 우리 교화반에는 47명 정도의 인구가 있었다. 실제 허약 1도부터 다 계산한다면 40명 정도가 허약 1도를 넘어섰다. 거의 50%가 허약 2도이고 비들비들하는 도는 5~7명 정도로 되었다. 사실 허약 2도들이 일하는 것은 거북이 같이 느렸고 몹시도 힘들어 했다. 그들도 인간인 까닭에 매맞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악을 쓰며 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에 힘을 다 빼고 나면 폭싹 주저 않기 쉽다. 시름시름 앓다가 병반에 옮겨지고 병반에서 죽어가는 그들은 참으로 가엽기 그지 없었다. 반쪽이 된 몸과 초점이 거의 풀린 눈으로 그 무엇을 기대하는 듯 그렇게 초라해 보였다. 그 시체들은 어데로 가는가? 한 인간의 박대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과연 어데로 가는지? 의문스러운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죽으면 2 평방 메터 밖에 안되는 나무 창고로 옮겨진다. 육신을 잃은 영혼은 죽은 시체로 인해 가슴을 앓을 것이다. 그 시체들은 그 창고에서 20~30명씩 모아 놓은 다음 뜨락또르나 차에 실어 내간다. 내갈 때는 문제가 아니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한달 씩 머물러 있던 시체가 한여름 같은 경우는 살이 썩어 구데기가 온몸에 쓸고 그 시체를 들어 낼 때마다 썩은 살 덩어리가 뚝뚝 떨어졌고 결국은 뼈를 쥐고 간신히 싣는다. 살은 뭉크러지다 못해 떨어지고 시체가 흔들릴 때마다 구데기가 살 속을 헤집고 나왔으며 고약한 냄새는 본소 마당을 질색할 정도로 휩쓸었다. 이때 가장 예감이 빠른 것은 교화소 까마귀였다. 교화소에는 꿩이나 메돼지나 산짐승들이 없었다. 산새는 묘하나 짐승은 그림자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오직 존재하는 새는 까마귀 하나 뿐이었다. 시체를 내가기 시작할 때부터 그 시체가 불망산으로 옮겨져 화로 안에 들어갈 때까지도 계속 운다. 까욱하는 소리는 죄수들에게 슬픔과 기쁨을 주기도 한다. 난데없이 까마귀를 보면 면회 오거나 운수 좋은 날이었고 그대로 좋은 일이 생길 때가 많다. 하지만 까마귀 무리가 교화소 본소에 날아들 때는 영혼이 떠나간 시체를 꺼내서 불망산으로 가져간다는 신호나 같았다. 그런 시체들은 불망산에서 재가 되어 가라앉고 연기도 날아가는 것이었다. 겨울 같은 때라면 꽁꽁 얼어붙은 시체는 하얗게 되어 금시 죽은 사람 같았고 부릅 뜬 눈에는 그 무엇에 한을 품은 상 싶었고 그 시체를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그 시체를 통나무 마냥 던져 싣고 불망산으로 가져갔다.

교화소에는 이런 얘기가 있었다. 부모 자식이 그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끌리지 않아 운다는 것이다. 반쪽이 된 몸으로 통나무를 끈다는 것은 사회에서도 힘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통나무를 부둥켜 안고 울고 있을 죄수의 마음이란 참으로 비참하고 불쌍한 것이었다. 끌지 못한다고 선생은 발로 차고 나무로 때리고 악을 키워주려는 선생이었지만 죄수는 그런 악이 오히려 저주를 초래했다. 전거리 교화소의 골짜기는 수많은 영혼들의 원한이 들어 있는 곳이었다. 담배는 일명 교화소 돈이라는 말을 내가 앞서 한 적이 있다. 담배는 교화소에서 절대 금물이었고 교화소 법대로 처리한다면 면적이 1m밖에 안되는 독감방 최고 일수 일주일이 아니면 더 과하게는 가형까지 먹을 수 있다. 일명 가형이란 교화소 내부에서 범칙한 죄수들이 예심을 다시 해서 본형에다 범칙의 형기를 더 받는 것을 가형이라고 한다. 그렇게 가형을 먹으면 산 사람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형으로 인해 20여년을 산 사람도 있었다. 가형이란 무서운 연장형이었다.

(계속)

2005년 1월 김혁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죄수도 인간이다.(1)
죄수도 인간이다.(2)
죄수도 인간이다.(3)
죄수도 인간이다.(4)
죄수도 인간이다.(5)
좋아하는 회원 : 16
사는게뭔지 고담녹월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한마음 2007-01-31 22:41:20
    나와 거이비숱한 길을 걸어왔온것같습니다 한번 만나봐웟으면좋겠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한마음 2007-01-31 22:42:37
    정말 죄아닌 죄를 쓰고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천사소녀 2008-01-07 02:16:04
    어떤분인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나이도 나랑 비슷하군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나는북한사람이다 ip1 2014-04-08 00:07:07
    저도험한길.....ㅋ.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어느 한 아줌마의 정착이야기 - 이영희
다음글
택배는 제게 맡겨 주십시요 - 이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