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들어가는 행복 - 이명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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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원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담당경찰관과 함께 거주지로 오는 과정에는 그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심정이었고 마음이 많이 설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설레임도 잠시 부닥친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지요. 다른 모든 탈북자들도 다 그러하지만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무조건 와야만 했기 때문에 배우자의 모든 것을 묻지도 또 알려고 하지 않고 관심도 없었고 꼭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입국한 케이스였습니다. 그 점을 두고 저는 그나마 브로커가 없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지금 생각하면 진짜 순진하고 아름다운 생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입국하기 전부터 남편은 수 천 만원의 카드빚을 가지고 있는 신용불량자였고 그때 입국이 절박했던 저는 그런 사실도 모른채 아이를 가졌고 입국하자마자 낳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하나원을 수료함과 동시에 저에게 고스란히 현실로 다가 온 거죠. 남편은 자신의 채무에 대해 저한테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을 했고 보증이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한 채 그래도 아기아빤데 하는 생각으로 저는 보증을 서주었습니다. 참 지금 생각해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죠. 좀 있으니 카드사에서 압류 통지서가 오고 그 제서야 현실을 느끼고 저는 주거지원금으로 타가지고 나온 돈 천 만원을 몽땅 카드사 통장에 입금시켜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몇 천 만원이 더 남아 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카드사 몇 군데서 전화와 통지서가 날아왔고 정말 남편에 대한 야속함에 잠은커녕, 밥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돌 지난 딸아이는 항상 방긋방긋 웃으며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음마를 뎄는데 그런 애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고 또 그런 애를 아빠애로 만들어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견딜 수가 없었어요. 가진 것이라곤 빚 밖에 없고 일자리 하나 없어 매일 집에서 PC방에서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있는 남편을 보니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난 이러면 안 되겠다싶어 13개월 된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학원등록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한동안은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산세무회계과정을 등록했는데 그것도 안 되는 것인지 아프지도 않았었는데 난소종양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의 설득을 받고 당장 수술비는 없지만 생계비가 나오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수술을 결심했습니다. 난생처음 하는 수술 거기에다 수술하다가도 죽는 사람이 많다는 시어머니 말씀에 많이 두려웠고 나 하나만 믿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아이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틀 동안 눈물로 밤을 새웠습니다. 이럴 때 친정어머니라도 곁에 계셨으면 같이 있을 때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늘 한이 되었고 특히 그때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향의 부모님께 빌었고 이 세상에 존재하든 안하든 모든 신께 빌었습니다. 그러는 저를 의사 선생님은 손을 꼭 잡아주시며 괜찮다고 이런 수술로 잘못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또 저의 상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이 기회에 푹 쉬라고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늘 모든 환자에게 그 정도 얘기는 하신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대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행히 종양이 악성이 아닌 양성이라 생명에 위협이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당시 제 수중에는 수술비로 낼 돈이 생계비로 나온 돈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돈을 다 쓰면 안되지만 어쩔 수가 없어 몽땅 수술비로 지급을 하였습니다. 당장 쓸 생활비조차 한 푼 없었던 때라 몸조리는 뒷전에 미루고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하철역에 있는 서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게도 제 형편을 들어보지도 않고 사장님은 가불을 해주셨고 저는 너무 고마워 더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원은 중도에 포기하였고 그래도 자격증은 따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습을 열심히 하여 전산회계 1급과 워드프로세서 2급을 따게 되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고 월 3회 휴무를 해야 했던 그때 제가 받은 돈 110만원으로 남편 채무할부금 70만원과 딸아이 이유식비며 관리비 등을 내면 왔다갔다 지하철요금도 빠듯했고 그래서 남편을 설득하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리 가족 가계부를 보여주며 어떻게 일을 안 하고 이 세상을 살겠냐고 여태껏 지나간 일은 묻지 않을 테니 제발 우리 가정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보여 달라고 눈물로 애원도 해보고 당장 헤어지자고 위협도 해보고 했지만 그런 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남편은 침묵으로 쳐다만 보고 또 어떤 때는 오히려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는 외아들로 자라 오직 자기 하나만 아는 그런 사람 같아 보였어요. 그래도 내가 여기 남한까지 오기 전에 했던 그 많은 시련과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억척같이 일을 했고 설날이라고 주는 보너스 5만원이 그렇게 고맙고 소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그 과정에 저는 제 자신도 여지껏 몰랐던 강단과 끈질김에 놀랐고 우리 가정형편을 알기라도 하듯 앓지 않고 잘 자라주는 딸아이도 고마웠습니다. 그러던 중 겨울 어느 날 우연히 집에 들어오다 더운 공기를 확 접하며 저도 모르게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몇 분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 차린 저의 앞에 걱정 어린 남편과 불안해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다음날 하루 좀 쉬라는 남편의 말소리를 뒤로 하고 저는 지하철을 타고 또 일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모습에 조금 마음이 흔들렸는지 남편은 매일 벼룩시장을 보며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보니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 했습니다. 사실 저와 남편은 12살 띠 동갑이었는데 남편은 지금 44세입니다. 나이 40을 훌쩍 넘어 일자리 찾는다는 게 쉬운 일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저의 모습에 자신도 포기할 수 없었다며 일자리를 찾더라고요. 사실 저도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고 그냥 우리부부가 나가서 100만원씩만 벌어서 남편이 버는 100만원은 빚 감면에 제가 버는 돈은 생활비와 적금통장에 넣어 조금만 여 유를 가지고 살자는 것이었지요. 남편의 각오도 사뭇 남달랐어요. 이제부터 정말로 열심히 살고 싶고 죽을 때까지 일을 할 것이라고 그러니 당신은 집에서 좀 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남편을 보고 시부모님들도 의아해했고 새벽에 일어나 불고기집에서 불판도 닦고 낮엔 배달도 하는 외아들을 많이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북한에 있을 때 궂은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대학공부만 하다 탈북한 터라 시부모님이 그러실 때 마다 항상 저의 부모님이 그리웠습니다. 이젠 가정이 제대로 자리를 잡힐 것은 같은 기대에 저는 더 더욱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 근처 일자리를 찾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젠 1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정이들만큼 든 서점식구들과 작별의 인사를 하고 돌아서며 꼭 여기서 처럼 열심히 일해서 평범한 가정처럼 살리라 결심했습니다. 집에서 2주정도 휴식을 취하고 여러 취업사이트를 뒤지다 저는 우연히 저의 집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웨딩홀 예약실에 자리가 하나 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계획은 한 달 정도 쉬고 다시 일자리 찾는게 목적이었지만 모든 사람의 만류에도 저는 한번 면접이라도 봐야겠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조금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신라뷔페웨딩홀을 찾아가 사장님을 뵙고 면접을 보는 순간 꼭 합격 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어요. 무엇이든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저의 얘기에 사장님은 흔쾌히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하셨고 그러는 사장님을 다른 직원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보며 수군거렸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저는 쉴 틈 없이 일하고 사실 저의 부서일이 아님에도 열심히 일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럴수록 웬일인지 직원들은 저를 더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여 어느 날 그래도 저를 이해해주는 부서장에게 식사대접을 하며 이것저것 물었더니 너무 혼자서 다 일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다른 사람의 일까지 다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말도 안 되지 난 그냥 열심히 하려고한 것뿐인데. 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니 그렇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 다음부터 저도 저의 영역에서 새로운 일을 찾아내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또 타 부서 직원들을 도와줄 때도 될수록 먼저 물어보고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가 먼저 인사하고 ,제가 먼저 웃고, 제가 먼저 말을 걸었지요. 저의 노력이 눈에 보였는지 차츰 직원들도 저를 좋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어느새 3개월이 지나니 직원들도 하나둘 저에게 마음을 열었고 이제는 허물없는 가족 같은 사이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임이라는 직책을 부여 받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바로 본인 스스로가 만들어간다는 사실 그것은 평소에 많이 보고 듣고 한 부분이었지만 이렇게 몸으로 느끼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점차 경력이 쌓이자 회사규정에 의해 다른 사람들보다도 휠씬 빨리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의 명함을 남편에게 보이자 남편은 기뻐하면서도 더 열심히 일을 하였고 저도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설음과 고생이 부끄럽지도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회사 직원들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의를 제기하지만 저의 일이라면 인정을 한다며 보는 이 마다 격려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열의도 더 높아지고 그러던 중 사장님의 병세가 악화되어 웨딩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는 옛 명언이 꼭 들어맞은 얘기지요. 하지만 사장님은 새로 오시는 사장님에게 저를 잘 돌봐주라고 특별히 부탁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헤어지기 아쉬워 엉엉 우는 저의 어깨를 아기마냥 다독여주시며 힘내라고 그리고 항상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만 하라고 하시던 그 분의 말씀이 귓가에 맴도네요. 그러면서 사장님은 여러 가지 조언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빨리 승진할수록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다른데 가려던 생각을 접고 일하던 곳에서 그냥 일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생각 외로 새로 오신 사장님은 엄청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대단한 분이신데 반해 항상 자세를 낮추시고 직원들에게 잘해주셨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점 그때 많이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자식같이 생각하니 어려워 말고 애로사항 다 얘기하라고 하시는 데 서먹한 분위기가 돌기도 했지만 그 분의 진심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게 시작한지도 이제는 1년이 넘었습니다. 요즘에야 사장님도 전 사장님 같은 분이시란 점을 번마다 느낍니다. 정말 제 주변에는 다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만 혈색이 좋지 않아도 걱정해주는 직원들의 관심에 뿌듯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가 새록새록 듭니다. 이제는 남편의 빚도 많이 줄었고 또 다시 아파서 입원하면 보장받을 수 있게 보험도 있어 걱정이 없습니다. 아이도 이제 많이 커서 5살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조금씩 미약하나마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제 딸이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제가 이글을 쓰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성공이라는 개념입니다. 제가 이 몇 년간 해쳐온 모든 것이 과연 성공이라는 단어와 근접한지도 모르겠어요. 단지 느끼는 것은 한 가지 이제 더 이상 악몽은 없을 거라는 기대와 적어도 지금은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개인회사라 직원들도 수없이 바뀌지만 그래도 제일 오래있는 직원이라며 미더워하시는 사장님이나 부서 책임자들을 뵈면 힘이 납니다. 또 집에 가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남편과 복덩이 딸 모두가 지금처럼 만큼만 사랑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다 살아본 인생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만큼이라면 살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부지런한 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 노력하는 사람에게 새 길이 열린다는 말로 바꿔도 될 것 같아요. 알고 보니 남한사람들도 다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따뜻하고 친근한 사람들이 더 많더군요. 저에게 힘들었지만 이런 삶을 맛볼 수 있게 낳아주신 고향의 부모님들과 이제는 열심히 사는 저의 남편, 이 몇 년 동안 쌓은 저의 유일한 자산 복덩이 딸 항상 힘내라고 저의 곁에서 응원해주며 항상 내편이 돼주는 직장동료들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싶습니다. 5년 동안 살아왔지만 대한민국은 확실히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온 것 같은 고향 같은 느낌이 자주 듭니다. 수천수백억 자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중에 몇 천 만원은 없어도 저는 지금이 제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성공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어느 순간 성공에 도달해 있거나 가고 있는 듯한 느낌 바로 순수한 행복을 느끼실 수 있을 테니까요. 서툴고 미숙한 저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부디 행복하세요. 2006년 7월 28일 이명선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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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굿굿이 참고 살아주신 명선님께 존경의 뜻을 전합니다
힘들었던 삶의 앞길을 개척해나가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항상 힘내시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언제나 행복하시길 소원합니다.
뭐랄까 삶이 뭍어난다고 할까요?
저도 몇년전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방황을 했었는데 이제 새로운회사에서 탄탄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어 동질감을 느껴요 화이팅 힘내세요!!!
화이링...^^
저도 혼자서 딸을 키운지가 4년이 되갑니다.,.
꼭 성공하시고... 좋은일 많이 하세요...
화이팅~~~
우연히 `딸을 백원에 팝니다` 란 동영상을 보고 이 사이트에 오게 됬는데요..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되실거라 생각됩니다..
보입니다..........이명선님 화이팅!!
맞아여. 여자는 자식이 있으면 꼭 헤어지지말고 아빠엄마를 보존해야 됨이 아기의 사랑지킴이가 되는거예요. 장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남편분도 감동되지 않았나요... 전 애기아빠없이 애들만 6년세월 키우고 보니 그게 젤로 죄스럽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분님!!! 다시는 우리 명선님 눈물되게 하지 마시고 깨쏫으며 잘 사세용 아셨죠 ?????
화이팅 하세요!!!
앞으로도 좋은일 가득하세요^^
존경스러워요 조그만한 난관에 피하려고만 한 자신이 넘 부끄러워 집니다
너무나도 감동이였어요. 꼭 성공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따님의 앞길에도 축복이 더해지기를 ~~
존경스럽고 대단하십니다.
이런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언덕이라도
나이전에 누군가는 그 언덕을 넘었을것이다
오늘도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당신!
어떤길이든,당신은 통과할수 있습니다
어떤꿈이든, 당신은 이룰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행복만이 남을것입니다..
훌륭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행복한 가정을 자기손으로 만들어 내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언니 건강해서 조은 일만 만나요
절망적인 남편이 변화하여 새사람되었구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열심히 사는 명선씨 정말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명선씨 같은 분이 많이 존재함에 있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 지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부산에 살아요 가까이 계시면 저녁이락도 대접하고픈 생각이듭니다. 열싱히 사는 명선씨에게 화이팅! 외쳐 드릴께요
글을 읽는 내내 같은 여성으로써의 삶이 너무도 생동감 있게 표현해 주셔서...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는것 같았어요.
여기 오시는 분들 대부분 북에서 오셔서 다들 한국서 초행길 시작하시지만 그 개중에 명선씨처럼 착하게 보란듯이 사는 분들이 있다는게 참 북에서 온 사람 중 한명으로썬 좋은 일이라 생각되요.
최악의 가정상황에서도 기둥 잃지 않고 꿋꿋히 지키고 버티신거 참 감동적이였구요 이제껏 그랬듯이 앞으로두 더 멋진 모습으로 변모해 주세요.
님은 꼭 할수 있을거예요.
고생끝에 낙이 온다구 님의 앞길들에 행복만이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된다면 님의 웨딩샵에서 결혼하고 싶네요..^^
제가 변명하자면, 한국남자들, 그렇게 나쁜사람 별로 없습니다.
아내가 고생하면 고생하는지 알고 있씁니다.
다만 표현이 별로 없을 뿐이지요.
한국이 기술이 뒤져있을때, 수출만이 살길일때, 경쟁력은 오로지
인건비 절약밖에 없엇습니다.
남자는 회사가서 죽도록 일해야 했습니다. (40대 남자사망률이 한국이 세계1위인것 아십니까?)
저만해도 3시간 자고 21시간 일한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고생 안 시키려는 한국남자의 특성상, 여자가 일하러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한국남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히 가정일은 여자의 전유물이 되었고,
쓰러져 죽다가만 한국남자는 집안에 오면 집안일을 거의 다 아내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잘 안해주면 하루종일 쌓인 스트레스가 거기서 폭팔하죠.
이것이 한국의 산업화과정의 가정문화였고
상황이 많이 바뀐 지금도 영향이 드러나죠,
님에게 복이 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