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도 인간이다.(8) - 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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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전거리교화소 경험자 2001년 9월 입국 또다른 하나는 교화소에 미광가루라는 것이 있었는데 미광가루라는 것은 벼 껍질을 가루내서 만든 것이었다. 그 깔깔한 벼겨 가루도 먹지 못해 헤매이는 판이다. 그것도 참나무 한대차(2달구지량)를 나무하러 갈 때마다 짬짬이 모아 가지고 식당에서 그 겨가루와 바꾸어 먹는다. 사실 일하는 것이 힘들었고 그 나무를 하는 것 조차도 힘들었으나 그것까지 하지 않으면 제정량의 밥으로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 가루를 조그마한 천 봉지 속에 넣어 배에나 옆구리 등 뒤에 감춰 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프고 힘들 때마다 한술 정도씩 입에 놓고 먹는다. 그것조차도 떨어지면 한량없이 땅만 내려다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워낙 범죄가 모여 있는 곳이라 그들의 머리는 참으로 비상하고 왠만한 골이 좋은 사람은 찜쪄 먹는 정도였다. 호주머니를 교화소에서는 달고 다니지 못하기에 호주머니를 등 뒤에나 넙적다리 본 호주머니 자리 밑에 덧붙이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들키기라도 하면 밖에서 추위에 떨다가 한 시간 정도 지나야 들어 갈 수 있었다. 들키운 사람 한명이 그러하다면 별일이 아니지만 온 교화반 모두가 벌을 서야 했다. 들킨 죄로 인해 교화반 사람들의 미움을 사 반장이나 철호같은 조장과 떼살이라도 붙어 있는 놈에게 매까지 맞아야 했다. 매 맞는 정도는 그래도 조금 나은 것이다. 동복이나 바지에나 내복에 달았을 경우에는 호주머니를 단 옷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 추운 한 겨울에 동복을 빼앗기고 바지를 빼앗기고 하면 추위에 견디기가 더욱 힘들었다. 또한 그 옷을 바꾸어 입으려고 해도 밥을 굶어야 했고 매를 맞아가며 담배꽁초라도 주어야 했다. 정 그럴 힘까지 없는 사람은 죽으러 가는 길 밖에는 더는 다른 길이 없었다. 어떤 때에는 남의 삯 바느질을 해주며 조금씩이라도 얻어 먹어야 했다. 기껏해야 아침에 면식 먹으러 갔다 와서 그 사람 면식통이나 긁어 먹는 정도였다. 손바느질로 모자를 만들고 버선을 만들고 때로는 옷도 만들며 장갑가지도 자체로 해결해야 하니 면회올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가장 힘든 곳이었다. 모든 것을 밥을 굶거나 매를 맞아가며 꽁초를 주어야 했고 때로는 협잡이라도 쳐서 입어야 했고 항상 얼마되지도 않는 밥 한 덩이와 소금물로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죄수복도 없어 두터운 솜 동복 껍데기를 떼다가 입는 것에 신경 쓰고 조그마한 희망에 신경을 쓰는 우리였기에 살이 오를래야 오를 수가 없었고 죽지 않을래야 죽지 않을 수가 없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다. 교화소 안에서 희망이나 미래는 혹시나 혹간하는 개변이 되길 원하는 생각이다. 그 안에서의 생각은 혹시나 내가 살아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거의 절망 속에 남아 있는 자그마한 미련이었다. 사회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하지만 교화소에서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는 판이다. 그 무엇이던지 생명을 가진 짐승이나 식물이나 사람까지도 살고싶어 하는 미련이 있다. 죽음 외 혹시 희망이 있다면 뼈만 앙상하여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살아 남는다면 왠만한 사회 사람들은 모두가 악발이라거나 생활력이 강하다고 한다. 누구라도 이 글을 읽으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과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내가 직접 겪었고 느끼고 보고 들은 것이다. 눈이 내리는 날 우리는 원목하러 갔다. 원목이란 나무판자외 가구목으로 쓰는 나무로써 분비 나무를 했다. 직경이 약 35m∼60m 정도의 원목을 끌어야 했다. 혼자서는 거의 30리나 되는 수평길을 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3명∼4명에서 나무를 묶어가지고 30리나 되는 길을 끌고 왔다. 그것을 교화소까지 끌고 온 다음 나무껍질을 한 한키로 정도씩 벗겨낸다. 사실 벗겨내지 못하게 했지만 배가 하도 고프다보니 그 분비나무의 속 껍질을 벗겨 먹는 것이다. 일명 그것을 교화소 낙지라고도 했다 조금 풀기가 있고 조금 들큰한 맛이 났고 한참 씹다가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것을 먹을 때는 그럭저럭 먹기는 먹지만 먹고 난 다음은 변비에 걸리기가 쉽다. 병을 만날 때는 나더라도 아무것이던 먹고 보는 것이 기본이었다. 먹을 양식이 없는 곳에는 인간의 도덕과 양심마저도 없어지는 판에 교화소에서는 더했고 양심을 넘어 악으로 번졌고 악이 넘어서 협잡과 도적과 악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전거리 제12교화소였다. 봄이면 풀이 자라고 풀을 뜯어 먹기에 여념이 없다. 그 한겨울을 힘들게 죽음의 봉우리를 넘어 봄이라는 언덕에 올라선 것이다. 이까지 오기에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이 뒤를 따랐지만 봄은 과연 어떠할런지 몇 해씩 교화 생활을 해 본 사람이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한 겨울에 설사약이라고 가져오는 솔잎을 말려 그것을 가루 낸 다음 물에 이겨 가지고 한 숟가락 정도씩 주었는데 그 씁고 텁고 애린 것도 없어 못 먹는 판이니… 사실 아침마다 저녁마다 그것을 설사약이라고 가져왔는데 교화반 사람들은 너무나도 배가 고프고 힘들다 보니 누구나 그것을 먹으려고 했다. 한 숟가락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그것을 먹어서라도 조금이나마 주린 배를 채우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솔잎을 한 마대 들여다 방열판에 말리고 나면 나아 있는 솔잎은 말린 분량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먹은 음식을 도로 게워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 일명 새김질이라고 했다. 짐승 중에서 본다면 소나 염소가 한번 먹은 풀을 다시 끌어내어 입에서 씹어 먹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이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했다. 너무나도 배고프고 한번 먹은 음식이 너무도 값없이 씹어 삼킨 것 같기도 했고 너무 빨리 먹은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불과 몇 시간 밖에 안 되는 돌아오는 식사시간이지만 그 시간마저도 힘들고 배가 고파 먹었던 음식물을 도로 배에서부터 입안가지 끌어내어 다시 씹어 넘기기도 했다. 비록 맨 처음 먹을 때와는 달리 조금 시큼한 맛은 있었지만 그럭저럭 배고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또한 이렇게 새김질을 하다가 들키는 날에는 교화반 떼살 붙은 놈들에게 매 맞는 것을 둘째고 계속 그들의 증오 대상이 된다. 사실 그들이 새김질하는 사람을 보고 메스꺼운 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배가 불러서 그렇게 새김질 하는 것을 증오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질투 그것이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할줄 모르니 먹고 싶은 마음 앞에서 우리의 씹는 꼴이 사나와 보이었던 것이다. 또한 살점이 꽤나 붙은 놈들은 허약자들을 이런 방법으로 천대하며 궁상 떠는 놈이라고 한다. 궁상이란 일명 거의 불가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 같이 허약자들에게 긍상 떤다고 말할까? 그것은 단순하다. 자신들이 먹고 싶고 씹고 싶은 긍상을 우리 허약자들이 불어 넣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쯤한 것은 말로 안하면 마음 속으로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때리기까지 하니 육신의 고통이란 마음의 고통을 두 배로 뛰어 넘을 정도로 매 맞았다. 누구나 이것을 알게되면 거의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해 보았기 때문에 능히 깨닫지 못할 수 있는 경우가 더욱 많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능히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다. 또 궁상쟁이라고 하면 이런 일도 있다. 허약자들은 누구나 밥을 빨리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주먹떼 보다도 더 작은 밥덩이를 게눈 감추듯 먹어 버리고 나면 너무나도 아쉬웠기 때문에 그들은 천천히 먹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던 조금씩 입에 넣고 오래 씹으면 고소한 맛이 나기 때문에 적은 밥이라도 그 밥에 진맛을 느끼며 먹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 마저도 천천히 먹지 못했다. 반장이나 철호와 같은 조장들은 남들이 천천히 먹는 것을 보고 궁상에 빠진다며 달려와 밥을 마구 빼앗아 남에게 준다던가 회수하기까지 했다. 하도 연약한 허약자인지라 그 작은 밥덩이 마저 빼앗기고 나면 그 마음 속에 고통이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누구나 그런 허약자들의 심정을 느껴야 용서 할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허약자의 심정을 뻔히 알면서도 천대하고 박해 하는 것이었다. 그 박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다면 내 맘이 지금도 이처럼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괴롭고 힘든 것이었는지를 당신들은 믿고 이 속에 파묻혀야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잠에 들며 교화소 생활을 생각하면 이 작은 가슴 속에도 무서움과 저주와 그 고통스러운 악몽에 빠져 들곤 했다. 그 악몽 대문에 꿈속에서도 나타났고 흘러드는 달빛마저도 처절하고 힘들었던 교화소 악몽이 비껴와 나의 마음을 괴롭고 무섭게 만들었다. 혼자 캄캄한 곳에 앉아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교화소에서 죽어나간 영혼들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고 나의 곁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죽어가는 그들의 영혼을 가진 상 싶었고 나는 그 죽은 영혼에서 살아있는 영혼 같았다. 악몽을 깨야만 했다. 죽은 영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위로 받기 위해서겠지만 나는 그들의 그런 것 때문에 고통 받고 싶지는 않다. 그들에게는 미안하고 안된 일이지만 나는 슬프고 외롭고 고달프고 기쁜 이 세상을 더 살고 싶다. 나무를 30리나 되는 거리를 3∼4명이서 끌어야 하는 고달픔과 배가 고픔과 압박 당하는 슬픔을 평생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교화소를 더는 당하고 싶지 않다. 봄은 힘들고 고달픔을 안겨주는 계절이다. 햇풀이 자라겠지만 풀을 먹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풀이 생기는 대신 식량이 제일 박해질 때인지라 오히려 봄이면 배 채우기는 좋아도 육체적으로는 더욱 쇠약해지는 계절이다. 썩은 감자가 많이 나오는데 그 썩은 감자를 먹고는 모두가 부정이 오고 얼굴이 퉁퉁 부어 올랐고 눈이 가리워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이르며 조금 심하다면 목숨 같은 것은 우습게 빼앗아 간다. 배가 고프다 보니 아무리 먹지 말라고 해도 몰래 몰래 훔쳐 먹곤 했다. 순간의 배고픔 때문에 목숨을 버리겠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계속) 2006년 4월 김혁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죄수도 인간이다.(1) 죄수도 인간이다.(2) 죄수도 인간이다.(3) 죄수도 인간이다.(4) 죄수도 인간이다.(5) 죄수도 인간이다.(6) 죄수도 인간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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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런 참상에 대한 증언을 듣고 느꼈다. 내가 그속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증언... 잊히지 않는 지옥, 꿈속에서도 재현되는 참상...
책임감이 크다. 우리 국민 모두, 탈북자들도.
더우기 지도자들은 백배 큰 책임, 양심의 고통소리에 귀기울여
행동해야 하는 책임, 북한을 해방시켜야 하는 책임, 엄청나다.
우리 목숨이라도 바쳐 싸워 이겨 해방시켜야 할텐데...
너무 너무 안이하고 나태하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 어서 속히 권좌에서 내려오고
이 소리 이 신음 이 비명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나라를 통치하기를...
우리 모두 미력하나마 힘을 합하겠습니다. 건강하게 힘을 회복하세요.
악한 자의 종말이 머지 않습니다.
참으로 기가막히군..
정말 살아나온다는것 자체가 기적이네요,,,,
남은생은 다시 태어난것 값지게 보람있게 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