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한 추억 - 푸른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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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북에 두고온 수많은 기억들과 추억들을 때때로 돌이켜보며 과연 이 북한이라는 나라는 어떤 곳이며 김정일과 같은 광신자, 독재자가 어떤 인간인지를 생각해 보군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굶겨죽이고 공개처형해죽이면서도 눈썹하나 까딱 안하고 민족의 구세주라고 자처하는 그 김정일은 과연 어떤 인간일까? 또 내가 몸으로 보고 느끼며 살았던 그 땅의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참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이니 이젠 그 애의 생사도 모르고 또 알 길도 없지만 인생의 스침처럼 만났던 한 거지소년에 대한 기억을 나는 떨쳐버리지 못한다. 내가 고등학교 5학년쯤 됐을 1999년이었다. 당시 평양에서 살던 나는 여행차로 지방을 다녀오려고 평양역에 나갔었다. 가장 힘들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에 쓰러지던 그 시절 역전마다 거지(꽃제비)가 차고 넘쳤고 각종비리며 범죄들이 무수히 벌어져 낮길 조차 두려웠던 그 시절! 그때의 참담함을 기억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치군한다. 그나마 평양에서 살았던 나여서 당시 그렇게 많은 거지들과 거리에 넘치는 시체들을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참담함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많지는 않으나 외국인들도 오고 또 혁명의수도 김정일이 살고 있는 곳이라 도시미화를 운운하며 거지들을 마구 잡아서 수용소에 보내던 평양 이였으나 그 짬에도 어린 걸식아동들과 거지들은 장터와 역전을 누비며 다녔다. 기차가 연착되여 며칠을 노상에서 보내야하던 시절! 콩나물시루처럼 꽉 찬 열차안에 볼일도 볼수 없어서 선 자리에서 신체의 순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나는 참으로 불쌍하고 가여운 어린 친구를 얻었다. 12살 난 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작고 연약한 어깨, 여윌 대로 여위여 마치 죽을병이라도 앓고난듯 피기 없는 피부, 어디서 주어 입었는지 다해진 어른의 윗옷에 꿰여진 운동화를 신고 있던 소년! 그야말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부적절한 그런 때국물이 흐르는 소년이었다. 역 홈에 주저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내앞을 멀리서 빤히 바라보는 그를 보며 나는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 아이를 불러놓고 먹으라고 수저를 쥐여져도 머뭇거리기만하고 차마 밥을 먹지못하는 소년의 수줍음에 나는 불쌍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먹다 남은 찬밥 한 덩어리에 그렇게 감사하는 애를 보며 나는 이상한 호기심이 들어 못된 짓을 하고야말았다. 이렇게 굶주리며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살아야하는 이런 애들에게도 솔직하고 고마움과 같은 인간의 본성이 남아있을까? 나는 그 소년의 손에 100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며 과자를 사오라고 시켰다. 당시의 100원이면 아마 그런 소년들은 2~3일은 살았을 돈이였다. 나는 그 애가 돌아오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 애의 마음을 보고싶은 그런 자잘한 충동 심에 한 행동이었다. 몇 분후 그 애가 내 앞에 돌아왔다. 손에는 사오라고 시킨 과자와 거스름돈이 들려있었다. 그때 나는 그 어린소년의 솔직성과 때묻지 않은 그마음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 아이를 존경스럽게까지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처지라면 그 소년과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는 장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소년에게 상당히 큰 호기심을 느꼈으며 왠지 구면같은 그런 심정에 휩싸여 그와의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나 : 집이 어디니? 소년 : 평북도 구성이야요. 나 : 오~ 참 힘든 곳이지, 부모님은 계시니? 소년 : 살아계신지는 모르고 그냥 다 헤어졌어요. 나 : 형이나 동생은 없냐? 소년 : .... 순간 명랑하게 보이던 소년의 얼굴에 그늘이 졌고 나는 이때 이말을 물은 것을 정말로 후회하였다. 그 소년이 살았다던 그곳은 식량난이 가장먼저 닥친 곳이고 단순히 직장생활만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아와 아사에 몰아넣은 북한 최대의 아사지역이었다. 그때부터 그 소년의 소설 같은 인생의 길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소년과 같이 울고 웃으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 소년의 부모님들은 북한 군수공장의 노동자들로써 고지식하고 하라는 일밖에 몰랐던 그런 양심적인 분들이셨다. 1995년 이후로 들이닥친 식량난도 그 소년의집을 지나칠 수는 없었고 그때부터 소년의 파란만장 인생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집안의 가장집물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흑백TV로 시작하여 재봉기, 오디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단다. 나중엔 밥그릇과 수저, 이불천까지 모두 팔았다. 그래도 식량난은 줄어들지 않았고 나중에는 집까지 팔게 되였으나 집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그곳에도 부지기수라 단돈 100원에도 팔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엔 옆집사람의 동의를 얻어 4식구의 도시락을 얻는 것으로 집은 팔렸다. 바람 부는 사거리에 서서 그의 아빠가 하시는 말씀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나 모두 살아는 남아있어라. 이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올게. 그러니 우리 1년 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헤어지지 말고 다 같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자.” 그리하여 그 소년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7살 난 어린동생의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그나마 어린애들은 불쌍하여 동냥도 할 수 있고 마음착한 분들을 만나면 빵이라도 하나 얻을 수가 있어 소년은 동생을 데리고 정처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열차에서 역전에서 장거리에서 그 소년이 먹어보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어린동생을 위해 참고참고참았던 배고픔을 어떻게 말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인생의 행복이 오직 배부름과 따뜻함만으로 생각했던 소년의 인생! 끝내는 어린동생이 병에 걸려 죽고 그 어린나이에 동생의 죽음을 감수해야했던 그 슬픔을 이글을 쓰는 나도 다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생을 나지막한 산기슭에 거적때기에 싸서 묻을 때 그 자그마한 손이 뭉개지도록 땅을 파며 피눈물과 함께 동생을 묻을 때 나는 끝내 그 소년을 껴안고 같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것까지가 내가 그 소년에게서 들었던 파란만장의 인생 길이었다. 그이후로 나는 그 소년과 가까운 친구가 됐으며 매일 그와 한두시간을 보내는게 일과가 되었다. 무척이나 추웠던 2000년 겨울 그 소년이 나에게 작별인사라고하며 찾아왔다. 아빠와 약속했던 1년이 몇칠 안남았다며 이제다시 가족을 만나면 그때는 집을 안떠나서 살겠다고 했다. 섭섭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 소년의 손에 얼마간의 여비와 도시락을 주며 말했다. “그래 이제 엄마 아빠 만나면 다시는 헤어져 살지마라. 그땐 똑같이 행복해지어라.” 희망에 웃음 지으며 떠나는 소년을 바래우며 나는 소년의 행복을 빌었다. 10개월 후, 문득 그 소년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반가움보다는 소년의 어두운 안색에 걱정하며 물었다. ……. 결국엔 그 소년의 아빠 엄마도 돌아가신 것이었다. 찬바람 부는 그 사거리에서 하루 이틀을 기다려도 아빠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고 타지방으로 장사를 다니시는 어르신이 거의 아사지경에 이른 그의 엄마 아빠를 어디선가 봤다고 한다. 결국 다같이 모여살고 싶었던 그 소년의 작은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참담함, 답답한 심정, 참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소년을 위로하며 내가 네 친형이 되어줄테니 걱정 말라고 그렇게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힘을 내서 살자고 위로를 하면서도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소년과 또 한참을 울고야 말았다. ……. 그 소년을 집에 데려올 수는 없었으나 나는 그의 배고픔을 어느 정도 덜어줄수는 있었다. 어릴 적 입던 내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면서 나는 그 애를 돌보았고 그때마다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하군 하였다. 3개월 후, 매일처럼 만나던 소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열흘이 지나도 그 소년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걱정에 역무원들을 통해 알아보니 도시미화를 한다고 역 앞에 있는 걸식아동들과 어른들을 모두 수용소로 실어갔다고 한다. 그때처럼 허전했던 적 그때처럼 그 누구를 걱정했던 적이 아마 없을 것이다. 하루 200g도 안되는 식량으로 산다는 애들, 오히려 빌어먹고 훔쳐 먹는 게 나아 도주를 시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사회의 불합리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 소년과 끊어진 나와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애가 살아있고 꼭 행복해지리라 믿는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행복한날 보게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또 그런 불쌍한 애들을 만들어놓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김정일을 미워하기도 한다. 나는 가끔 김정일에게 이러한 물음을 던지며 살기도한다. ............. 21세기의 태양이라고 자부하시는 장군님, 당신이 비추는 그 나라가 21세기에 가장 어둡고 암흑천지인 땅이라는걸 아시나이까? 솔직하고 소박하신 장군님! 솔직하신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기꾼에 거짓말쟁이라는걸, 당신이 먹고 쓰고 있는 그 돈이면 그 땅의 걸식아동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는걸 아시나이까? 인민의 충복이고 인민의 말이면 하늘에 별도 따오신다는 장군님! 당신이 주인이라고 섬기신다는 그 인민들이 당신 때문에 굶어죽고 얼어죽고 수용소에서 죽으며 당신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땀을 흘리며 당신의 한마디 때문에 정말로 하늘에 별이라도 따바치지 않으면 죽는다 는걸 아시나이까? 눈물이 많고 불의를 참지 못하신다는 장군님! 당신이 지킨다는 그 정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악이며 당신이 흘린다는 눈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치 못하고 성스럽지 못한 눈물이라는걸 아시나이까? 나라의 미래는 아이들이라고 나라의 왕은 아이들이라고 말만 잘하시는 장군님! 당신이 미래라고 하는 아이들이 길가에서 굶어죽고 장거리에서 떨고 있으며 그 왕들이 당신을 원망하며 살고 있다는걸 아시나이까? 같은 동족이라고 푼돈을 모아 굶주리는 어린이들과 국민들을 먹이라고 보내준 남한의 쌀을 모두 군대와 자신의 향락을 위해 쓰면서도 남한에 대한 환상은 죽음이라고 위협하는 장군님! 당신이 과연 조선민족의 일원이며 통일을 원하는 동족상쟁을 원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나이까? 가장 청렴결백하고 소박한 삶을 살며 강냉이 죽에 좨기밥을 드신다는 장군님! 청렴결백한 당신의 비자금이 40억불이 넘고 당신이 드신다는 강냉이 죽과 좨기밥은 어떻게 생겼기에 그 배가 들어갈 줄 모르고 계속 나오고 있으며 당신이 사는 별장은 중세 어느 왕도 누려보지 못한 사치의 극치이라는걸 아시나이까? 아신다면 대답을 해보세요. 과연 그 지옥과 같은 땅을 만들어놓고 당신이 자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하늘이 두렵지 않나이까? ............. 나는 말하고 싶다. 이런 불쌍한 어린이들 불쌍한 국민들을 만들어놓은 김정일에 대한 환상은 죽음이다. 이런걸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외치고 다니며 백전백승하는 사회주의라고 거짓말하는 거기에 속지 말라. 지금껏 만들어오고 지켜온 자유가 귀중하거든 김정일과 타협하지 말라. 2006년 5월 29일 푸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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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살다와서 평소에 보던모습이고 익숙한 풍경이지만 옛기억들이 떠오르고 분노가 치밉니다.
그 소년은 잘살고있을가요?
탈북이라도 했으면 잘살고 있을 가능성은 있는데
용기 잃지 마지고 더 열심히 남한 사람들에게 김정일의 사악함을 알려야 합니다.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비참한 북쪽의 실상을 알고 바르게 대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 잔인하군요 그러나 당신은 그
어느누구보다 따듯한 마음을 지니셨군요
푸른바다님 글 읽고 너무 눈물이 나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굻어죽어간다는 북한동포들의 이야기를 보도나 언론을 통해 들었지만
실감이 않났는데 이곳에 와서 푸른바다님 외 많은 탈북자 수기글들을
읽고나니 이제서야 절실히 실감이 갑니다.
언제쯤 우리 북한동포들에게 배고픔의 지옥에서 구해줄 날이 올까요..
그저 막막한 현실에 또 한번 눈물이 납니다
님의 글이 특히 김정일에게 보내는 글을 읽으면서 통한의 눈물이 나네요..
푸른바다님 이곳 한국에서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