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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석의 일기 - 김춘석
동지회 27 10577 2006-02-27 16:36:19
북한의 식량난 시절, 일본의 북한인권단체 RENK가 중국에서 보호했던 김춘식, 김희선(가명) 남매가 겪은 굶주림과 탈북 그리고 중국 생활에 대한 수기

① “북조선의 추억”

중국에 와서는 될 수 있는 한 북조선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괴로웠던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려고 할 때마다 될 수 있는 대로 즐거웠던 일들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북조선에서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명 즐거웠던 추억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내가 인민학교 학생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1990년 9월(북조선은 9월이 새 학기다) 나는 새로 맞춘 제복을 입고 ‘신입생을 열열히 환영한다’라고 쓰여진 교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상급생들은 양측에 나란히 서서 우리들에게 색종이로 만든 꽃 테이프를 둘러 주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같은 동급생 중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문자를 익혔기 때문에 학급위원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생겨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들과 해가 질 때까지 들판을 뛰놀기도 하고 낚시질도 하며 놀았습니다.

2학년 때는 ‘학습과 조직생활의 모범학생’으로서 군(郡)에서 표창장을 받았고 ‘조선소년단’의 단원도 되었습니다. 인민군(북조선에서 군대를 부르는 말)의 군관(장교)으로 계시는 아버지는 내가 자랑스러워서 군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언제나 나와 희선이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군대에서 배급을 주는 강냉이로 만든 엿인데, 그렇게 달고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즐거웠던 나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희선이가 썼기 때문에 더 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북조선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동안 나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장례식 때의 광경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다가 나나 선희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스럽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되었을까요?

지금도 그런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중국에 와서 배는 고프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정말 안심하고 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친절하게 해주셔서 이제는 안심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근심걱정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그 즉시 또 이전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이런 것만 쓰다 보면 기분이 점점 멍멍해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하고 선희가 쓴 뒤를 이어 쓰려고 합니다.

② “임업장에서”

1997년 1월 18일 나와 희선이는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넘어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땅에서 이제부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일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만난 할머니가 친절한 사람이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조선말이 통하는 것도 마음의 큰 힘이 되었지요. 여기까지는 희선이가 썼습니다. 그 후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와 희선이는 할머니가 알려 주신대로 걸어갔습니다. 밖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나의 마음은 어제보다 많이 따뜻해져 있었습니다.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 사람과 차가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느 사람이든지 우리들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어떤 사람은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다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차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북조선 애들이구나, 빨리 가거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옷차림이 더럽고 흉해서 한번 보자마자 바로 북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나 봅니다. 우리는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잠깐 동안은 사람이나 차가 오는 것 같으면 길 옆 수풀 속에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지프차 한 대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재빨리 몸을 숨겼지만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두 명의 남자가 차에서 내려 우리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군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경관같이 보였습니다.

“차에 타라!”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명령조로 말했습니다. 왠지 도망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순순히 차에 올라탔고, 차는 산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북조선에 돌려보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와 선희는 너무 실망해서 더 이상 말할 기력조차 없어졌습니다. 차는 산중에 있는 임업장(나무를 벌목하는 작업장)같은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큰 오두막집이 있고 그 옆에는 벌목한 나무를 실은 트럭 몇 대가 서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겐 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겁을 먹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차에 있던 두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오너라”고 했습니다.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거기에는 남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몇 사람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 사람이 “북조선에서 왔지?”하고 조선말로 물어왔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나는 벌벌 떨면서 대답했습니다. 대답하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속이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이제는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말았습니다. 선희는 머리를 수그린 채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사람들은 갑자기 온화한 얼굴이 되어 말했습니다.

“그렇게 무섭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어린 것들이 불쌍하다. 옷과 신발이 너덜너덜하지 않는가… 밥은 먹었느냐? 부모는 어떻게 된 것이냐? 북조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야단 맞을 거라고만 알았는데, 조금 안심이 되어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일들을 드문드문 떼어가며 말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답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까 조선어로 말했던 사람은 우리들이 말 할 때마다 다른 말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 외에도 조선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말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이 임업장에는 조선족 사람과 한족(중국에서 제일 많은 민족)사람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몰랐던 말은 「한어(중국어) : 漢語(中國語)」라고 하는데, 이 지방에 살고있는 조선족 사람은 조선어와 한어를 모두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임업장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고 동정하여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들 전부가 북조선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과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 등 북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조선에서 도망 온 사람에게 먹을 것과 돈을 준 적이 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임업장 사람이 식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 입혀 주셨습니다. 음식은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한족 요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제의 할머니는 “이 지방 사람들은 못 사는 편이다”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엔 중국 사람들은 부자인 것 같았습니다.

③ “친절한 경찰관”

임업장에서 그렇게 이틀을 지냈습니다. 임업장 사람들은 참으로 유쾌하고 다정했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 여차하면 이곳에 계속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한 기대로 끝났습니다.

“불쌍하지만 이대로는 있을 수 없단다.”

우리들을 차에 태워온 사람이 미안한 듯이 말했습니다.
밤이 되자 우리들은 그 마을의 경찰 파출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은 파출소에서 자게 되었지만 북조선에 되돌아 가면 어떻게 해서 먹고 살아가야 할지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음날이 되어도 누구 하나 일어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파출소의 조선족 할아버지는 우리들이 지루하겠다며 비디오 테이프까지 보여주셨습니다. 비디오라는 것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럭저럭 파출소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이대로 북조선에 되돌려 보낼까 말까 하며 고민 중에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부모가 없는 우리들을 북조선에 되돌려 보내면 제대로 잘 될 리가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그렇게는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짐작했습니다.

“야∼ 춘석아 장작 패는 것 좀 도와달라.”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왠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열심히 도와 드렸습니다. 희선이는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할머니와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금방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또, 계속 여기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희미하게나마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어이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파출소에 와서 1개월 정도 된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와 희선이를 앉혀놓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아침 북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으니까…”

할아버지는 경찰관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이대로 놔두면 마을 사람들한테 본보기가 되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슬퍼서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1개월간 할아버지께서 정말로 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와 선희는 1개월 전과는 몰라보게 몸이 좋아지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할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이별이 더 괴로웠던 것입니다.

나의 운명을 저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사탕과 과자 그리고 일용품을 가득히 넣은 가방 하나와 돈 450원(한국돈 6만원상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 북조선 측의 초소(국경을 경비하는 군인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야 된다. 이제는 또 여기에 오면 안돼.”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들은 계속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와 선희는 둘 다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④ “돈을 빼앗기고 나서”

그 후 우리들은 북조선 초소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디에 살고 있었느냐, 부모는 어떻게 되었는가, 왜 중국에 건너 갔던가 등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붙잡히면 심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지만 두 번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더니 그러면 신안주로 가라는 말만 할 뿐,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고아라는 것, 숙부님한테 쫓겨났다는 것, 거기에 아버지가 인민군 군관(장교)이었다는 것 등을 참작하여 용서해 준 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산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군의 검문을 받고 조사를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입고 있는 옷이 중국제라서 눈에 띄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때마다 아버지의 이름과 군대의 계급을 말하면 난폭한 짓을 하지 않고 돌려 보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야 이것은 중국 돈 아니냐. 어떻게 된 거야? 안됐지만 이것은 몰수한다.”

한 검문소의 군인은 그렇게 말하며 파출소 할아버지가 주신 돈 450원을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보통 어느 검문소에도 군인이 몇 사람씩 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검문소에는 웬일인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이 돈이 없으면 신안주에 갈 수가 없고 먹을 것도 사 먹을 수가 없습니다.”

“안 된다. 규칙이다.”

다른 군인이라도 있었으면 애들한테 돈을 뺏을 수는 없었겠지요. 우리들이 운이 나빴습니다. 결국 돈을 돌려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선희와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분하고 분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잘 안 되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빼앗기지 않은 것이 운이 좋았던 걸까? 규칙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땅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못된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오빠 이제는 집에 가지 말고 중국으로 가자.”

희선이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잠시 동안 서로 껴안고 마냥 울었습니다.

네 번째 건넌 두만강

고향에도 가지 못하는 우리들은 결국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또 붙잡혀 되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또 한 번. 이번에도 역시 붙잡혀 끌려 돌아왔습니다.

같은 일이 자꾸 되풀이 되니까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확실히 중국에서는 밥을 굶지 않는다. 거기에는 친절한 사람들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경찰이 오지 않을까 하고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된다. 이런 기분으로 지내느니 북조선에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희선이한테 그런 내 생각을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희선이는 나에게 화를 내곤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오빠. 좋아, 오빠가 안 간다면 나 혼자라도 중국에 갈래.”

희선이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희선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네 번째 강 건너기를 시도했습니다.

처음과 반대로 내가 선희의 손에 끌려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똑같은 곳으로 건너면 붙잡힐 것 같아 이번에는 그 전보다 더 상류쪽을 선택하여 건너갔습니다.

⑤ “리스에서 맞은 명절”

도착한 곳은 ‘리스’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거기서도 조선족 사람의 집에 반 달가량 신세를 졌습니다.

우리 남매는 처음에는 같은 집에 있었는데 나중에 근처에 사는 할아버지가 희선이를 귀여워하셔서 집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며 지냈습니다.

반 달가량 지나니까 구정 명절이 되었습니다. 큰 도시로 일하러 갔던 자녀들과 친척들이 모여들어 내가 있는 집이나 선희가 있던 집은 갑자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우리들은 젊은 부부의 간난 아기를 데리고 놀았고 어른들은 트럼프를 치며 무척 재미있게 놀고 있었습니다. 식탁에는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요리들이 많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 나에게 자꾸 더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내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중국에서는 구정 1일이 1년 중에 제일 화려하고 즐거운 명절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있던 북조선에서도 구정 1일은 명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일 화려한 명절은 아니고 조촐하게 지낼 뿐입니다.

그 대신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날에는 ‘민족의 명절’이라고 하여 온 시가지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장식들로 가득 차곤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고기와 과자 배급도 나왔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니까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지면서 “옛날 일은 잊어버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더 먹으라고 다시 권했습니다.
나는 배도 불렀지만 그 집 사람들의 따뜻한 정에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얼마간 있으니까 우리들의 일이 마을 전체에 퍼져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에 도취되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얼마 있지 않으면 경찰이 찾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와서 나나 선희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친척네 아이들이라고 뭐라고 말해 놓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계셨지만 우리들은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이나 붙잡혔던 적이 있어서, 희선이와 나는 빠른 시일 내에 여기를 떠나서 잠시동안 다른 곳에 있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오자고 의논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집사람들 모르게 몰래 빠져나와 희선이의 손을 붙잡고 ‘리스’라는 마을을 떠났습니다.

집사람들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했다가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며 붙잡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붙잡히면 또 오랫동안 머물게 되어 점점 더 이별하기 힘들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누군가가 우리들을 발견하고 붙잡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면서도 나의 이런 기분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무리하게 잘 쓰려고 생각하다가도 곧 그런 나 자신이 싫어지곤 합니다.

⑥ “되돌려 보내지만 말아주세요”

마을을 떠난 후 우리들은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전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간 뒷산을 넘어 길이 나오면 그쪽으로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밤이 되자 주변은 모두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겼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눈 위를 밟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와 “하!하!” 하는 숨소리 뿐이었습니다.

경찰에 붙잡히는 것도 무섭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 우리 둘뿐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간신히 불빛 하나를 발견하고 더 한층 힘을 내어 그곳으로 걸어갔습니다.

그곳은 ‘소호’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어떤 집에 들어가 재워달라고 사정을 했고, 다음날은 아침부터 그 집 애들과 놀았습니다. 성격이 좋고 남들과 잘 어울리는 쌍둥이 남자애들이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마을에 차가 한 대 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경찰관 같았습니다.

‘이 집에서 통보했는지도 모른다. ‘리스’ 마을에서 우리를 찾으러 왔는지도 모른다.’

제법 많이 걸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소호’와 ‘리스’는 그다지 많이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자∼ 집에 가자.”

경찰은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차에 태우려고 했습니다.

“집이라구요? 우리집은 어디에도 없어요.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겁니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북조선에 돌려보내지면 틀림없이 도망칠 힘마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먼저 차에 올라탄 희선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있는 나무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싫어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만 두세요…”

이 말을 듣고 나도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경찰관의 발목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부탁합니다. 우리들은 나쁜 짓은 하지 않아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도 하지 않아요. 북조선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탈출한 것뿐입니다. 되돌려보내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머리로 피가 솟구쳐올라 마지막 말은 울먹이는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경찰관도 처음에는 “이제는 더 울지 말아라”라거나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우리를 남겨놓은 채 차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틀림없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던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북조선으로 되돌려 보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긴 해도 더 이상 ‘소호’ 마을에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울려고 하는 희선이의 손을 붙잡고 급히 소호 마을을 떠나왔습니다.

⑦ “도대체 어디로?”

선희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해가 지고 말았습니다. 그 근방에서 허둥대고 있다가는 또 붙잡히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달아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 된단 말입니까.

중국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라곤 그 근처밖에 없었는데. 그때 내 머릿속에는 1개월간 우리를 보살펴 주었던 그 파출소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선희야! 또 파출소 할아버지한테 갈까?”

간신히 눈물을 멈춘 선희는 묵묵히 머리만 끄덕였습니다. 파출소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보더니 몹시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야단치지는 않았습니다.

“추웠지? 안에 들어오너라.”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요리를 먹으면서 북조선에 되돌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응, 응” 하시며 말없이 듣고만 계시다가 물으셨습니다.

“북조선에 가는 것은 싫으냐? 가면 살아갈 수 없겠느냐?”

할아버지는 우리가 부모님이 없긴 하지만 친척이라도 돌봐 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친가 쪽으로도 친척이 거의 없다는 것과 외가 쪽으로도 신안주의 숙부님 집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할아버지는 무엇인가 결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알았다…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방법은 있을거야… 그러니 오늘은 이제 자자.”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나는 오래간만에 밝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서야 장래의 희망이라는 것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지난 2∼3개월 동안은 오늘 아니면 내일을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먼 앞날의 일까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은 따뜻한 온돌방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허리를 펴고 잠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⑧ "한국이라니요?"

다음날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몇 차례나 전화를 걸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이 일어난 것을 보시자 식탁에 앉힌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여기에는 있을 수가 없구나. 여기는 조그만 마을이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당장 눈에 띄게 된다. 될 수 있으면 큰 도시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엔지(연길 : 延吉)시에 있는 잘 아는 분한테 연락을 취했단다. 오후쯤 되면 이곳에 올 것이니 착실하게 말을 해야 된다.”

낮이 되니까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셨습니다.

박 할아버지와 최 할머니라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올 것인지 불안했지만 두 분 모두 다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한테 말한 것과 똑같이 북조선에서의 생활과 중국에 와서의 일들을 들려드렸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매우 진지한 얼굴을 하시고 들어주셨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박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하게 양친부모가 없으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 그러나 중국에 있는 한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애들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도 역시 북조선 아이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한국에라도 가면 좋은데…”

할아버지께서 ‘한국에…’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습니다. 희선이도 맥이 풀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조선에서는 언제나 한국을 가혹하고 나쁜 나라라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라든가, ‘천적(天敵)인 미국의 앞잡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미국 사람은 괴물이나 악마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앞잡이인 한국 사람도 같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곳에 우리를 보내려고 하는 걸까… 터무니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우리들을 보고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놀라신 것 같았습니다.

“왜 그래? 왜 그래?”

갑자기 분위기가 시끌시끌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유를 알게 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으로는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북조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나라이며 중국보다도 더 잘 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북조선에서는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만 중국에서는 어느 집이나 자전거가 없는 집이 없다는 것, 그런데 한국은 중국 사람들이 자전거를 갖고 있는 것만큼이나 모두 자가용차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만 해도 자가용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가운데 나나 희선이는 그분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우리들은 박 할아버지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 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3개월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⑨ "간신히 안심했는데…"

북조선을 도망쳐 나온 후로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같은 곳에서 지내본 적은 없었습니다.

박 할아버지의 집은 엔지시의 중심지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휴일에는 우리들을 거리에 데리고 가시곤 하셨습니다. 엔지시의 번화가에는 수많은 자동차와 자전거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있던 마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도 많고 큰 건물들과 상점도 많이 있어서 원하는 물건들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북조선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였습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이대로 계속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무리였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제는 겨우 안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꼭 나쁜 일이 생기고 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근처에 사는 할머니께서 북조선에서 도망 온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한국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이 북조선에서 온 것을 알고 그것을 그들에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그 한국사람들을 만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해 주었습니다. 나와 희선이는 말하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흥분해서 울고 말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우리들을 자꾸만 카메라로 찍고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있던 것을 모두 말한 탓인지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이 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박 할아버지의 말로는 그때 우리가 이야기한 장면이 한국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멋대로 중국에 도망 온 조선 사람은 모두 범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이웃 나라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북조선 정부도 사람들이 제멋대로 도망쳐 나간다던가, 특히 그것이 적국인 한국으로 밝혀졌을 때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조선 정부에서 중국 정부에 단속을 철저히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⑩ “헤어질 수 없는 남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중국 경찰이 우리들을 붙잡으러 올 것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박 할아버지는 즉시 아는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여 우리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로서는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별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들의 신상 문제를 정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우리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떤 젊은 부부가 우리들을 찾아왔습니다.

어쩐지 그 부부는 희선이만을 데리고 가려는 눈치였습니다. 그것을 알아챈 희선이는 마음의 안정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며칠 후 희선이는 그 집에 놀러갔다 와서는 완전히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집이 2층인데 굉장히 넓고 크다는 둥 아저씨 차를 타고 놀러갔다 왔다는 둥 기분이 들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러는 희선이가 부러워서 좀 질투가 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이웃 용정(龍井)이라는 곳에서 뚱뚱한 남자가 찾아 왔습니다. 마음이 대범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박 할아버지와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돌아가셨습니다. 이틀 후 또 그 사람이 와서 이번에는 “두 사람을 잘 키워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결국 우리는 함께 용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박 할아버지는 우리가 서로 헤어져 있는 것보다는 같이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을 데리러 온 아저씨는 오(吳)라는 성씨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오 아저씨 집에 갔을 때 집이 너무 넓어서 놀랐습니다.

농업을 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 예전에는 말로만 들어본 적 있는 큰 집이었습니다. 집 앞에는 넓은 들판이 있고 그 옆에는 무성한 나무가 들어찬 산이 보였습니다. 가축도 많이 사육하고 있었고 집 옆에는 수영장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수영장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 아저씨 집에는 부인과 어린애와 할머니, 이렇게 네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아저씨는 나의 이름을 ‘오천건(吳天健)’, 희선이의 이름을 ‘오연연(吳蓮蓮)’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그 집의 자식으로 삼을 예정인 것 같았습니다.

⑪ “붙잡을 수 없는 행복”

그런데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오 아저씨는 돈이 많은 부자였기에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학교도 다닐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중국인이라는 증명이 필요했는데 가짜 중국 호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짜 증명이기 때문에 계속 사용할 수는 없고 그 때만 잠깐 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을 산 덕분에 학교에 다닐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일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무언가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집 할머니는 꽤 시끄럽게 말이 많았고 조금만 대꾸를 해도 당장 잔소리를 퍼붓곤 했습니다. 나는 때로는 그런 할머니에게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선이는 할머니 마음에 들려고 청소나 요리를 부지런히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희선이의 그런 행동이 ‘아부’하는 것 같이만 보여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희선이는 북조선에 있을 때부터 성실한 편이었습니다. 내가 장난을 치면 몹시 못마땅해 했고 어른들이 말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희선이는 미래가 불확실한 우리를 집에 데리고 와 학교까지 보내주고 있으니까, 조금 고생스럽거나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참고 순순히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고 때때로 반발하는 나를 미덥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할머니한테 간간히 욕을 먹기는 해도 그런대로 한동안은 잘 참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 아저씨 집에 와서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큰 소동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학교에서 시험 답안지를 받아온 날의 일입니다. 시험점수는 25점.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한 점수였습니다.

북조선에 있을 때부터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고 중국에 와서도 이곳저곳 전전하느라 공부 같은 것은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같이 생활해 온 희선이는 항상 시험점수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희선이와 비교하면 아무리 보아도 내가 태만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전혀 태만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예상했던 대로 이날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께서 핀잔을 주셨습니다.

“뭣 때문에 너는 항상 그러냐∼! 연연처럼 정신차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나도 적당히 대답했지만 얼마 안가서 화가 치밀어 올라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습니다.

“내가 몇 점을 받든지 할머니와는 관계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나에게 간섭을 합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나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우리 집 친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야단도 쳤는데 뭐라고? 관계가 없다고? 잘도 말한다…”

아뿔싸! 잘못 했구나 하는 순간 나는 할머니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이 싫어 뒷문으로 집을 도망쳐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젠 틀렸구나… 이제는 여기에 있을 수가 없구나…’

뒷산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동안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있으니까 마음이 가라앉아서, 집에 들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벌써 밤도 깊어져 있었습니다. 몰래 뒷문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희선이는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빌고 “두 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할머니만은 용서해주지 않았습니다.

⑫ “다시 박 할아버지에게로”

할 수 없이 나와 희선이는 박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전과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맞아 주셨고 곧 다음에 보호해 줄 수 있는 곳을 찾아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나와 희선이가 각각 다른 곳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최 할머니의 동창생 집에, 그리고 희선이는 지난 번에 한번 만나 인사 드렸던 젊은 부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남매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또한 박 할아버지와 헤어지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 마음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남아 있어서인지 나도 희선이도 맡겨진 집의 가족에게 마음을 터놓기 힘들었습니다.

2∼3개월 후 또 쫓겨나 박 할아버지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박 할아버지도 많이 곤란해 하셨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이 그 당시(1997년 말에서 1998년 초에 걸친 시기) 한창 북조선에서 도망쳐 오는 사람들이 많아져 경찰의 단속도 그만큼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도 북조선 사람을 숨겨준 사실이 발각되면 벌금을 내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 벌금이 터무니없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우리들을 맡아주거나 양자로 받아들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박 할아버지까지 곤란한 처지에 놓이셨지만 나나 희선이는 할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남매와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네 사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우리들이 북조선을 탈출 한 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고 있었습니다.

⑬ “일본에서 온 손님”

그러던 어느 날 (틀림없이 3월달이라고 생각된다) 박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먼 곳에서 손님이 오신다. 얼마 전에 일본에 사는 조선인 남자가 찾아온 일이 있지. 그 사람의 친구란다. 어떻게 하겠니? 만나 보겠니?”

그러고 보니 1월달 초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 분은 우리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고 동정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또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던 게 기억났습니다.

손님은 한밤중에 오셨습니다. 세 사람의 남자였습니다. 한 분은 전부터 알고 지었던 조선족 김 아저씨였는데 그분은 안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한 분은 젊은 일본 사람이었는데 나와 희선이는 일본사람을 처음 보았습니다. 첫눈에는 우리와 별로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머지 한 분이 이영화(李英和)선생님이었습니다. 이영화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조선사람이며 북조선에 유학을 갔던 일도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일본에서 대학 교수를 하고 있지만 북조선의 독재정치(국가의 통치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 되어있는 정치)를 비판하는 운동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운동조직을 「RENK」라고 하는데 그 말은 ‘북조선 사람들을 구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북조선에서 중국으로 도망 온 사람은 독재정치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려고 온 것이다.”

이 선생님은 대체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희선이도 불안해져서 잠깐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북조선 정치를 비판해도 문제가 없는지? 나는 정치라는 것은 잘 모르지만 북조선에서 이러한 말을 했다면 틀림없이 붙잡혀 수용소로 보낼 것이다. 위험한 사람이 아닌가?’

수양 부모에게서 온 편지

이 선생님은 한참동안 이야기하시더니 가방에서 서류 같은 것을 꺼내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가지고 왔다. 너희들에게 보낸 편지다. 일본에서도 너희들을 동정하여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박 선생님께 읽어달라고 해라.”

읽어보니까 대단히 따뜻한 편지였습니다.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우리들을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 사람이 마음을 써 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그 후에도 때때로 우리들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일본에서 우리들을 지원해 주시는 수양 부모님들의 편지와 여러 가지 선물들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한국에서 구입한 소설책을 잔뜩 가져오신 적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노인과 바다」라는 책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책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작은 세계 속에서 살아 왔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수양 부모님들의 편지에는 언제나 우리를 격려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속이거나 배신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데 수양 부모님들은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을 격려하고 도와주십니다.

그 덕택에 나나 희선이도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되었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⑭ “우리들이 싫어졌나요?”

1999년 3월 하순경에 우리들은 별안간 삶의 거처를 잃어버렸습니다. 박 할아버지와 최 할머니 집에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그 날 아침 할아버지는 강한 어조로 “짐을 챙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설마 경찰이?”

나는 몇 번이나 되물었습니다.

“아무튼 더 이상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서운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희선이는 겁이 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짐이라곤 가방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박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데리고 집 앞 큰길로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따라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큰길에 다다르자 할아버지는 택시를 멈추고 우리들을 택시에 태우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할아버지? 이유를 말해 주세요. 우리들이 싫어졌나요?”

우리는 필사적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계속 심기가 상한 얼굴로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차라리 큰 소리로 욕을 하고 화라도 내셨다면 우리들도 뭐라고 하소연할 수 있었을 텐데 그토록 냉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희선이도 완전히 힘이 빠진 모양으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습니다.

우리들이 쓰러지듯이 택시에 올라타자 할아버지는 운전수에게 요금을 주면서 “서시장(연길시의 번화가)까지 가 주세요”라고만 말씀하신 후 거칠게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차는 달리기 시작하자 그 때까지 아연하게 있던 우리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스쳐가듯 보였을 뿐입니다.

택시는 잠시 후 서시장에 도착하여 슬픔에 잠긴 우리들을 내려놓은 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일년하고 몇 개월만에 나와 희선이는 또 둘만 남겨진 것입니다.

영문을 몰라,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눈물이라도 흘리게 된 것은 김 아저씨한테 전화를 해서 곧 데리러 오겠다는 대답을 들은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박 할아버지나 최 할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김 아저씨께서 항의를 하러 갔다 오셨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제 더 이곳에 있는 것은 무리다”라고만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조선족 사람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해보니까 나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98년 말부터 갑작스럽게 북조선 사람들에 대한 중국정부의 단속이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연길 시내를 순찰하는 경찰의 수도 눈에 띄게 많아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지금까지 친절했던 조선족 사람들의 태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김 아저씨의 말로는 그동안 조선족 사람들이 북조선 사람들을 데리고 있어준 것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북조선의 식량사정이 좀 나아져서 북조선 사람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으로 도망쳐오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날 뿐인데다 경찰의 단속은 더욱 심해지자 이제는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 한계에 도달하였던 것 같습니다.

냉정한 태도를 취한 것도 딱 잘라 헤어져야 되겠다는 각오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에게 그런 이유를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와 희선이가 아직 어린애이긴 해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만약 그때 김 아저씨가 돌봐 주지 않았고, 경찰에 붙잡혀 북조선에 되돌아 갔다면 아마 지금쯤 나나 희선이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고, 박 할아버지와 최 할머니의 심한 처사를 원망하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은 상상만 해도 무서워서 오금이 떨릴 지경입니다. 사람을 저주하면서 죽는다는 것만큼 무서운 일도 없습니다. 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는지, 그것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⑮ “무엇인가 크게 잘못 되었습니다”

희선이도 쓰고 있지만 나는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사람 사이의 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의 마음만큼 변하기 쉬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처음에는 동정을 합니다. 그 마음에 거짓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동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동정을 받다가 나중에는 차가운 냉대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죄라고는 단지 북조선에서 태어났다는 것뿐인데 언제까지나 이런 아픔들을 반복해서 겪어야만 할까요? 평생동안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북조선이 싫어서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북조선은 우리가 태어나 자란 나라입니다. 여러 가지 추억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눈물을 흘린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북조선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북조선은 우리들을 살려주지 않습니다…

북조선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굶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부 자기만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마저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북조선은 이런 나라가 되었을까요?

나는 중국에 온 이후로 북조선에 대해 커다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분노하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매우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희선이와 둘이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뿐입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우리들의 처지를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호소하는 것 뿐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제발 북조선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주세요. 우리들 북조선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이제는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온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우리의 발로 걸어갈 수 있도록 희선이와 같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을 버리지 마시고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안겨 주세요.

-- 끝 --

2005년 4월 김춘석

자료제공 : The Daily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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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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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신 2006-03-06 16:29:23
    글을 잘보았습니다 우리주의를 잘보면 꼭희망을 가질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제가보기에 김정일도 절대적으로 망함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요 힘드셔도 여려모임에 많이 참석 하여 보십시요 길을찾고 가느라면 반드시 동맹자가있습니다 그때에는 할일이 많을겁니다 일은 어떤 일을하고 싶습니까 ? 우선생활이 안착되는것이 중요하지요 문제는 인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는것이 오래 걸리니까 시간을두고꾸준히 사느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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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길에서 2006-03-10 16:37:30
    이렇게 살고 있는 나자신이 정말 브끄럽구나
    우리 힘내서 함깨 살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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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훈 2006-03-31 02:19:22
    이 아이들 어떻게 되었나요? 뒷소식이 무척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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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성 2006-07-27 18:01:34
    이애들이 어떻게도였는지 아시는분 글올려주세요 어려서 고생많이했으니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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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2006-08-05 14:30:32
    보아니 이 오빠란 분이 동생보다 헴이 못들었구나. 자식처럼 보아서 공부하라고 욕한 사람에게 무슨 관게가 있어 간섭하는가 고 말하다니. 참 한심하다. 그런 성격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동생보다 못하니 참 공부 잘한 동생이 않됐구만. 형이 헴이 못들니 동생의 전도 까지 망치다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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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무보트 2008-05-23 22:28:26
    그동안 관심이 없어서 이제야 읽어 보았어요.. 글읽는 내내 눈물만 흘리내요 잘살고 있으니까 이글을 쓰셨겠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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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선 2009-01-01 05:57:57
    이날까지 나이드신 분들의 글만 읽다가 어린 남매의 꾸밈없는 글을 읽으니 자꾸만 눈물이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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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ip1 2012-03-09 17:16:28
    읽는 내내 너무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지내고 있는건지..
    한국에 들어 온건지..
    수기를 읽으며 탈북자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뜻을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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