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동생아 - 강웅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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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평강”행 열차에 몸을 실은지 벌써 3일이 지났다. 평양에서 밤 12시에 출발한 열차가 이전같은면 5시간이면 가닿을 거리를 3일이 지난 오늘까지 절반밖에 축내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이것도 빨리 온 셈이고 재수가 좋은 셈이다. 열차에서 열흘, 지어 보름씩 묵어가며 밥을 끓여먹으며 다니는 사람들이 허다한 지금의 형편에서 그래도 이 속도로 가면 열흘까지는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대학에서 겨울방학을 맞아 집으로 떠나려던 나는 집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체신소(남한의 우체국)에서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 시외전화를 하는 형님으로부터 군대나갔던 여동생이 병에 걸려 감정제대(병가사제대)되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말을 못하는 형님의 심정은 듣지 않아도 이해되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그렇게 당에 충실하셨던 아버지는 간복수로 자리에 누워 운신을 못하신 지가 6개월째, 장기 환자이신 어머니는 “고난의 행군”(북한에서 아사자들이 대량 속출하던 1995~1999년을 자칭하여 부르는 용어)시기에 접어들면서 심장병과 노이마관절염에 심부전까지 겹쳐 숨쉬기와 걷기도 어려운 상황, 거기에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 온 동생, 생각할수록 억이 막히고 앞이 안 보인다. 갑자기 집에 돌아가기도 싫어진다. 추운 대학기숙사에서 대학에서 주는 옥수수껍데기와 돌이 절반이고 그나마 양도 한 공기밖에 안 되는 밥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도 그리웠던 집이었다. 간부집 자식들이나 돈 있는 집 자식들은 방학은 물론 평일에도 뻔질나게 집에 다녀오면서 돈과 식량을 날라다 풍청대며 쓰는 것을 볼 때마다 원망하기도 했던 부모님들이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항상 보고 싶고 가고 싶은 집이었다. 도에서 한명밖에 갈수 없는 중앙대학(평양대학)에 합격하였을 때도 주변의 분들이 집형편을 고려하고 포기하라고 하셨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북한에서 누구나 동경의 대상이었던 평양의 일류급 대학에 도전하고 싶은 나의 욕망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고달픈 대학생활이었다.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궁핍한 물질생활을 이겨내며 살아오면서도 항상 집에 대한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 내일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부모님들을 보면서도 약 한첩 제대로 지어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군하었다. 집에 갈 때 가져가려고 수중에 있던 돈으로 평양 근처의 쌀고장에서 쌀 한 배낭을 마련하였다. 자기들은 집에서 가져오는데 오히려 집으로 가지고 내려가는 나를 기숙사호실의 친구들은 여러 시각으로 보기도 하였다. 떠난 지 정확히 8일만에 집에 도착하였다. 동생부터 찾았다. 그래도 웃으며 나를 맞아주는 여동생, 어렸을 때부터 동생은 나를 무척 따랐다. 오빠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막내오빠인 나를 “꼬매오빠”라며 졸졸 따라 다니군 하였다. 그러는 동생을 나도 무척 예뻐했다. 형제중의 유일한 여자여서 그런지 아니면 유일한 동생이여서 그런지... “바보 같은게, 그렇게 중도에서 들어올걸 왜 우기면서 군대나갔어?” 동생은 고등중학교(북한에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따로 없고 6년 과정의 고등중학교가 있다.)시기에도 성적도 학교에서 가장 높았고 사로청부위원장(한국의 총학생회와 비슷한 북한의 청년조직의 부회장격) 사업을 맡아하면서 선생님들과 동료들의 사랑과 부러움을 받았었다. 그러던 그에게 학교에서는 상급학교(북한에서 고등중학교 졸업생들이 가는 전문학교와 대학을 이르는 말)를 추천했지만 동생은 집안형편을 생각하고 스스로 자진하여 군대에 입대하였다. 북한에서 남자들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무조건 군대나가야 하지만 여자들은 자원성의 원칙에서 입대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니?” 나는 어색해하며 미안해하는 동생에게 물었다. 사연인즉 부대에서 겨울에 사단별 시합이 있었는데 동생이 선수로 뽑혀 훈련하던 중 추락사고가 생긴 것이었다. 외형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때 졸도하여 위생차(환자후송차)에 실려 위생소에서 6개월간 집에도 알리지 않고 혼자 지냈을 동생의 심리상태와 몸상태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북한에서는 6개월이상 환자생활을 하면 자연히 제대 조치된다.) 집에 오면 부담이 된다고 5년동안 오고 싶은 집에도 오지 못하고 표창휴가도 부대에서 보낸 동생이었다. 부모님들이 누워있는 집에 차마 누워있을 수가 없어서 아픈 티도 내지 못하는 동생을 보며 그의 병상태를 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나의 큰 오류였다. 창피하여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는 동생이 안스러워 하루는 “ㅇㅇ아, 우리 평양구경 갈까?”하니 동생은 너무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북한은 시와 시 사이를 이동하려고 해도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하며 특히 평양, 국경연선, 휴전선 지역은 특별한 증명서가 없이는 통행이 불가능하다. 평양대학생들에게는 임시시민증을 발급해주며 나는 방학용 여행증이 있어 통행에 문제가 없었지만 동생은 문제가 달랐다. 하는 수 없이 기차타고 가다가 도중에서 내려서 도보로 평양시내를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기차에 탔으나 며칠에 한번씩 다니는 기차안에는 사람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불편한 동생을 앉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람들 틈새에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객차창문으로 군인 한명이 뛰어 들어오며 동생의 다리를 밟는 바람에 그와 나 사이에는 싱갱이질이 벌어졌다.(북한의 열차들은 유리창들이 모두 깨지고 없으며 승강대뿐 아니라 창문으로도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일이 허다하다.)군복을 입은 동생의 만류로 싸움은 끝나고 함께 그 친구와 도중식사도 나눠먹으며 기차안에서 며칠동안 친구로 지냈다. 평양역을 몇 정거장 앞두고 나는 검열단속을 피해 동생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 도보를 시작했다. 도보로 걷는 동안 동생은 자주 넘어졌다. 그러는 그를 처음에는 그냥 그러나보다 싶었는데 너무 자주 그러다나니 동생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나중에 이것도 동생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동생이 뇌에 이상이 와 힘들어 하는줄도 모르고 똑바로 걷지도 못하느냐고 화를 냈던 미련한 내가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었다. 평양에 도착하여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집에 숙박하면서 동생에게 만수대김일성동상, 김일성광장, 주체사상탑, 개선문, 만경대, 당창건기념탑, 빙상관, 인민문화궁전, 평양대극장 등 TV로만 보던 평양구경을 시켜주었다. 소대(남한의 대학에서의 한개 반)친구들이 동생을 초청하여 나도 가 본적 없는 외화식당에서 식사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도 동생은 통증에 시달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그냥 피곤해서 그러나보다 라고만 생각하고 그 애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집생각이 나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나도 방학기간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 동생을 보내기로 하고 역전에 배웅 나갔다. 군복입고 병가사 제대증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사람은 집에 보내주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무래도 집에 데려다 줄려고 작정했다. 그러는 나를 동생은 기차도 열흘씩 걸리는데 새 학기 수업에 빠지면 안된다고 극력 만류하여 결국 옆사람에게 동생을 부탁하고 내렸다. 그렇게 동생을 떠나보내고 마음이 안놓인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역전에 나가 기차가 어디까지 갔는지 문의하군 하였다. ........ 새 학기가 시작되어 새로운 열정으로 학업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또 다른 불상사가 생겼다. 일생을 당원으로서 당과 수령에게 충실하였던 아버지가 병상에서 밥 한 그릇, 약 한첩 제대로 써보지 못하시고 한을 품으신채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너무나 업적이 많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그야말로 당에 충실하였던 고지식한 분이었기에 더욱더 원통하였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고 기대 또한 남다르셨다. 그러한 총애를 받으며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하려고 노력해왔고 나의 희망이셨던 아버지였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구 앞에서 나는 그때까지 울어보지 못했던, 앞으로도 울어보질 못할 많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장례를 마치고 난 후에야 나는 동생의 병이 악화되어 아예 병상에 누워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병원에서는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내리지 못하고 막연하게 평양 중앙병원에 후송증만을 떼어 준 상황이었다. 북한은 제도 자체는 무상치료이지만 국가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병원들에서 진단만 해주고 일체 약은 본인들이 시장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집에서는 동생을 평양에 보낼 돈도, 평양에 거처할 곳도 모두가 막연한지라 속수무책으로 있던 차였다. 나는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동생을 데리고 평양으로 올라왔다. 집에 내려올 때 이용했던 대학친구의 아버지회사차편으로 평양에 도착하여 그길로 병원을 찾았으나 대기자들이 꽤 되었다. 접수를 하고 기다렸으나 찾아주지 않아 의사에게 문의하니 병원에서 우선적으로 해주어야 할 대상들이 있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지방에서 온, 그것도 대학생교복을 입은 학생이 하찮게 보인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할 수없이 동생을 데리고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동생은 이부자리에 소변을 보아 버렸다. 친구어머니에게도 미안했고 병이 더 악화된 것만 같아 오늘은 무조건 진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병원을 찾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다 찾으며 이구실 저구실 대며 찾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진료시간이 끝났으나 나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병원의 구급환자 경과실이라고 씌여진 빈 방으로 들어갔다. 초봄이라 밤날씨는 제법 쌀쌀하였다. 난방장치도 없는 방에서 동생에게 내 교복을 벗어 덮어주었으나 추워 떠는 동생이 가여워 나는 꼭 껴안고 옆에 누웠다. 그런데 내 얼굴 앞에 놓인 동생의 머리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닌가? “?”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몸안의 벌레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다는 소리를 듣은 적이 있었다. 나는 동생이 잠들기를 기다려 벌레를 잡아주기 시작했다. 동생의 머리에는 나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 당직 서는 간호원이 들어와 눈물이 글썽해 하며 다음날 아침 첫시간에 당비서동지를 찾아가라고 귀띔해준다.(북한은 모든 공장, 기업소들에 행정책임자인 지배인과 함께 당책임자인 비서들이 있다.) 다음날 당비서를 찾아간 나는 “불쌍한 내동생을 살려달라고”애원하였다. 당비서는 그길로 해당 과에 전화를 하였고 덕분에 나는 동생의 종합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CT검사가 최대의 특혜였고 설비자체도 적십자병원과 김만유병원 두 곳밖에 없었다. CT검사를 한번 하고나서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두 번째로 하고나서 하는 말이 다발성뇌농양이라는 것이였다. 의사들은 이제는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집에 데려가 먹고싶어하는 것을 사먹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오빠 나 살수 있어? 고칠 수 없는 병이면 지금 죽었으면 좋겠어. 머리가 너무 쏘아...”하던 동생에게 평양가면 살수 있다고 한 나였는데 그애를 돌려보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저도 과학을 탐구하는 대학생입니다. 그러나 피어보지도 못한 처녀인 제 동생, 당과 수령을 지키기 위해 군사복무를 하다가 다친 애를 죽기 전에 치료라도 좀 해주세요. 입원을 좀 시켜 주십시오” 일주일동안 입원하기로 하고 호실과 침대를 잡았다. “오빠, 나 살수 있는 거지?” 하며 웃어 보인다. “그래, 밥 잘 먹고 치료 잘 받으면 아무것도 아닌 병이야. 걱정하지 말아.” 그날부터 동생은 밥도 잘 먹으며 본래의 활달한 성격을 되찾은 듯싶었다. 그러나 뇌는 점점 곪아가고 있었으며 이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게 되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내 동생이라지만 성인인 여동생의 속옷을 빨아서 갈아입히는 것은 매번 얼굴이 뜨거웠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퇴원하게 되었으나 동생은 이제는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이러는 동생을 혼자서 집에 보낼 수 없었다. 나의 학업에 대해서는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여행증명서가 없던 나는 출발지에서부터 승무안전원(철도경찰)에게 단속되었다. 사정이야기를 하는 나를 다짜고짜로 끌어 내린 그들은 열차를 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르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떠나는 열차에 매달렸다. 동생 곁으로 갔으나 몇 정거장 가지 못하고 또 잡혔다. 역전에 내려놓으면 다시 출발할 때 잡아타고, 그런 식으로 집에까지 도착했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운 채로 동생을 붙잡고 울기만 하신다. 집에 온지 7일 만에 동생은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책이나 영화에서만 보아왔던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난생처음으로 들었다. 동생이 죽는다면 나는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대학친구들도 아무래도 갈 동생인데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나까지도 잘못될 것 같다고 얘기하군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닥친 이 순간 나의 눈에서는 아버지 때 그렇게 많이 흘렸던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동생을 내려 보기만 하였다. 형님이 옷을 갈아입히려고 동생의 몸을 씻겨주려고 하였다. 나는 내가 하겠다고 했다. 동생은 제대되어 사회 옷을 사 입은 적이 없었다. 사 입을 돈도 없었고 입고 나설 기회도 없었다. 내가 평양 구경시키려 데려왔을 때 평양에서 사준 속옷과 내의밖에 없었다. 겉옷을 살만한 돈이 없었던 것이었다. 하는 수없이 군복을 입혀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 일가?...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은 3일장이 아니라 24시간 안에 관도 없이 치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 큰 성인을 관도 없이 보내기는 너무 마음에 걸려 관을 만드는데 동네 노인들이 어머니가 있는데 안된다고 야단을 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결국 한밤중에 관도 없이 이불에 쌓인 동생을 차도 구할 수 없어 손수레에 싣고 산으로 행했다. 아 가슴이 아프다 , 지금도 찢어진다, 지금 나는 울고 있다. 빈방에 혼자 소리 내어 울고 있다. 불쌍한 동생아... 손수레를 밀고 한밤중에 도로 한복판으로 가는데 서민들이면 누구나 무서워하는 야간순찰대(북한의 생활난이 극심해지자 범죄자들이 생겨나면서 이를 막기 위해 경찰들과 사민들로 이루어진 조직)의 호각소리가 울리며 서라고 소리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초정신이 나간 자세로 돌아보지도 않고 가자 뛰어오더니 전지로 손수레를 비춰보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다. 동생을 산에 묻고 집에 돌아와 태어나 25년 동안 한 번도 입에 대보지 않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슬펐을 때 옆의 분들이 권해도 안마시던, 대학에서 기숙사친구들이 추워서 자지 못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잘 때도 한 번도 마셔 본적 없던 술을 끝도 없이 마셨다. 죽고 싶어서, 사는 것이 죄짓는 것만 같아서... 그때까지 나오지 않고 있던 눈물이 그때에야 한밤중의 동네가 떠나갈 듯 한 소리와 함께 오래 되었다. 그 후 기둥같이 믿고 살던 남편과 슬하의 외동딸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마저 한 많은 세상을 떠나가셨다. 나는 이렇게 졸지에 가족을 잃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동생이 잘 걷지 못한다고 짜증내던 일, 마지막 길을 갈 때 옷이 없어 제대될 때 입고 온 군복을 입혀 보낸 일, 관도 없이 헌 이불에 동생을 떠나보낸 일... 천국에 가서라도 아버지가 돌봐주시라고 아버지 산소 아래에 동생을 두었다. 추석 때마다 산소에 가서도 어른들이 만류하여도 나는 동생 쪽으로 눈길을 주게 된다. 처음에는 사탕 한 알이라도 묻어주고 발걸음을 돌리군하였다. 동생아, 부디 그곳에서라도 앓지 말고 아빠, 엄마랑 잘 있거라. 2007년 3월 13일 강웅민 죄 많은 못난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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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드리고픈 말씀은 늘 동생을 기억하시어 사랑하는 동생몫까지
행복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동생분 또한 분명 그것을 원할 것이니까요.
오빠되는 분 힘내세요
부디 행복하게 사십시오
참 언제가 되어야 이런 슬픔이 사라지게 될까요
부디 힘내시고 먼저가신 가족들몫까지 행복하게 사셔야만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을런지요?
..............
고향 찾아 부모동생 산소에 술이라도 한잔 부을 수 있을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삶도 투정부리며 불만족 스럽게 살아왔지만
정말 이땅에 그런 기막힌 일도 있으니 가슴이 메어집니다.
어찌 말로 다할수는 없지만 하늘나라에서 바라보고 있을것입니다.
이땅에서 힘을 내어 못다한 삶까지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나역시 그비숫한 일을 격은지라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려.
우리 눈물을 거두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하여 대한민국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여 북한에서 인권도 자유도 사랑도 다 빼앗기고 살앗던 우리의 행복할 권리를 찿아갑시다. 강웅민씨 화이팅
그래요 "고난의 행군시기" 수백만이 바로 님의 가족처럼 하늘나라로~
우리안의 짐승처럼 여지없이 생을 빼앗겼어요...
이는 국민을 우롱하고 장난친 김정일의 독재가 빚은 산물 !
우리 하루속히 북한의 민주화를 위하여, 한국의 데모군들 보시면서 왜 우리님들은 현 체험자들이신데 외면하시는지요????
돈벌어 부를 이루자고는 이땅에 오지 않았다고 봅니다.
뭔가는 ~다운 인생이 그리워! 자유를 위한 전 인간의 ~다운 삶을 위하여
우리 힘차게 이루어내요...
사랑하는 이들을 보낸 슬픔 어디에 비하지 못 하겠지만,그래도 사랑했던만큼 가족분들을 가슴에 묻고 힘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분들도 강웅민씨가 그렇게 살기를 바랄겁니다. 슬픔에 잠겨 살다보면 강웅민씨의 인생에 밝은 날이 없을 겁니다. 부디 그 아품 이겨내시어 먼저 떠나보낸 영혼들에 지금같은 강웅민씨의 죄스러운 마음 덜어 내시기 바랍니다. 힘내세요.
잘살아 봅시다~~^^^^!!! 강웅민씨는 꼭 의사가 되세요~~화이팅~~!!
좋은 세상 올수 있도록 살아 봅시다....
슬픔을 딛고 통일의날 바라보며 굳건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저렇게 죽은사람들이 삼백만이 넘는다니 참 믿을 것같습니다.
북한사람치고 아픈 추억 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만 넘 나 가슴아픈 추억들 소중한 사람들이 독재자의 정권에 죽음을 당하고 잇습니다.
북한을 위하여 더 많은 기도를 하고 우리 부모 형제들 을 그 곳에서 살수 잇도록 기도를 하여야ㅜ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을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강웅민씨에게 위로와 재기를 당부합니다. 샬롬.
시퍼런 대낫~~그것두 분위기 있는 사무실서 혼자 조용히 남들 눈치 못보게..그것두 감정 이빠이 오른거 조절할려니 너무 힘드네요..
가끔 아주 가끔 글쓰는 사람이지만 님의 글을 읽으면서 글의 주인공에 빠져벼렀어요.
이제껏 힘든삶 살아오셨으니 인제는 하늘에 계시는 가족들이 도와 주실거예요.
역시 지금도 씩씩하게 사시겠지만 그래두 더더욱 용기 잃지 마시구요 앞으로 가족들에 당당하게 보일수 있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래요.
이제껏 나만의 삶이 젤 아픈줄 알았는데 전 님의 삶에 비하면...이제부터 함구 할게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글구 힘내세요~~
후손들입니다. 마음이 아프네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월남하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같은 입장이지 않았나 싶네요 힘내시구요 ㅜ,.ㅡ
이러한 아픔이 비단 저 하나만이 아닌 우리 사람들 모두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을 줄 압니다.
너무나 소중한 이들을 뒤에 두고, 척박한 땅에 묻고,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헤쳐 온 그 길이 절대로 헛되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어깨 겯고 서로 서로 마음과 힘과 따뜻한 가슴을 합쳐갑시다.
읽을때마다 생각이 다르구요...용기내야 하겠단 생각 들어요..적어두 이글의 주인공의 이 상황보단 내가 훨 더 살만하다는...
척박한 땅...가슴아픈 현실...~~~어느곳을 막론하구 다 있는거죠 머..
곳에 따라 현실의 폭이 더 깊고 낮고 겠죠...
오늘 들어오니 웅민님 댓글두 있넹...힘내야죠...홧팅~~~
그 희생자는 주민이였다.이제는 싸우던 시대는 끝났는데 고통은 아직도 존재한다 특히 북한 주민들에게서... 통일이 되어도 다른 고통이 남과북을 갈라 놓을 것이다. 남한에서 먼저 준비해 두어야 그 고통이 줄어든다.
TV를 자주 보지 않는 편인데 이따금 특정드라마는 시간을 맞춰 보려고 하여 "하얀거탑", "여우야 놀자" 다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드라마 "쩐의 전쟁"을 보고 있어요.
북한에 있을 때 영화 "약속"을 보면서 너무나도 감동받았던 박신양(금나라)이 험한 사채일을 하면서도 동생이 생각나 '서주희'집에서 밥먹을 때 밥술을 들지 못하던 장면, 업소에서 반주를 하는 동생을 데리고 나와 울면서 "이제부터 오빠가 생활비를 대줄게"라고 하는 장면 ,,,
왜 이다지도 눈물이 나게 하는지?? 가슴이 아프게 눌리워진다...
구실못한 이 오빠를 원망했을 내 동생 생각에 강의준비를 하는 이 밤도 꽉 막힌 맘 달랠 길 없다......
눈물이 흘러 내릴것 같아서....
강웅민 님. 부디 건강하시고 동생의 몫까지 자유의 땅에서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울려구 보는거 절대 아닌데 다들 가족사 기막히다 하긴 하지만서두...
오늘 문득 들어와보니 웅민님 댓글과 그밑 산수유님의 댓글이 또 눈물나게 하네요~~~
나 눈물흘리기 시른데...ㅡ.ㅡ;;;;;;;;;;;;;;
십여년이 지나도, 아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영원히 잊을수 없는 그 참혹한 시절을 잊으려고 무진 애를 써 왓는데,, 님의 글에 참을수 없는 눈물이 흐르네요. 차마 글을 다 읽지를 못하고 이글 남김니다.
눈도 제대로 못감고 가신 우리 부모님,, 청춘에 떠나간 죄로 편한자리에 눕지도 못한 나의 오빠,언니, 님의 여동생...지금이라도 하늘나라에서 이 동생이 대신 자유대한민국에서 잘 사는것을 굽어보며 편히 지내기를,,,
울 할머니도 익사하셨다던데... 소식만 전해듣고.
부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길...
아~ 엄마 보구싶다. 울엄마도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시겠지?
누군가의 말처럼 한번 쯤 흐트러지고 싶다. 넘 힘들다...
.... ....
아니, 아니 난 그럴 자격이 없는 몸... 각성하자, 힘내자, 누구도 없다, 오직 나를 믿고 나의 힘으로 나의 길을 열자!
그 담에 울자, 그때는 나의 울음을 들어줄 사람도 생길 것이다.
목이메고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아픔에 시달렸을동생이 눈에 밟힌다. 그 아픔 얼마나 무서웠을까
더러운 제도에서 태여난죄가 너무 크다 ...
오빠님 아무리 힘들일 있어도 비명에 떠나간 부모형제 생각하면서
열심히 사세요
우리는 반듯이 통일을 이루어야하고 억울하게 떠나간 영혼들을 달래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반듯이. 반듯이....
뒤를 돌아보면 넘 아픈 추억들과 상처땜에 몸부림치도록 괴롭고 눈물나지만 그런 힘든 터널을 지나왔기에 오늘과 같은 좋은환경도 있는게 아니겟어요~~~~~
눈물이 나구 외로운날에 아무도 님을 몰라줘도 항상 여동생이 함께 하고있음을 기억해요~~~
하나님이 인간을 견딜수있는 만큼의 고통만 주신데염 그니까 힘들어도 힘내는거에요~~~~
현실이 좀더 어렵더라도 항상 행복을 그려봐여 그린것만큼 현실로 찾아온데요~~~
최고가 되기 보다는 내가 선자리에서 내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때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해요~~
~~~~~~~아자 아자 ~~홧팅~~~~~~
남들에게 말하려면 넘 맘이 아파서 말할수가 없네요
이젠 몸도 마음도 아파하지 마세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 치더라도 늘 행복하고 씩씩한 모습만 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