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한사회 체험기 - 정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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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월이 흘러 내가 대한민국에 온지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난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2/3정도는 변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양에서도 명문학교인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철도대학에 입학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외국에 유학 갔던 형님이 한국행을 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아침에 혁명가 유가족으로부터 민족반역자 가족으로 취급되어 머나먼 북방의 탄광마을에 추방되어 약 7년간 최악의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그동안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북방의 탄광마을에서 추방자 가족으로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선로보수공으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래도 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면 기술 한 가지라도 취득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온몸이 꽁꽁 얼고 부르트면서도 수수떡 같은 전등 밑에서 대학통신교재로 공부하여 6년 만에 평양철도대학을 통신으로 졸업하고 전기공학기사의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한갓 공상에 지나지 않았고 나의 생활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러던 중 한국에 먼저 온 형님의 도움으로 1997년에 한국으로 오게 되였다. 한국에 와서 보니 모든 것이 마치 영화 속 같아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긴박한 순간에서도 나는 북한에서 받았던 대학졸업증과 기사자격증을 챙겨가지고 왔는데 그때 생각에는 그래도 제나라 제 땅 인데 어디에 가서나 유용할 것 같았고 그만큼 나에겐 중요한 것이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먼저 한국에 온 형님 친구가 한국 사장과 함께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온갖 잡심부름도 다하면서 한국 음식문화와 생활풍습을 익히려 하였다. 그런데 사장이 3달째 월급을 50만원씩 주고 하루는 왜 이렇게 적게 주는가 하고 항의하니 “한국에서는 돈 벌기가 힘들다, 처음부터 힘들게 돈을 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형님 친구 분을 믿고 들어갔던 것이고 그 분이 따로 차비를 보태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가 가진 기술자격증을 가지고 통일부에 찾아갔다. 취업희망이 철도분야라고 하니 건설교통부에 가라고 해서 거기에 가니 철도전문대학에 가서 교수들한테서 자격증에 해당한 기술사항을 점검 받아 오라고 했고 며칠을 다니면서 기사 확인증서와 동일한 효과를 인정하는 확인서를 받았다. 또 이때 한국 인력관리공단에도 찾아갔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철도청 인사과에 찾아갔더니 하는 말이 청사 보이라 견습공 임시직으로 6개월 일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어 “왜 대학 졸업장과 기사증이 있는데도 그러는 겁니까?” 라고 항의하니 탈북자들은 일을 시켜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문서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 다음해인 2000년에 늦은 나이지만 연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였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대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였기에 눈물을 머금고 악착같이 공부하였다. 대학에서는 신문방송학과 영상예술학을 공부하면서 지식을 쌓는 한편 남북한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대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고 친구를 사귀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다른 학생들과 7~8년 정도의 나이차이도 문제이지만 서로 판이하게 다른 생각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 소통하는데 어려움도 많았고 교수님들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해 옆의 학생에게 물어보면 모른다고 (상대평가라 나에게 정보를 알려주면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지만) 말할 땐 정말 외진 섬에 홀로 남겨져 있는 심정 이였다. 그러나 나 자신을 낮추고 또 적극적으로 알리고 진심으로 이들에게 다가갔고 비로소 진정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대학생활이 즐거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해마다 탈북자들의 숫자가 늘어나 3자리 숫자를 넘어서고 그들이 본의 아니게 온갖 범죄에 연류 되고 또 법을 몰라서 허둥대다가 역시 경찰서 문턱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라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대학공부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법과대학 전 과정까지 마치고 내년 2월이면 전공 3가지 모두 마치고 졸업하게 된다. 물론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큰 대수냐 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되였다는 것은 정말 자랑할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힘들게 마친 대학생활을 나와 비슷한 처지의 후배들도 그대로 어쩌면 더 많은 어려움을 겪으리라 생각하여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결과 대학에 처음으로 “통일한마당”이라는 동아리를 만들고 이것을 2년간 운영하고 지난 9월에는 중앙동아리로 가등록 신청까지 마쳤다. 이렇게 되면 내년 9월이면 중앙동아리가 되며 동아리 방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대학에서 특히 젊은 대학생들에게 우리들의 존재를 알리고 또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 성과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동아리를 통해 선배들과 후배들이 서로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어주고자 노력하며 후배들이 대학생활과 한국사회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일념으로 전국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탈북대학생들의 모임인 “통일교두보”에 동참하게 되였다. 실제로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대학생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이 내가 하여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였고 또 그런 과정에 내가 더 크게 성장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7월에는 이들과 함께 국토순례로 두고 온 고향땅을 바라보고자 중국을 통해 두만강에서 압록강까지를 다녀왔다. 나의 인생에서 순례는 두 번 있었는데 한번은 전국대학생 155명과 함께 2001년에 한 비무장지대 155마일 순례였고 다른 한번은 이번에 다녀온 중국 순례였다. 두고 온 고향땅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친구도 있었고 백두산 정상에 올라 목청껏 소리치며 눈물짓는 친구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나에게 조국통일의 한길에서 온몸 바쳐 투쟁하여야 할 사명감과 한국사회에 북한을 제대로 인식하게 하여 통일의 그날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데 온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지금 대학을 졸업하게 되는 시점에서 나의 지난 한국생활을 돌이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더 많이 줄 것만을 요구하였다면 지금은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만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또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여 남에게 마음을 주면 줄수록 나에게 더 많은 기쁨과 사랑이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방법도 배워 지금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이제 사회에 나가면 그동안 나를 이렇게 키워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사랑에 보답하여야 하겠다. 특히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최우선해야 하겠다. 대한민국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은 물론 통일조국의 디딤돌이 되고자 앞으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정남 탈북대학생모임 통일교두보 부회장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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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부럽네요 나또 빨리 한국으로 가서 대학을 다니고 싶은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가요 ,, ㅠㅠㅠ
그래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라기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이 남한 사람들의 의식을 많이 지배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지요.
그러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시던 분들이 첨에 바로 이해하고 적응하시기는 힘드실 겁니다.
끊임 없는 공부와 노력을 하여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수 있다라고 표현한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끊임 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더라도 그냥 저냥 먹고 사는 정도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렇게 해도 실패를 할 수도 있는 것이 남한 사회입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있겠지요. 그러므로 좋은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식견과 안목도 아주 중요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 모두 잘 이루시길 기원 드립니다.
이렇게 된데에는 1929년 부터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K.Marx의 예상되로 되었기 때문에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서는 드디어 이념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공산주의가 승리한 것으로 생각했었죠. 그러나 그때 자본주의는 다시한번 큰 발전을 겪게 됩니다. 바로 케인즈라는 경제학자에 의해서지요.
고전학파인 I.Fisher 또는 당시의 Harvard대학교의 경제연구소등에선 "곧" 경제가 좋아질것이라고 뉴욕타임즈신문등을 통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 라는 "세이의 법칙"에 의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비는 이자율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이자율은 매우 낮았는데요, 따라서 사람들은 저축보다는 소비를 하게 되며,곧 경기가 좋아질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케인즈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이의 법칙보다는, 수요(소비)가 있어야 공급이 생긴다고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비는, 국민소득계정항등식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우리나라의 경우엔 약50% 를 넘고 있습니다.) 소비는 이자율이 낮아진다고 살아나서 경기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대공황의 처방은 소비를 살리는 것이였고, 소비를 살리려면, 국민들의 소득을 올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민들의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서 정부의 지출을 먼저 올려야한다고 생각하고서,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Theodore Roosevelt 에게 정부의 지출을 적극 권유하는 편지를 썼습니다.(돈항아리를 땅 속에 묻어 놓고선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파서 갖고 가게 해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공공건설사업이 전국적으로 추진되기도 합니다(미국내 수많은 유명한 댐과 교량, 고속도로등 사회기반시설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때 건설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돈항아리를 파서 갖을 수 있게 땅을 파게 한거죠.
이러한 케인즈의 생각은 그의 '일반이론'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책에 담겨져 있으며, 지금 생각할땐 별 것이 아니지만(어찌보면 당연하지만), 당시로서는 소비를 절대소득의 함수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혁명적이였습니다.
공황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파멸할 것이라고 한 K.Marx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제대로 지적했지만, 그에 대한 처방책을 제시하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케인즈는 그러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현실적인 처방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의 등장을 '케인즈혁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 네이버지식인)
결국 케인즈의 경제학은 공공부문 뿐 아니라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경계했던 시장에서까지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자본주의에서 대표적 "악"으로 생각했던 "정부의 역할"을 자유시장경제체제에 삽입하였습니다. 즉 수정주의가 된것이지요. 심지어 북유럽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서 복지를 강조하는 사회주의 정책까지도 등장하였습니다.
반면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은 그들이 직면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점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공산권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구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실용주의를 들고나왔을때에는 이미 늦어버렸던 것이죠...
이런 불굴의 의지만 있으면 못해낼 일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진 몰라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꼭 승리하리라 믿습니다.
화이팅 ^.^
동아리 할동으로 많은 젊은이 들에게 북한의 현실을 알려야 합니다.
한국은 북한의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더 힘든 일이 많이 있을 지라도 힘내시고 꼭!!! 승리 하시길 바랍니다.
정남씨 화이팅!!!
화이팅 ~~(^.^)~~
앞으로도 우리의 본보기기 되여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