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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의 일기 - 김희선
동지회 23 10436 2006-02-27 16:27:20
북한의 식량난 시절, 일본의 북한인권단체 RENK가 중국에서 보호했던 김춘식, 김희선(가명) 남매가 겪은 굶주림과 탈북 그리고 중국 생활에 대한 수기

① “내 이름은 김희선입니다.”

내 이름은 김희선, 올해 14살입니다.
1986년 북조선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지금 학교에 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바깥에 나갈 수도 없습니다.

2년 전 겨울, 오빠와 나는 단 둘이서 몰래 두만강을 건너 왔습니다.
두만강은 북조선이 끝나는 곳에 있는 강입니다.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게 된 것은, 북조선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두만강을 건너 도착한 중국은 참으로 큰 나라입니다.
이렇게 큰 중국에서라면 조선에서처럼 굶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에 붙잡히면 북조선에 되돌려 보내기 때문에 언젠 숨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얼굴만 봐서는 북조선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렵지만, 말을 시켜보면 중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당장 의심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일매일 열심히 한자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어야 되니까 지루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도 공부를 하다가 조금 지쳐버렸습니다.
‘처마 밑에 있는 새끼 제비들은 건강하게 잘 있을 까……’
급히 생각이 나서 며칠 만에 집밖에 나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 처마밑에 살던 새끼 제비들이 없어진 것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가을이 오니까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하늘을 나는 연습을 하러 갔나? 옛날에는 우리들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는데…… 제비는 좋겠다. 나도 제비처럼 날 수 있다면 외국에라도 날 아갈 수 있을 텐데…… 외국에만 갈 수 있다면 이렇게 무서워하면서 숨어살지 않아도 되는데…… 학교에도 갈 수 있고……’

중국에 와서 두 째 맞는 가을입니다. 두만강을 건너 이 나라에 온 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와 오빠는 그 언제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될까요?

② “어머니 다녀오세요”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1991년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잠깐 여행 가시는 길이니까 곧 돌아오실 거다.”

옆집에 살던 할머니께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다녀오세요~”라며 손을 흔들어 묘지에 가시는 어머니께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열흘 수에 돌아오신다던 어머니는 열흘이 지나도 10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매일 매일 울면서 뜰 앞 담장 밑에 앉아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어머니가 늦으시네…… 아직 돌아오시지 안으니……”

나는 아버지께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며 물었습니다.

“어디에 들렀나보다~ 내일이나 모래쯤에는 돌아오시겠지.”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자연스럽게 ‘어머니는 이제 영원히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는 나를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그토록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지만,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을 때 그다지 슬프진 않았습니다. 아마 오빠의 마음도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둘 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군장교였던 아저씨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어서 별로 슬픈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곁에 계셔서 늘 즐겁고 기뻤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제일 좋아했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셨기 때문에 어머니 없는 설움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이죠.

③ “아버지의 큰 부상”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고속도로 작업을 하던 중 사고가 일어나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날씨가 추워지자 상처 입은 곳이 동상까지 걸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병세가 심해져서 평양의 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아직 어린 우리들은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외숙부님의 집에 맡겨졌습니다. 그 외숙부님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맡아줄 다른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오빠와 나는 집에 있던 텔레비전과 다른 짐들을 싸서 숙부님 집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은 신안주시에 있는 숙부님 집에서 멀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는 아버지를 만나러 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남매는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없어서 슬펐지만 숙부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써 섭섭한 마음을 참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 왔습니다.
우리들은 아침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나는 말했습니다.

“아버지 빨리 낳으셔서 집에 돌아와 나랑 같이 놀아줘요!”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뜨시며 대답대신 머리를 숙여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아버지의 부상이 빨리 나을 수 있는 것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곧 돌아오실 것이라고만 믿었습니다.

④ “뜻밖의 이별”

그 후 오래간만에 병문안을 간 우리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말라 마치 뼈와 가죽밖에 없는 「귀신」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몸을 만져보니 차가워서 소스라쳐질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나와 오빠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발의 동상이 악화되어 발이 점점 썩어가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내버려두면 몸 전체가 썩어 아버지는 죽어버린다. 그래서 나빠진 한쪽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단다???”

병문안을 가기 전에 아버지의 친구인 군인 한 분이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발이 잘려 없어진다는 말에 크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생명이 더 중요하고, 발을 자른 후에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른 다리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아버지가 덮은 이불을 들쳐보려고 했더니, 아버지는 가만히 이불을 누르고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 울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불 안에서 손을 꺼내어 가만히 우리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여기 찾아오는 것은 그만두어라. 아버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

오빠는 놀라서 말도 못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안돼요,그런말씀 하지마세요~”

나는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떻게든 아버지 기분을 북돋아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계셨습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우리들의 어깨를 잡고 병실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안돼요, 아버지를 이대로 놔두고 갈 순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 둘은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오빠와 나는 울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만남이 우리 남매와 아버지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금도 마지막에 만나 뵈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엄하게 우리를 돌보시면서 우리들이 슬픈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놔두고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셨을까?’

그때의 아버지 기분을 생각하면 슬퍼서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남매는 숙부님 집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와줄거라는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친척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내 집에서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숙부님과 숙모님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어린 우리들에게는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개월 되지 않을 때부터 먹을 것과 일용품의 배급이 중단되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 먹을것이 줄어들어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어린애들인 우리들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숙부님 집의 생활도 점차 힘들어졌습니다. 언제든지 한 그릇은 먹을 수 있던 강냉이(옥수수)밥도 이제는 반 그릇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지나자 양은 더 줄어들어 한 줌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 한줌의 밥마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후로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모님은 꼭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희선아~ 들에 가서 풀 좀 뜯어와.”

나는 큰 바구니를 가지고 들에 나갔습니다. 양식을 대신할 풀을 뜯어야 했습니다. 냉이, 미나리, 쑥???

처음에는 보통 먹을 수 있는 풀만 골라 뜯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뿐 아니라 이웃에 살던 사람들도 이런 풀들을 뜯으러 오기 때문에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풀은 잠깐 사이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먹을것이 없어지긴 어느 집이고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어떤 풀이든 닥치는대로 뜯게 되었습니다. 뜯어온 풀은 강냉이죽에 섞어서 먹었습니다. 강냉이밥을 먹지 못하게 되면서부터는 강냉이를 죽으로 끓여서 먹었습니다. 그러다 그 강냉이 마저 바닥나고 말았기 때문에 죽에 풀을 섞었는지 풀에 죽을 섞었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훗날 생각해보면 그것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풀죽 조차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으니까요.

⑤ “어린 거지”

그 무렵 역전 앞 장마당(시장) 길거리 여기 저기에는 낮부터 방황하는 `거지 아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나하고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다녔습니다.그런 모습을 보는 건 참 슬픈 일이었습니다.

애들은 학교에 가야만 되는데, 먹을 것도 없는 판에 학교에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집 안에만 우두커니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대로 가만히 굶고만 있으면 곧 죽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낮부터 밖에 나와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걸하기도 하고 시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먹기도 하고, 팔고 있는 물건을 훔쳐 먹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엔 정말로 집이 없는 고아들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먹을 것이 없다 보니까 어른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먼 곳까지 떠나버려 아이들만 집에 남은 것입니다.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어른들 중에는 먹을 것을 구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무슨 봉변을 당해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점차 보살펴줄 이 없는 고아들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집에 남은 애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구걸도 하고 주워서 먹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작은 거지들이 늘어났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같이 시장 근처를 걸어가고 있는데 숙모님의 얼굴이 눈에 띄었습니다. 숙모님은 언제나 “장사를 하고 온다”고 말하면서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고는 며칠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물건을 갖고 나가서 그것을 시장에서 팔아 그 돈으로 먹을 것을 사 오시곤 했습니다.

숙모님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에 “숙모님이 돌아오셨구나” 하면서 다가가려고 했는데, 숙모님은 양손에 떡을 하나씩 쥐고 두 볼 가득히 쩝쩝 소리를 내며 떡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나니 숙모님이 마치 짐승같이 보였습니다.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숙모님을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하고 나는 그 장소를 슬그머니 떠나고 말았습니다.

⑥ “ 단 하나의 꿈”

언제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도 나는 인민학교(북한의 4년제 초등학교를 말함)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다니려고 했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다니는 애들도 많았는데 전부 오전 중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만 수업을 받고 집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많은 애들 중에서 내가 제일 영양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비틀거리니까 친한 친구들 몇 명이 강냉이를 몇 알씩 모아서 나에게 준 일도 있습니다.나는 구걸 같은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돈을 벌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양부족으로 병에 걸린 적도 있었고, 여러 날 동안 누워서 배가 고픈 것을 참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굶어 죽어도 할 수 없다. 그때는 그때…’라고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지경에서도 내가 계속 학교에 나갔던 것은 장래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진학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병에 걸려 있을 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3학년 때 월반해서 4학년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세상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만 한다고 해서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그 상황 속에서 공부로 꿈을 이루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마음먹은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꼭 꿈을 실현해 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꿈을 이뤄 보았으면 합니다.

⑦ “오빠의 방황 ”

고등중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어 6년제의 학교를 말함)에 진학한 후부터 생활이 더 힘들어졌습니다. 먹지 못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숙모님은 나를 소나 말과 같이 부려먹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저것 마구 일을 시켜 쉴 틈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들판에서 풀을 뜯으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숙모님이 시키는 일들을 하느라 시간이 없어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는 성적 같은 것은 신경쓸 수도 없었습니다. 배가 고파 쓰러지기 직전의 나를 그래도 버텨주고 있는 것은 장래의 꿈뿐이었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서 그 꿈에 다가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주 학교를 빠지고 수업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자 나중에는 시간이 있어도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학교 가기가 싫어진 것입니다.

1996년 9월에 고등중학교 2학년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진학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희망을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진다면 살아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삶을 떠받쳐줄 수 있는 희망만 있다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망밖에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굶주림을 참으면서까지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빠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니 오빠는 나보다도 세상일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절망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 없는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오빠는 점점 더 나빠져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여기 저기 친구들과 방황하면서 나쁜 짓만 해서 숙부님한테 욕을 먹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학교에 나가게 되면 수령님(당시 북조선의 원수 김일성을 말함)의 초상화에 손상을 입혀 학교 전체가 들썩거리도록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오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른스럽지 못한 오빠의 행동 때문에 나까지 숙부님 눈치가 보여 어깨가 좁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숙부님을 볼 때마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⑧ “이대로면 죽고 말아요”

그 해 12월, 숙부님의 집에 와서 만 2년이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마침내 우리 남매는 숙부님의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귀찮은 존재라는 것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가족들만 있어도 먹을 것이 없는 판에 한참 커 가는 애들이 둘이나 불어난 것이니까요. 게다가 숙부님 집의 형편도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2년 전에 갈 곳 없던 우리들을 데려다 길러준 숙부님입니다. ‘그런 숙부님이 우리들에게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숙부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배고픔이란 사람의 마음을 놀라울 정도로 쉽게 변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배낭하나 술 두 병, 주먹밥 두 개.그것이 숙부님 집에서 나올 때 우리가 숙부님한테서 받은 짐 전부였습니다.술은 팔던가 먹을 것과 바꿀 때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 남매는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의 어느 굴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땅에 널려있는 콩과 고구마의 부스러기, 배추의 뿌리나 잘린 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다녔습니다.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이 ‘불쌍하다’며 먹을 것을 가져다 준 적도 있습니다.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양이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는 형편에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분들의 친절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굴 속에서 살게 된 후부터 우리 남매는 부글부글 살이 찌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배가 고픈데 왜 그럴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영양실조에서 온 증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저 기분만 나빴고, 이제는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배가 고픈데다 굴 안에서의 생활은 몹시 추워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럭저럭 한달 정도는 어떻게 살아냈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습니다. 날씨는 더 추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말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빠! 숙부님 집으로 돌아가자.”

어느 날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안돼, 아무 것도 없이 돌아가면 그 자리에서 내쫓아 버릴 게 뻔해. 고구마 줄기나 잎을 좀더 주워 모으지 않으면…”

오빠에게도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먹을 식량을 구해서 가면 숙부님도 냉정하게 내쫓지는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먹을 것이 없어 쫓겨난 것이 확실한 판에 빈손으로 되돌아가면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먹는 양을 줄여서, 모아 온 잎이나 야채의 부스러기를 남겨 놓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배가 더 고파져서 결국은 다 먹어치우고 말았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대로 죽을 것 같아요∼”

내가 말했더니 오빠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 알았다. 한번만 더 있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해서 우리는 1개월 만에 숙부님 집에 찾아가 현관 앞에 섰습니다.

“한번만 더 집에 있게 해 주세요∼”

우리는 우리를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숙부님과 숙모님께 머리를 숙이고 필사적으로 부탁했습니다. 숙부님과 숙모님은 말라빠지고 흙투성이가 된 우리들을 보고 매정하게 문을 닫지는 않았습니다.

집에 들여주긴 했어도 우리가 그들에게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은 여전했습니다. 어깨가 좁아진 우리들은 전보다 더욱 숙부님과 숙모님의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방안을 보니까 우리들이 처음 집에서 가져왔던 텔레비전과 가재도구들은 전부 없어졌습니다. 이미 누구에겐가 팔아치워 버린 것입니다.

며칠 후 숙부님은 우리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이상 더 길러 줄 수가 없다. 너희들은 여기서 나가거라.”

‘또 산에 살 수 밖에 없게 되었구나…’

몸 전체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알겠느냐? 나는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정년이다. 연금은 받겠지만 있으나마나한 돈이다. 숙모님은 아직 일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까지 길러줄 수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집 전체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

숙부님의 말씀은 한 군데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중국은 여기보다 살기 쉬운 것 같다. 북부지방의 사람들 중에는 중국에 가서 먹을 것이나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너희들 둘이라면 꼭 중국에서도 길러줄 것이라고 믿는다. 무산(茂山-함경북도 북부의 국경도시)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둘이서 중국에 가도록 하여라.”

‘중국…’
옆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가라”는 그 말씀에 나로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춘석아, 어때…?”

숙부님의 물음에 오빠는 잠시 가만있다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빠가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남매는 중국을 향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⑨ “ 달리기 시작한 열차 ”

그날 밤 짐을 정리한 우리들은 숙부님과 같이 안주(安州)역에 나갔습니다. 「신의주 발 청진행」열차를 타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에 나가보니 거기에는 먹을 것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숙부님은 그 중에서 무산으로 가는 사람을 찾아 우리들을 부탁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우리 남매의 손을 꽉 잡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잡았던 손을 놓는 것으로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사람이 빡빡하게 들어찬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아마 오빠의 기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둘이서 묵묵히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주기라도 하듯.

낡은 열차는 천천히 달리고, 달리는가 하면 또 멈추고, 이렇게 되풀이하며 가는 도중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희선, 희선~아! 일어나~”

오빠의 목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내다봐 평원(平原)이다~”

아직 잠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창 밖을 내다보니 밖에는 어느새 날이 새고 있었습니다. 한때 우리 가족이 단란하게 살던 평원의 그리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조용히 잠자고 있는 귀중한 장소입니다.

“아버지 어머지 안녕히 계세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뒤돌아보니까 어느새 오빠의 어깨도 떨리고 있었습니다.

둘만 남겨지다

강냉이 가루에 풀과 감자를 섞어 만든 떡 몇 개와 돈 120원이 숙부님이 우리들에게 쥐어 준 전부였습니다.

우리들은 도중에 「평양발 무산행」열차를 바꿔 타고 함경남도 고원(高原)역에 도착했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떡은 모두 먹어 없어졌습니다. 열차가 몹시 느려서 고원까지 가는데 4일씩이나 걸렸기 때문입니다.

아직 반 정도의 갈 길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다른 승객들이 어린 우리들을 보살펴 주었지만 그들도 먹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산에 도착할 때까지 5일간 우리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배가 고프다...’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으면 어머니가 계실 때의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가족 전체가 환영해 준 나의 생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웃는 얼굴, 그리고 식탁에는 맛있는 많은 음식들...

이제라도 손이 닿을 것 같은 음식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입니다. 눈을 뜨자 거기에는 사람이 꽉 차 있는 열차 안, 나는 배가고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고아에 불과했습니다.

간신히 열차가 무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방중이었습니다. 뱃속이 텅 비어있던 나는 열차에서 내린 후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땅 바닥에 고꾸라져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안주에서부터 같이 온 사람이 나를 안고 일으켜 주었습니다.

“괜찮은가... 힘내라..”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와 오빠는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무산에 둘만 외로이 남게 되었습니다.

⑩ “ 이제부터 어떻게 할래? ”

역 안이나 거리 안 모두가 캄캄했습니다. 우리는 역 안에서 가만히 서로 껴안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려고 해도 춥고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깨어보니 아침이었습니다. 역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발을 밟아서 눈을 뜨게 된 것 같았습니다.

“오빠 이제부터 어떻게 할래?”

중국에 간다고는 했지만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가야 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응.... 빨리 누구한테 물어보자.”

오빠는 그렇게 말했지만 경찰한테 물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역을 나와 거리를 걸어가면서 좀 점잖아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중국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됩니까?”

오빠가 물어보니까 그 남자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중국? 너희들 둘이서 가는가? 부모는 없는가?”

우리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기 무산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는 것. 양부모가 굶어 죽어서 꽃제비가 되어 시장에서 방황하고 있거나 강을 건너 중국에 가는 애들이 적지 않다는 등..

나는 그제서야 북조선은 어디나 똑같다는 것, 나라 전체가 굶어 죽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두만강을 건너다

“여기를 쭉~걸어서 가면 두만강이라는 강이 나온다. 그곳을 건너면 중국이다. 봐라!저~기 보이는 산, 저것은 중국의 산이다. 지금은 강도 얼어붙어서 너희들이라도 간단하게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 거다.”

남자는 그렇게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한숨을 쉬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통 강 양측에는 각기 그 나라의 군인이 있다. 북조선의 경비병 같으면 애들은 못 본체하고 내버려둘지도 모르겠지만 중국의 군인한테 들키면 꼭 북조선으로 되돌려 보낸다. 그러니까 좀더 강 상류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 그 쪽이 강폭도 좁고 건너는데 편할 것이다. 먼저 나무 그늘에 숨어서 군인들이 있나 없나 잘 살펴본 후에 단숨에 강을 건너가라.”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우리들은 두만강 상류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산이라는 곳은 추워서 걷고 있어도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 나왔습니다.

해는 떠올라 햇빛을 비추어 주는데 얼굴은 따끔따끔 아프며 발은 동상에 걸렸는지 거의 감각이 없었습니다. 얼마간 걸어가다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이 말해 준 대로 강가의 수풀속에 몸을 숨기고 거기서 강의 양편을 살펴보았습니다. 주위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습니다.

아무튼 군인들은 없는 게 확실했습니다. 그래도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우리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니 무서워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오빠가 말했습니다.

“됐다.. 희선아 가자~”

오빠가 내 손을 잡고 끄는 바람에 나도 일어섰습니다. 우리들은 손을 꼭 잡은 채로 얼어붙은 강을 재빠르게, 그러나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건너갔습니다. 강의 중간 지점까지 가서 뒤를 돌아보니 하얗게 내려 덮인 눈 위에 우리들이 걸어온 발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던지 군인들한테 발견되지 않기를...’

나는 마음 속으로 그것만을 빌고 있었습니다. 강을 건너는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길고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강을 건너와 있었습니다.

그곳은 중국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 건너편에 남아있는 북조선 땅을 뒤돌아보았습니다. 강 건너에는 북조선의 산들이 아름답게 눈 화장을 한 채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안녕히.... ’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조국에 작별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1997년 1월 18일 낮이 조금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⑪ “5일만에 먹는 음식”

강을 건너고 나서 우리는 일단 한숨을 쉬었지만 발끝에서부터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강가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다가는 중국의 군인한테 잡히고 말 것입니다.

오빠와 나는 둘이서 서로 격려하며 온 힘을 다하여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밭 모양의 땅과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낡고 자그마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그 앞으로는 몇 채의 농가가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마을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도록 살짝 그 집으로 다가갔습니다.

열린 문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방 안에는 여기저기 성냥개비와 종이조각, 기름과 술병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벌벌 떨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벽에 걸려있는 강냉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강냉이다…”

먹을 것을 본 것은 5일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빨리 불을 피워 강냉이를 하나 하나 불에 그슬려서 꿈인 듯 먹기 시작했습니다. 먹는 동안 오빠와 나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강냉이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미친 듯이 먹고 나니까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아∼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것이 몇 일 만일까…”

춥고 배가 고파서 몇 일 간이나 잠을 자지 못한 탓이겠지. 배가 불러지자마자 나와 오빠는 모처럼 배고픔 없는 단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묵어가게 해 줄까?

얼른 눈을 떠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들은 여기까지 오고 만 것입니다. 북조선보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밤이 되기 전에 묵게 해 줄만한 부잣집을 찾아보자.”

좀 원기를 되찾은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저녁 해가 지는 길을 또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두 시간 정도 걸었더니 먼저와 비슷한 농촌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오빠는 날도 저물었으니 그 마을에서 재워줄 집을 찾자고 했습니다.

나도 걸어가는 것에 지쳤던 터라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나란히 자리잡은 집들을 보니 하나같이 낡은 집으로 북조선의 농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오빠, 재워줄까?”

“응… 어떨까?”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마을 안에서 이리 저리 헤매고 있는데 돌연 어느 집 문이 꽝하며 열리더니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습니다. 우리는 놀라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할머니도 보지 못하던 애들이 서 있어서 놀란 모양으로 우리를 한참 살펴보셨습니다.

`‘혼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들은 저절로 몸을 움추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할머니는 웃음을 지으며 “이리 오너라”는 듯이 손짓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서워 떨면서도 그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⑫ “친절한 할머니”

“북조선에서 왔지. 배 고프지 않니?”

“미안합니다. 실은 배가 많이 고픕니다.”

할머니와 오빠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아까부터 할머니는 계속 조선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중국사람도 조선말을 합니까?”

내가 물어 보니까 할머니는 슬그머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중국에 살고 있지만 조선사람이야. 너희들과 똑같단다.”

나는 중국에서는 중국말밖에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중국이라고 하여도 이 부근에는 조선말을 하는 조선족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북조선에 친척이 있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오빠도 나도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셨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는 때때로 “불쌍하게…”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며 들어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이 근방에서는 북조선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1∼2년 전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는 어른들이 많아짐에 따라 최근에는 우리들 같은 애들까지도 자주 눈에 띈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할머니 집의 음식을 보니까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였습니다. 하얀 쌀밥은 수북하니 담았고 고기와 야채 반찬도 몇 종류나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맛있는 식사를 한 것은 몇 해 만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할머니 집은 그렇게 낡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법 오래된 것 같고 방도 두 개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중국에 사는 사람은 전부 부자 같네요…”

내가 아무런 뜻도 없이 말하니까 할머니는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마을에서도 어려운 축에 든단다. 이 마을이라고 해서 그렇게 풍족한 마을은 아니다. 우리 집은 나 하나 뿐이니까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더 벌지 않으면’ 하는 말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생각해 봐, 땀을 흘리며 밭을 갈아서 그것으로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것이 보통이란다. 정말 어떻게 북조선은…”

할머니는 거기까지 말한 후 급히 기력을 잃은 듯한 얼굴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미안하다. 너희들을 집에 놔두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지만 북조선 사람을 숨겨 놓는 것을 알게 되면 공안(경찰)이 가만있지 않아. 벌금도 뜯어가고 말이야. 이 앞으로 더 가면 좀더 큰 마을이 있으니까 거기라면 거처할 수 있는 집도 있을 것 같다. 집에 놔두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할머니는 알지도 못하는 우리들을 집에 들어오라고 해서 많은 음식을 먹게 해주신 은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자꾸 미안하다고 하니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밥을 먹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일은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나도 오빠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들은 할머니 집의 따뜻한 온돌방에서 하룻밤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께서 일러주신 대로 큰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우리들을 떠나 보내셨습니다. 그때의 고마웠던 할머니의 얼굴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춘석의 일기"로 계속

2005년 4월 김희선

자료제공 : The Daily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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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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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성 2006-07-27 18:05:31
    애들이 어떻게되였는지 아시는분 글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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