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만분의 1 - 최금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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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제1차 정착사례 수기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2000만분의 일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97년은 14살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친구들과 공부하고 비록 배고픔이 많았지만 고향을 떠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탄광마을 아오지에서 자란 나는 4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친구들과 강가에 나가 홀랑 벗고 수영도 하고 뒷산에 올라가 살구도 따먹고 가슴에 커다란 종이꽃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내 나라 내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란 나에게 고향은 떠날 수 없는 곳이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급속도로 굶주림이 시작된 시기에도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이 고난만 넘기면 좋은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어린 나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부모님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14살 어린 나는 부모님 없이는 하루도 못살 것 같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을 따라 97년 2월 차가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낯선 땅 중국에서 우리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어서 지내야하는 신세였고 경찰들만 보면 죄인마냥 숨어야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때론 쫓기기도 하면서 우리 가족은 한국행을 시도했다. 대사관도 들어갔다가 중국 돈 500(한화 55000)원을 받고 나와야했고, 러시아를 통해 가려다가 얼어 죽을 가능성이 많다는 권유로 또 다시 길을 떠났고, 배를 타고 오려다가 3일 동안 바닷물을 실컷 먹어야 했고,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 감옥까지 갔어야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이 불쌍했는지 풀어주었고 한국행을 포기하고 일 년 동안 딸 셋이서 일을 하여 집안 살림과 막내 남동생을 학교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의 안전은 누구도 보장해 줄 수 없었다. 그러다 2001년 우리 가족은 다시 한 번 한국행을 시도했고 중국 남방을 거쳐 미얀마를 통해 우여곡절 끝에 한국행에 성공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나도 감정이 솟구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눈물도 잠시 우리를 맞으려 나온 한국 정부 사람들의 딱딱한 태도에 순간 긴장을 하였다. 죄인마냥 똑바로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몸수색과 어려가지 검열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18살 나에겐 싫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사……. 집이 어디이고 어떻게 살았고 중국에서 무엇을 했고, 식당에서 일했다고 하니 밤에만 일하는 업소가 아니냐고 묻기도 하였다. 그것보다 더 기가 막힌 질문은 부모님이 진짜냐는 것이었다. 순간 한국에 대한 나의 환상은 찬물을 끼얹듯 사라졌고 남은건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선생님은 자식이 없습니까?” 그러자 질문을 하던 선생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부드럽고 친절한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동안 나는 한국에 대하여 많은 것을 몰랐다. 그랬기에 아직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나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그렇게 조사를 끝내고 하나원이라는 곳에서 3개월 동안 지내야 했다. 한국사람, 북한사람, 한반도 한 민족이라는 말이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달라져 있었다. 북한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한국 사람이 많았고 미디어에서 보이는 북한 사람은 배고픔에 굶주리고 그래서 탈북을 시도하고 중국에서 사람취급 받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북한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북한사람이라고 하면 놀라는 건 기본이었다. 그래서 하나원은 아직도 외부인 출입금지이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하나원에 있는 사람들을 무섭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원에서 배운 건 솔직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내가 받았던 한국에 대한 나쁜 시선으로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디를 가야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나원을 졸업하고 서울에 우리 가족은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하나원에서 준 가방 몇 개와 옷가지 몇 개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집이 생기고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마을이 생겨서 기뻤다. ‘그래……. 이제 시작인거야. 공부도 할 수 있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어 이젠 나도 떳떳한 한국사람 인거야.’ 마음속으로 여러 번 다짐 하면서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를 담당했던 형사님을 따라 점정고시 학원에 등록한 나는 학원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설렘도 잠시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한국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그만 기겁하고 말았습니다. 수업시간에 몇 번씩 들락거리고 쉬는 시간에 14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고 어린 여자아이는 진한 화장에 담배까지 어머니가 준 학원비를 노는데 써 먹기까지……. 처음 중국에 넘어가서 비키니 입은 여자 사진을 보고 팔려가는 줄로만 알았던 순진한 나는 어느 정도 중국에서 살면서 익숙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러한 모습을 처음 접한 나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저런 아이들이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 놀릴까? 그래! 분명히 놀릴 거야. 아무도 나와 친구가 되지 않으려고 할 거야…….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2달 만에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 돈을 벌거야. 돈이 많으면 누구도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 거야.’ 무작정 돈을 벌려고 마음먹은 나는 집 근처에 있는 한 분식집에 구인장을 보고 들어갔다. “몇 살이에요?” “19살입니다” “학생이네요?” “네” “학교는 어디 다녀요?” “졸업했습니다.” “무슨 일 해봤어요?” 중국에 있을 때 한국음식점에서 일했던 기억이 떠올라 “횟집에서도 일해보고 고기 집에서도 일 해봤습니다.” 사장아저씨는 어설픈 서울말을 쓰는 나를 한참을 바라보더니 “연변에서 왔어요?” 순간 나는 “아닙니다. 강원도에서 왔습니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죄인 된 기분이었다. 이러한 제 모습을 보던 사장은 “신분증 있어요?” “네” 나는 하나원을 나와서 발급받은 신분증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장아저씨는 내 신분증을 한참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셨습니다. “사람 구했어요.” 냉정한 한마디에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돌아 나와야했다. 뒤에서 사장아저씨가 계속 보고 있는 것 같았고 길가는 사람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부모님은 이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만 보고 계셨다. 학원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않으셨고 돈을 번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없으셨다. 그 일이 있은 후 3개월 동안 집에서 뒹굴 거리며 새벽 5시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다 잠이 들어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눈을 뜨면 나는 현실을 도피하듯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세계로 빨려갔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왜 그러니?” “아니다.” “왜? 한국 얘들과 싸웠니?” “아니! 내가 왜 그들과 싸우니? 통일도 바라지 않는 얘들인데….” “뭐?” “학교에서 선생님이 통일 원하는 사람 손들라고 했는데 두 명밖에 없더라. 나머지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더라."“왜?” “통일되면 한국이 못 산다고… 그리고 북한 사람들 무섭다고….” 한번은 하나원에서 만난 친구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TV에서 탈북한 사람들이 인천공항으로 들어온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옆 자리에서 밥을 먹던 아저씨가 “탈북자들은 왜온대? 여기도 굶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리고 쟤네들 우리 세금 받잖아” 왠지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순간 화가 나서 몇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사람이 미웠고 뉴스에서 북한 사람이 국경을 넘는 모습과 대사관을 진입하는 격한 모습만 비춰지고 현재 살고 있는 탈북자들은 적응을 잘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나오고 여전히 탈북자라고 하면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들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것에 화가 났다. 그러던 2002년 친하게 지내던 남한에 있는 한분의 소개로 남한 남학생을 알게 되었고 우린 몰라보게 가까워졌다. 그렇게 알고 지낸지 며칠 뒤 남학생은 나와 사귀자고 하였고 나도 그러자고 하였다. 우린 함께 영화도 보고 밥도 함께 먹으면서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친구는 한번도 나에게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은근히 내 눈치를 보고 어떻게든 나를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렇게 지내길 한 달, 별안간 그 친구는 연락이 없었고 나는 여러 번 연락을 하였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 친구로부터 헤어지자는 문자를 받았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헤어지자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며칠 뒤 그 친구를 처음 소개시켜준 분을 만나게 되었고 내 얼굴 표정을 보더니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나는 순간 울컥하면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속에 묻어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보니 내심 마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먼저 그 친구를 좋아해서 쫒아 다녔고 내가 먼저 고백했다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배신감 보다 내가 지닌 북한이라는 단어에 북한 사람이기에 사랑 앞에서도 떳떳할 수 없다는 그 친구의 생각에 화가 났고 그러다 순간 내가 서있는 한국 땅이 너무 싫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아빠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아빠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울던 나는 눈을 들어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 북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왜 이렇게 힘듭니까?” 하며 물었다. 아빠는 나를 바라보더니 “너는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데……. 한국 사람들보다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시 물었다. “너는 북한 사람 2000만 명 중 한명으로 여기 한국에 오지 않았냐? 그러니 넌 특별한 사람이지……. 그러니 지금 힘든 것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잊지 말라 너는 2000만분의 1일이라는 것을…….” 아빠의 2000만분의 일을 들은 후부터 나는 이 세상에 서 있는 내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만뒀던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나는 북한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녀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었다. 19살 나는 중학생이 된 마음으로 영등포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고 2002년 4월에 있을 고검(중학교 졸업)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원서 접수 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은 모두 등록됐는데 나만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내가 아직 초등학교 졸업이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중학교 2학년을 마쳤는데 왜 인정이 안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통일부와 교육부에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였지만 여전히 그들의 대답은 초등학교가 6년제라서 북한에서 초등학교 4년제를 졸업해도 인정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도 2년이 부족하니깐 졸업 인정이 안 되는 것인데 북한에서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은 어떻게 대학교를 갈 수 있냐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할 수없이 나는 중학교 검정고시를 못 보게 되었고 다음해 5월에 돌아오는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기다려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였다. 처음 작은 언니가 친분을 쌓고 있었던 미술 학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 수업준비와 준비물들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미술 원장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분은 함께 일하게 되신 최금희 선생님이야.” 하시며 나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셨다. 처음엔 낮선 호칭에 그냥 이름 부르셔도 된다고 하였지만 원장 선생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시며 아이들 앞에서 항상 저를 존경해주셨다. 수업을 마치고 종종 선생님 가족 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고 선생님의 두 딸들과 아주 가깝게 친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그동안 겪었던 일들과 한국에서 살면서 받는 시선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도 미국에서 유학생활 하실 때 받았던 차별들을 이야기 하시며 힘들어 하는 나에게 위로를 주셨다. 미술학원에서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한국의 어린 친구들의 생각을 알게 되었고 북한과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학원이라는 곳이 없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항상 선생님의 말씀이 법이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가족 같았다. 학교에서 모든 것을 익히고 친구를 만나고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쌓는 것이었다. 반면 남한의 어린 친구들은 학교외 많은 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심지어 아이들의 흥미에 관심 없이 부모님의 바램대로 보내지는 학원이 많았다. 미술학원에 오는 몇몇 아이들은 대놓고 미술 하는 것이 싫다고 하였다. 내가 싫은데 왜 오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원이 끝나면 바로 피아노 학원에 산수학원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린친구들 나이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 아이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숨바꼭질도 하고 물고기 잡으며 보냈는데 남한 아이들은 짜여 진 일과에 맞혀서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이 눈 시력이 좋지 않았다. 벌써 6살인데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고향에서는 학교에 안경을 쓴 친구를 한명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한국에서는 안경 낀 아이들이 많았다. 남한 친구들이 먹는 것에 비해 더없이 부족한 북한이지만 눈 시력만은 남한이 현저히 나빠져 있었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우리는 어릴 적부터 항상 산과 들을 보고 높은 건물을 본적이 없었고 TV도 흑백이었고 컴퓨터라는 것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산과 들에서 놀았고 그러다 보니 눈에 장애를 받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미술학원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시작하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할 때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밝혔다. 처음에는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다른 점을 알아가면서 친구가 되었다.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여졌고 처음으로 엄마에게 옷을 사드렸다. 기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항상 아무 말 없이 지켜보시는 엄마는 많은 주름이 쌓여있었다. 나는 주말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면서 검정고시 학원을 다시 준비했고 2003년 5월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무사히 끝냈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도 함께 따냈다. 부모님은 누구보다 기뻐하셨고 학원 선생님도 함께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학원만 다니다 보니 나에겐 내 속 마음을 이해해 주고 들어줄 친한 사람들이 주위에 없었다. 남한 친구들도 별로 없었고 가는 곳은 학원과 집뿐이었다. 그렇게 2003년 12월을 달리고 있을 때 탈북청소년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한 선생님이 내가 다니는 영등포학원에 찾아오셨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이 사람들도 그만두겠지’라는 믿지 못하는 마음이 먼저 스쳐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개교식은 함께 준비하자며 이끄셨다. 개교식을 함께 준비하면서 나는 한번 믿어보자 라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기로 하였다. 2003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우리는 경동교회에서 우리들의 학교인 “똘배학교”를 열었다. 첫 시간은 편안히 누워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명상 시간이었는데 난생처음 받아본 명상시간이 잊히지 않는다. 이어서 교가인 ‘뭉게구름’을 부르면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검정고시에 필요한 모든 과목을 유명한 선생님들에게 배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업시간에 학원에서처럼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남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때는 선생님이 한국사회와 지리에 대하여 잠깐 물어보면 모르다보니 순간 당황하게 되고 남한 친구들의 눈치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고 모르는 것을 알아나갔고 누구하나 모른다고 이상한 눈빛을 주지 않았다. 안색이 좋지 않을 때면 항상 선생님이 물어보고 관심을 가져 주셨다. 학교에는 고향 친구들뿐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혼자 온 아이들도 많았다. 같은 고향에서 온 우리지만 남한에 와서 서로가 겪은 아픔으로 인해 고향에서 온 친구들과도 멀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서로 얼굴이 굳어져 있었고 조금만 감정이 폭발하면 주먹이 나왔다. 나는 남자아이들과 자주 부딪혔다. 여자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한국 남자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니기 전에도 나는 고향에서 온 남자들을 피해 다녔는데, 여전히 몸에 남아 있는 남성우월주의적인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여성을 무시하는 그들을 무시하며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똘배학교 자치회의 시간에 이런 문제가 자주 거론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방적으로 강요하려하지 않고 우리끼리 문제를 풀어가게 하였다. 자신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지혜를 주실 뿐이었다. 그동안 나 역시 싫은 모습을 무시하고 불평하기만 했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께 1대1 상담도 받으며 그야말로 큰 관심 속에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사람만나는 걸 꺼리던 내가 인정과 관심, 사랑 속에서 얼어 있던 마음이 녹고 있었다. 모든 것에 경계심을 품고 자라온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서서히 남에게 다가가는 법을 알아갔다. 누군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학교 가는 시간이 즐거웠고 모든 수업이 재미있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저녁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몸은 피곤하지만 학교에 다닐 수도 있고 선생님들이 있어서 아침에 눈뜨기가 힘들지 않았다. 하루에 5시간을 자면서도 피로를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대입 검정고시가 다가오고 있었고 학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무엇보다 교재를 준비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며 보충수업 해주신다고 아침 일찍 나오시는 선생님들이 있어서 더 큰 힘이 되었다. 시험장에 아침 일찍 나와 응원해주고 기도해주던 선생님들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결과 나는 대입검정고시를 좋은 점수로 마쳤고 우리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외쳤다. 시험에 합격하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시험이 끝나고 우리는 많은 여행을 하였다. 여행하면서 몇 날 며칠 함께 자고 함께 놀고 함께 노래 부르며 힘들게 살아온 우리들은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픈 상처들을 꺼내놓았다. 자신이 없어 미처 보여주지 못하던 소망들도 스스로 꺼내놓았다. 그동안 힘들었을 나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지켜봐주신 부모님...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응원해주신 선생님들 고마웠다. 다른 학교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똘배학교에서 일어났습니다. 선생님과 씨름도 하고 프로레슬링도 하고 팔씨름도 하면서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닌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보낸 시간은 서로를 알고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울고 웃으며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렇게 친해지고 있을 때 똘배학교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는지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교장선생님이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이별을 겪어온 나는 또 다시 이별을 맞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우리 힘으로 학교를 만들어보자고 하셨고 나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선생님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6개월 동안 선생님이 보여준 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우리의 새 둥지는 혜화동 마로니 공원에서 조금 비탈진 곳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었다. 비탈진 계단으로 내려가야 나오는 지하방에 ‘셋넷학교’ 간판을 내걸었다. 처음엔 과연 여기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창문으로 사람 발만 보이고 방은 두 칸 밖에 없는 그곳에서 수업을 어떻게 할지 망막했다. 방음이 되어있지 않아 우리는 계란 판을 사와 붙였다. 그러고 보니 계란 집에 온듯했다. 드디어 2005년 9월 1일, 셋넷학교 문을 열었습니다. 30명의 자원교사와 6명의 학생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학교가 태어난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모아 기적 같은 일을 이루어냈다. 비록 벽엔 온통 계란 판을 붙인 지하방이었지만 우린 마음속에 커다란 교실과 넓은 운동장을 가지고 있어서 개교식 날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공부할 장소가 부족해서 커튼으로 방을 나누어 독립된 공간을 마련해보기도 하고 선생님 집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지하방이라 어둡고 겨울엔 난로에 몸을 녹여가며 공부해야 했지만 매일 아침마다 셋넷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어느 학교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셋넷학교에 있었다. 각자 상처를 간직한 우리들이었지만 셋넷학교를 다니면서 몸도 마음도 강해지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도 스스럼없이 북한말을 쓰게 되었고 그동안 나도 모르게 경계만 했던 고향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어떻게 북한을 탈출했니? 어떻게 살아왔니? 얼마나 힘들었니?’ 지금까지 만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아 언젠가 모아서 물어보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믿음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우리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지켜봐준 것이었다. 셋넷에서는 북과 남이 없었다.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가더라도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지 남한과 북한으로 만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셋넷에서 보낸 일 년간 나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자세, 나와 다른 타인의 이야기도 들어줄 수 있는 여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 하나하나 알려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상대방도 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풀어나갔고 부끄럽다고 여겨왔던 과거도 지금의 훌륭한 내가 있기까지의 멋진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심어준 2000만분의 일은 나 스스로 알아간 것이 아닌 가족과 또 나를 이해해 주는 선생님들과 친구들 나아가 한국이라는 사회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셋넷학교를 졸업하고 2005년 한국외국어 대학교 중국어과에 입학했다. 처음 대학생활이 힘들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힘들다고 주저앉기 보다는 부딪히고 풀어나가면서 누구보다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나는 힘들게 자라왔지만 그 만큼 나에게 얻어진 것이 많음을 알게 된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나를 발견해가는 시간이 나에겐 천국과도 같다. 2006년 10월 최금희(2001년 입국) 너무도 더운 한 여름의 새벽에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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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온 경험담과 수기들 중에 인간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감동과 가슴 찡한 전율 그리고 삶의 순간순간 역동적인 모진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등, 아오지언니의 탈북수기는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진실함과 간절함이 곳곳에 묻어 있는 단연코 최고의 걸작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유튜브를 통하여 아오지언니에 대해 모든 것을 검색해서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모든 영상을 수차레씩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솔직 담백하고 진취적인 나와 어쩐지 쏙 빼닮은 아오지언니를 무척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한국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보석이 바로 아오지언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탈북자와 한국인들에게 유튜브에서 아오지언니를 검색해서 시청해보실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나보다도 한참 어린 동생이지만 글 쓴 것을 보니 어른스러음을 금할수 없습니다.
세상을 바른 눈으로 평가하신 님의 아름다운 글을 보면서 저 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대한민국의 생활은 선배이시구나 많은 생각을 거듭하게 합니다
우리가 힘 받을 수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또 하나의 2000만분의 일을 또 써주세요.
님의 글을 이 밤 정말로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그냥 이슬같은 마음으로 읽을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들만의 메시지를 많이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부디 남한에 도착해 받은 상처들은 다 회복하시고 탈북자들께서 남한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남한의 잘못된 교육문화나 비생산적인 사고방식들을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리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원하며...
미국 시애틀에서
경험이 없어서인지.. 상상도 못했던 북한에대한
우리나라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놀랐습니다
제가 나이가 어려서 이런말씀 드려도 될지모르겠지만 ㅎㅎ;
대한민국이란 땅에 이제 완전히 적응하신것 같은데 ..
이제 대한민국 사람이니깐요
항상 자신감을 가지시고 좋은일만 있기를 기원할게요
글 잘읽었습니다. ^^*
정말 어린나이인데도 말하는거랑 생각하는거랑 정말 또래같지 않고 성숙하네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잇엇나여?
아님? 정말 위에서 말씀하시는 똑똑하신 아버님밑에서 자라서 그런건가여?
정말 똑똑하신 부녀지간인것 같으네요!
제가 권하구 싶은 얘기가 있다면 책과신문을 읽을것을 권하고 싶어여!
신문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문학 기타등등 많은걸 알게 돼구여...그리고 책을 많이 읽으시면 꿈과 희망이 보일거구요 그리고 이사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간략히 보일거라 생각이 드네요
묵묵하게 딸을 믿고 밀어준 아버님이 참 인자하시고 대단하십니다!
그런 아버님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안 똑똑하다면 이상한거겟죠!
첨에 읽을땐 긴장이 돼구 손에 땀이 막날려다가 마지막 좋은결과에 정말 제 자신이 기뻐 어쩔줄 모르겟네요~~~!
암튼 저두 글쓴이에게서 많이 배웠네요. 한수 배웠습니다.ㅎㅎ
정말 대학졸업하시면 이사회에 큰 일꾼돼시어 이나라를 이끌수 있는 사람이 돼어주세요!! "꿈은 이루어진다" 이말을 꼭 기억하시고 성공한 사람이 돼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홧팅~~~~ ^^*
다시 북한 간다고 해도 안 말립니다
중이 싫으면 절 떠나는 거지
다시 가세요
- 이상철88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22-09-21 15: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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