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도전끝에 성취한 소중한 열매 - 조경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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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원을 나온지 거의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살길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던 나와 딸애를 따뜻이 받아 안아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감사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간다. 돌이켜보면 가슴이 너무도 아프다. 굶어 다 죽게 된 어린 딸애 하나만을 살릴 작정으로 무작정 마을 앞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와 벼라별 고생을 다하던 걸 생각하면 말이다. 그 과정에 나는 사랑하는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낯 설고 물 설은 남의 땅에서 격어야 했던 삶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들은 과연 누구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우리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으려 이렇게 남의 나라에까지 들어와 온갖 고생과 천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를 터득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두 넘게 고향 길을 걸었고 아버지와 동생들을 만나는 상상을 하였다. 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길. 언제면 고향으로 돌아갈가? 언제면 아버지와 동생들을 만날 수 있을까? 과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일생을 정치범으로 살아오신 아버지와 말도 안 되는 연좌죄를 강요당해 평양을 떠나 깊은 산골에서조차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던 고향생활, 항상 엄격한 차별을 받으며 살았던 그곳에 대한 원망과 적의도 있지만, 제일 사랑하는 곳,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곳은 그래도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무르녹아 있고 , 현재 나의 부모형제들이 살고 있고 고향일수밖에 없었다. 우리민족의 절반 땅 북한, 사랑하는 고향이 이제 통일이 되면 나는 할 일이 많다. 굶주리고 병든 형제들을 먹이고, 병 고쳐 주어야 하고 남한에서 배웠던 것들을 이제 하나하나 배워주어야 한다. 남한에서 받았던 모든 사랑들을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 나는 그래서 열심히 배워야 한다. 비록 실패와 좌절이 층층첩첩 앞에 놓여있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내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였고, 마음속 결심도 굳게 다졌다. 지금까지는 주인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바다에 놓아준 새끼고기에 불과하여 먹이도 내가 자체로 구입하고 어린 딸을 키우면서 인생계획도 내 자체로 짜야하며 많은 종류의 고기들과 도 잘 어울리면서 바다에도 익숙해야 하는 그런 새끼고기가 된다고 생각하니 내라는 존재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반혁명분자의 자식이라 그렇게 하고 배우고 싶었어도 이룰 수 없었던 귀중한 소원을 대한민국에서 풀어보리라. 나는 희망에 부풀어 서울의 한 정보기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컴퓨터를 배우게 되었다. 진행 중인 강의에 열심히 참가하면서 시간을 틈내 워드프로세서 1급 기능사 자격시험에 도전 하였다. 먼저 필기시험을 쳐야 했는데 배우는 용어들이 머리에 잘 익혀지질 않아 어떤 날은 온밤을 꼬박 밝히기가 일수였다. 정말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론시간에는 두 눈과 두 귀가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칠판을 떠나지 않고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억하기에 바빴다. 선생님도 나의 노력에 감동하였다. 결국 두 달 만에 그렇게 어렵게만 여겨지던 필기시험을 단 방에 통과하였다. 나는 정말 사기충천하여 다음 단계인 컴퓨터 워드기능사 실기시험에 도전하였다. 그런데 필기시험을 너무도 쉽게만 생각했던 실기시험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한번, 두 번 계속 탈락으로 이어졌다. 탈락이 거듭되자, 내 능력은 아마 여기까지인가보다 생각되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다. 새롭게 공부를 시작해서 제일 힘들었던 시기가 아마 이 때였던 것 같다. 네 번째 실기 시험을 치르던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며칠 전에 긴장을 풀어준다는 약까지 사가지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마음 다잡으며 시험장에 도착한 나는 낯익은 시험장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보는 순간부터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심정을 느꼈다. “어~ 또 왔네. 저번 시험에서 또 떨어졌나보지”, “소학생들도 쉽게 합격하는 시험을... 나이도 있어 보이는데 부끄럽지도 안나보지”하고 비웃는 것 같아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대로 시험장에 들어가 앉아 시험이 시작되자 온 몸이 떨리기 시작해 왔다. 도저히 글줄을 읽을 수 없었고 , 온 몸이 진정되지 않고 굳어져 키보드 작업을 하는 내손은 시험 내내 덜덜 떨며 있었다. 시험을 어떻게 끝냈는지 시험장을 나서는 나는 그냥 온 몸이 나른해져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낙심과 자성에 골똘하다보니 길까지 잃었다. 어디까지 왔는지 둘러보니 낯 설은 역이였다. 내려서 보니 반대방향으로 한참 와 있었던 것이다.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또 네 번째로 불합격을 하였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내 딸의 얼굴 쳐다보기도 민망스러웠다. 시험을 치러 갈 때마다 “엄마 이번엔 꼭 시험에 합격할거예요. 난 엄마를 믿어요! 힘내세요. 파이팅! ” 하면서 바래주던 어린 딸을 태연하게 마주 볼 힘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그냥 남들이 하듯이 시키는 일을 하고 돈이나 벌고, 딸의 뒤 바라지나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북에 계시는 아버지와 동생들 목까지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일념이 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시험에 떨어지게 된 이유를 곰곰이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자격증에 연연하면서 실기 시험을 너무 싶게만 생각하지 않았나, 혹시 내가 남보다 먼저 자격증을 따려는 급한 마음에 연습이나 노력은 크게 들이지도 않고 좋은 결과만을 얻으려 했다는 자책감이 꽉 차들었다. 결국 국가 기술자격을 세 개 이상 따고 졸업하겠노라 큰 꿈을 꾸었던 나는 자격증 하나도 따지 못한 채, 결국은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비록 내가 계획했던 국가기술 자격증은 하나도 딸 수 없었지만 열매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리치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섰다. 실기시험을 통과하려면 우선 키보드 타이핑 속도부터 결정적으로 높이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한글 타자연습에 열을 올렸다. 밤낮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났다. 지금은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다른 전문교육학교에서 웹디자이너를 공부하고 있다. 본래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꿈꾸어왔던 나는 열심히 배우면서도 타자연습도 중단 없이 진행하고 있다. 땀 흘리는 농민에겐 꼭 풍성한 가을이 오는 법, 나는 지난달에 진행된 다섯 번째 실기시험에서 드디어 2급에 패스했다. 처음으로 이룩한 성취물이라 모든 것이 소중하고 긍지스럽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언젠가는 꼭 나의 워드1급에 합격하여 첫 열매인 자격증을 취득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통일이 되면 북한의 내 고향의 재건을 위하여 나도 무엇인가 한 몫 당당히 해야 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나는 지금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 것 이고 대한민국의 좋은 것을 많이 배워 훌륭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이렇게 생각하면 새벽 2시가 다 되어오는 이 시각에 졸음도 물러가고 희망과 꿈만 내 가슴에 가득 차 들어온다. 나는 늘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마냥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지낸다. 2006년 6월 20일 조경애(하나원 73기)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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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님의 수기 잘 읽었고요. 삶의 목적이 학업적 성취를 갖고 계신 듯 한데, 혹 도움이 조금 되지 않을까 싶어 적어봅니다
저 또한 전산쪽 전공하여 관련한 직업에 있기에 개인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워드자격이나, 웹디자인 자격은 단순 기술학교 형태에서 취하였을 때 대한민국은 그 활용도가 매우 작습니다. 더 솔직히 말해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채팅만 할 줄 알면 300타 이상치며, 웹 아이디를 가진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블로그나 싸이홈피등의 기본적 웹디자인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한국에서 살다보면 갖춰지는 기본능력일 뿐 사회생활에서 우위에 서기 어려우며, 직장에서도 가산점은 거의 못 받습니다.
다만, 웹디자인 부분에선 탁월한 감각 또는 탁월한 html 작업능력이 있다면, 조금 도움은 되겠지요.
그래서 드리고 싶은 이야긴..
탈북민들껜 제가 알기로 대학에 특차전형 형식의 가산점이 크게 작용하며, 많은 탈북민들의 수기를 통해 보셔도 아시겠지만, 한국인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일명 명문대에 까지도 많이들 다니고 있습니다. 즉, 경애님께서 학업에 뜻이 있으시고, 필기에 능하신 능력으로 보아, 전산관련 된 학과에 입학하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대학에서 전공하시면 자격증의 전문성이 보장되고, 직장생활에서의 능력활용도 훨씬 수월하며, 전문가로서의 성장이 빠릅니다.
혹시 따님교육과 더불어 생계에 중요한 직장생활이 불가피하시다면, 야간대학이나, 전문대를 택하셔서 시간적 활용을 하시며 생활하시는 것이 좋다고 보입니다.
노력하시는 모습의 글로 보였기에, 그 노력의 시간과 방향을 조금 바꿔서 어렵더라도 조금만 더 미래를 위한 투자임을 생각하시고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생각합니다.
물론 탈북인 많은 선배님들의 조언을 곁들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경애님의 행복을 응원하며, 아자 아자~~~~~
알게되어 좋았습니다.
위엣분 말씀대로 워드가 크게 취업에는 도움이 안될 것 같습니다.
아직 젊은 분 같은데요 꼭 국내 대학에 진학하시길 기원합니다. 유아교육과를 추천하고 싶구요 혹시 운동을 잘하신다면 요가나 에어로빅 강사등도
다른직장에 비해 수요도 있고 나중에 자기 사업도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녀교육에 많이 신경쓰셔서 행복한 삶 사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몇살인지 모르겠지만 유치원이나 학원 많이 보내싶시요 본인은 힘드시겠지만 자녀가 훌륭하게 성장하면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저도 북한 사람입니다
전 지금 중국에 있어요 한국에 어떻게 갈수 있었는지 알거 싶어요
도움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정말 제자신이 성공하여야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그런 존재가 될수있을것같아요.. 조국을 잘못만나 그렇지 우리탈북자들도 정말 사회에서 소중한 존재입니다. 누구도 부정할수없는 사실이구요..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아요..^^
안봐도 마음이 누구보다 부자고 따뜻한 분이라는게 글에서 느껴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힘네세요..
물론 한국오는길은 진짜로 많습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더많습니다.
또한 위험이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한국에 정착하여 살려고 하면 돈뜯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하니 제발 한국 대사관 들어가세요
대사관들어가서 오세요
요즘은 신분증만 있으면 대사관 들어갑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무사하시길 빕니다.
그런데 잘못된 표현이 있어서 지적합니다
연좌죄 가 아닌 연좌제 입니다^^
이것을 잘 몰라서 브로커들한테 많은 돈을 뜯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으셔서 대사관이나 기타 다른 루트를 찾을 수 있도록요. 꼭이요.
HTML을배우라고하여 HTML 태그책을사서 쉬운것부터배우며 반복해서 웹만드는방법을알게되고 블로그를시작했지요남의것을 스크랩해서가져다놓고 어떻게만들었나 하고소스를 보면서 공부를계속했지요그러나끝이없는게컴이람니다 사진도올리고아래에글도쓰고 또 마퀴를이용하여영상시도만들고해봤지요 지금은 다녀간연인원이5216만명이넘어요
아직도멀었지요 스위시 나 스라이드를만들려면더공부를해야함니다
제블로그에한번들어와보세요 야후에서버전을바꾸는바람에 메뉴를많이삭제하고
이제는 몇명들어오지도않고그전에는하루에2천명-3천명이들어왔었음니다온세계사람들과 소통을하고있지요 주소는아래
http://blog.yahoo.com/_FBBMMG7XMMEUPCEB32JUG3N5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