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 간부 밥상은 쌀밥 돼지고기 명태 기본이 7찬 - 김재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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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소녀 수기①]농장원 1년 수당 10만원…간부는 모든 것이 특권 김재숙(가명·19세) 양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집을 나가 어린 나이부터 10여년 간 살림을 도맡아 했다. 학교도 가는 날보다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집안 살림과 짐승 키우는 일 때문이었다. 김 씨는 2008년 북한을 탈출해 다음해 10월 국내에 입국했다. 김 양이 자신의 수기를 데일리NK에 보내왔다. 김 양의 수기에는 북한 하급 간부들의 특권상이 잘 드러나 있다. 북한은 인민의 낙원이 아니라 간부들의 낙원인 것이다. 김 양의 수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수기에 적힌 가격들은 구 화폐 기준임) 나는 1990년대 후반 어머니가 집을 떠난 후 아버지와 오빠 셋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북중 국경을 넘었고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 오빠와 나를 키우느라 바쁘게 사셨다. 소학교 시절에 농장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열심히 일하셨다. 오빠는 당시 중학교를 다녔다. 집에는 개, 닭, 토끼 같은 짐승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사육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짐승키우기는 어려서부터 내 몫이었다. 우리 집의 생계는 이 짐승들에게 달려있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가 집을 나기시고 나서는 나는 소학교도 중도에 포기하고 집에서 짐승들을 돌봐야 했다. 부모들은 나가 일해야 하니 나 말고도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을 지키는 애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도둑들 때문에 도저히 집을 비울수가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리 집은 내가 없으면 집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학교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집에 도둑이 들었다. 아버지는 오빠에게 '사내 자식은 꼭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오빠가 살림에 관심을 두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역시 집안의 가장이셨고 또 어머니의 탈북이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자책감에 잠겨 궂은 날 마른 날 가리지 않으시고 열심히 일했다. 집안에서 일체 모든 살림살이는 자연히 나이는 어리지만 유일한 여자인 나에게 차려졌다. 좋고 싫고가 없이 나는 무조건 가사를 돌보는 안주인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어린 나를 일찍부터 조숙하게 만들었고 살림살이의 요령을 배우게 만들어주었다. 아버지는 1년 내내 열심히 일하셨지만 그래봐야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한 겨울이 되어 손에 쥐어지는 돈은 10만원 정도였다. 사실 제대로 돈을 받게 되면 23만원 정도는 될 수 있다. 그런데 분배 받는 쌀값을 제하고, 또 농장 연구실을 짓는 비용을 비롯해 각종 명목으로 돈을 제하고 나니 일반 농장원들의 손에 쥐어지는 건 많아야 10만원이었다. 이 돈으로 다음 해 분배를 탈 때까지 살아야 했다. 하지만 리 관리위원회나 리당 간부들은 유급 간부라는 명목하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년간 25만원이라는 현금과 2톤 가량의 옥수수가 세대별로 보장됐다. 남새를 비롯한 기타 부식물들도 일반 농장원들보다 2, 3배씩 타먹었다. 가을마다 일반 농장원들 집에는 고추가 20㎏정도 차려지지만 간부들은 10포대(400㎏)씩 들여갔다. 북한에서 돼지 한 마리를 50㎏이 넘게 키우려면 옥수수 가루를 30㎏ 정도는 먹여야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옥수수 1㎏이 1000원(구화폐 기준) 했다면 50㎏ 키우는 데 2만 4천 원이 드는 셈이다. 하지만 일반 농장원들은 사람이 먹을 것도 모자라는 판에 이런 호사는 꿈도 꿀 수 없다. 돼지는 죽이지 않은채로 팔면 1㎏당 3천원이니 50㎏면 15만원이고 고기를 잡아서 육으로 파는 사람은 1㎏당 천원을 덧붙여 4천원에 판다. 15만 원으로 다시 새끼돼지를 사려면 6만 원이다. 그럼 손에 남는 돈은 9만 원이다. 결국 무엇 하나 싸게 살 수 없는 일반 농장원들에게 짐승 키우는 일은 인력도 많이 들지만 팔아서 이것 저것 떼고나면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간부들은 집에서 기르는 짐승도 그 숫자가 일반 농장원보다 훨씬 많다. 또 일반 농장원들은 풀도 미처 먹이기 바쁘지만(어렵지만) 간부들은 옥수수를 비롯한 알곡을 끓여 먹였다. 이들은 새끼돼지도 농장 돈사에서 공짜로 가져오는데다 키우는 것도 사료를 팍팍 먹여 키우니 짐승기르기도 식은 죽 먹기고 돈도 쉽게 번다. 이래 저래 일반 농장원들은 살기 힘들고 간부들만 잘 살게 되어 있었다. 리 간부들은 짐승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것도 우리 일반 농장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리에서 간부하는 사람들의 밥상을 들여다보면 이밥은 당연하고 찬도 보통 없어서 7가지다. 매 끼마다 명태나 까나리, 송어 등의 어물류와 돼지고기는 빼지 않고 오르며 야채, 튀김, 전 등 여러 가지 진수성찬을 갖춰 먹는다. 또 일년 내내 농장에서 땔감을 보장해준다. 분조별로 담당해서 한 달에 참나무 80통(둘레 20㎝, 길이 400㎝)씩 마련해준다. 이만한 량이면 소달구지로 두 달구지 정도 되는데 한 달구지만도 8만 원에 맞먹는 량이었다. 또 석탄은 해마다 좋은 것을 2톤씩 공급하며 땔감을 실어다 주다 못해 나무 패주는 사람까지 조직해 간부들의 집에 팬 나무가 떨어질세라 보장해준다. 간부집에 가서 하루종일 나무를 팬 사람은 그 날 하루 일한 것으로 수당을 잡아준다. 북한의 농장들에서 간부생활을 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간부를 그만두게 되면 살던 집(집터 300~500평, 방 및 창고 7칸)만 본인 것이 되지만 권력이 없기 때문에 각종 특권은 사라진다. 그래서 자신이 힘이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많이 끌어들이려 악착같이 거둬들인다. 농장간부들의 비리가 얼마나 심했는지 2009년 5월 함경북도 **군의 **리에서는 리 간부들이 벼를 일인당 2~5톤씩 횡령한 것이 제기되어 중앙검열그루빠의 검열을 받고 리 관리위원회와 리당이 해산되고 결국 다른 리와 합쳐지는 일도 생겼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년 내내 열심히 일해도 현금은 기껏해야 10만원이다. 식량배급은 아버지와 나, 오빠가 받는 량이 모두 달랐다. 농촌에서 분배받을 때 보면 초등학생 1명은 1년에 벼 50~70㎏이고 중학생인 경우 100~120㎏였다. 분배받은 벼는 정미해서 깨끗이 손질하면 기껏해야 70%밖에 나오지 않는다. 옥수수인 경우 어린 아이(초등학생도 포함)는 이삭채로 100~150㎏, 중학생은 200~300㎏였다. 어른인 아버지는 중학생인 오빠보다 20㎏를 더 받았다. 년간 농장에서 분배로 차려지는 식량은 결국 아버지와 오빠, 나까지 셋이서 이삭강냉이 800㎏ 좀 더 되었는데 이것도 알로 까서 말리면 기껏해야 20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농촌 사람들은 밥이 주식이고 기름을 비롯한 다른 영양보충거리들이 부족했다. 보통 농촌 집들에서 식구에 관계없이 한 달에 소비하는 기름은 반병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부족 되는 영양보충을 전부 밥으로 하려 한다. 그러니 당연히 먹는 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평균 1인이 한 끼에 옥수수쌀로는 400그람, 흰쌀로는 200그람 밥을 먹는데 이렇게 계산하게 되면 우리 집은 여자인 내가 좀 적게 먹는다고 해도 하루 평균 잡아 3㎏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한다. 한 달이면 90㎏, 1년이면 1100㎏ 정도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하는데 농장에서 분배로 받는 옥수수쌀은 기껏해야 200㎏, 백미는 정미하면 200㎏, 합쳐서 400kg인데 이 것 으로 일 년 동안 먹고 살기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한 식량은 짐승을 기르거나 소토지가 있는 사람들은 옥수수나 감자 등을 심어 식량을 보탰다. 하지만 거의 모든 농장원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농장에서 쌀을 전불(꾸어먹는 것)로 얻어다 먹었다. 어떤 집들은 해마다 늘어나는 전불 덕분에 빚더미에 앉아 나중에는 돈이고 쌀이고 아무것도 배급받지 못한 집들도 있었다. [탈북소녀 수기②]"간부집 자식들 농촌동원도 안나가"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농장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빚더미 뿐이라 악이 난 사람들은 본격적인 추수철을 앞두고 농장 곡식을 도적질하기도 했다. 또 아이, 늙은이(노인) 할 것없이 총동원해서 가을이면 이삭줍기를 했다. 이삭줍기를 하면서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논에 쌓아놓은 볏단들에서 벼 이삭을 마구 잘라가기도 했다. 나도 가끔 친구들과 벼 이삭을 주으러 들에 나갔다가 볏단에서 벼이삭을 훑거나 잘라오기도 했다. 가위나 낫으로 벼 모가지만 잘라 50㎏짜리 마대에 가득 채우면 백미 20㎏이 나오곤 했다. 또 벼이삭을 마대 안에 밀어넣고 늄도시락 뚜껑으로 훑으면 벼가 떨어지는데 이런 방법으로 한 자루 훑어 정미하면 37㎏의 쌀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들키지 않게 잘 해야지 까딱 잘못해 감시하는 농장원이나 리 간부들의 눈에 걸리는 경우에는 정상적인 배급마저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도시 학교 아이들은 봄이나 가을이면 무조건 집체적으로 농촌동원을 나오는데 우리 같은 농촌 학교에서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지원을 다녔다. 농촌 아이들인 경우에도 집이 잘 살거나 부모가 힘이 있으면 농촌동원을 나가지 않는다. 농촌에서 힘있는 부모들이라면 대체로 농장 간부이거나 작업반장, 분조장 등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식을 농촌동원에서 면제시켜주는 대신 가을이면 자신의 능력이 닿는대로 담임교원의 집에 물질적인 방조(지원)를 아끼지 않는다. 소학교 같은 반 김선희(가명)는 아버지가 남새 분조장이어서 해마다 가을이면 담임 교원의 집에 김장용 배추와 무를 제일 좋은 것으로 각각 200㎏씩 보내줬다. 또한 한정수(가명)의 아버지는 담배농장 분조장인데 담배 수확이 끝나면 담임 선생님의 집에 독초 담배 100㎏(1㎏에 4500원)을 넣어었다. 다른 옥수수분조장들은 가을이면 옥수수 200㎏을, 일반 농장 간부들은 벼만 200㎏(1㎏당 700원, 정미쌀 2500원)씩을 넣어준다. 농촌학교 교원들은 이런 재미에 시골에서 교사를 하는 것 같다. 일부 아이들은 집에서 해주는 제한된 밥을 먹다가 가끔 먹고싶은 간식을 먹기 위해 집에서 옥수수를 비롯한 알곡을 채서(훔쳐서) 바꿔먹기도 한다. 옥수수 네 이삭이면 꽈배기(과자) 1개를 바꿔먹을 수 있다. 또 옥수수 4개(알로 1키로)로 껌 두 개를 교환했다. 심지어 아버지나 자식들이 술을 외상으로 먹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집도 있었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기 위해 콩(1kg 1800원, 기름 1병 2400원)이나 기장, 좁쌀, 옥수수 등으로 바꿔먹는 것이 1년에 100㎏ 정도 될 것이다. 우리 동네 영수(가명)는 부모님 몰래 간식을 외상으로 먹은 것이 쌓여 옥수수 100㎏을 갚아야 하는 형편이 됐다. 꽈배기 장사꾼은 한 참이 지나 농사꾼들이 제일 넘기 어려운 보릿고개에 영수의 어머니를 찾아와 당장 옥수수 100㎏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당한 영수 어머니는 너무 기가 막혀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아이에게 외상을 주고 이제 와서 부모한테 생색이냐'고 장사꾼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농촌사람들은 기름도 한달에 보통 반병 정도밖에 먹지 못한다. 기름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기름을 사먹을 수 없다. 농촌사람들은 주로 옥수수눈으로 짠 기름이나 해바라기기름, 깨기름을 주로 먹는다. 또 기름짜고 나오는 대두박(콩깻묵)으로 밥을 비벼먹기도 한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니까 아이들 상당수가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농촌 사람들은 밥 이외에는 다른 영양 보충거리가 별로 없다. 보통 농촌 집들에서 식구에 관계없이 한 달에 소비하는 기름은 반병 정도다. 부족 되는 영양보충을 전부 밥으로 하려 한다. 그러니 당연히 먹는 밥의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평균 1인이 한 끼에 옥수수쌀로는 400g, 흰쌀로는 200g 정도 밥을 먹는데 이렇게 계산하게 되면 우리 집은 여자인 내가 좀 적게 먹는다고 해도 하루 평균 잡아 3㎏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한다. 한 달이면 90㎏, 1년이면 1100㎏ 정도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하는데 농장에서 분배로 받는 옥수수쌀은 기껏해야 200㎏, 정미된 백미 200㎏, 모두 해야 400㎏에 불과하다. 이것 으로 일 년 동안 먹고 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렵게 살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해 하고 싶은 공부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북한에서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살림살이만 하다가 2009년에 탈북했다. 가난과 독재에 신음했던 내가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은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남이나 북이나 살기 어렵기는 똑 같은 거 아니냐'고 말한다. 그렇다. 사람이 느끼기에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런데 먹고 싶은 것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남한과 강냉이밥도 부족해 배를 곯고 살아야 하는 북한 중에 어디서 살고 싶냐고 물으면 '남북이 마찬가지'라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2010년 2월 김재숙 자료제공 : 데일리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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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혹 누가 그런 잔혹한 주장을 해도 말려야 하는게 아니겠어요?
그것들이 전부 군자금으로 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거지요.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연장시킨다는 것도요.
북한 지원해줘도 결국엔 주민들에겐 쌀 한톨 안들어간다
개돼지 3대 김씨왕조(?) 21C에 왕조국가가 뭔 말이야 대체.. 지금이 무슨
왕조국가시대냐??
남한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하며 반대 손으로 핫도그 먹다 배불러서 쓰레기통에 처버리고
비만인구 너무 늘어서 다이어트 열풍이다 뭐다 하면서
남한에는 한해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줄 아냐??
그래서 남아도는거 북한 지원 해봤자
개돼지 김씨3대만 배불리 처먹어서 저리도 팅팅 불어터진거 아니냐
지원? 웃기지마라.. 해봣자.. 개정일이와 북한 수뇌부만 배부를 뿐이다
하하..
여기 미국에는 집이 없는 사람이 2백만명인데
여기 미국에서 지금 이주위에서 집을 살려면 보통직장에서 몇세대를 일해야 함.
정말 좋은데서 살았구랴. ㅎㅎㅎ
그리고 이게 사실이더라 하더라도 자본주의에서는 부의 차이가 백만배도 나는데
그정도 부의 차이가지고 불평이요? ㅎㅎㅎ
여기 미국가게에는 단것 천지요. 왜냐면 남미의 사탕수수 그리고 미국내엔 옥수수가 당을 축출해서 맨 단것 천지인데
난 맨날 밥먹소. ㅎㅎㅎ. 울 아버지는 단것 많이 먹다 당뇨병걸렸죠. ㅎㅎ
그런데 결국 북한 전체에 수용소에서. 이. 벼룩 모기. 파리. 구더기는. 굶는일없이 잘살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정작 정일이의 인민은 사람이 아니라 앞에 나열한 빈대들이 북한 인민 이였나 봅니다
정치지 뭔지 하는 놈들이 죄지....
미국 경제 봉쇄가 없으면 왜서 우리 민족이 이런 꼴을 보이겠난....
핵무기 만들 돈으로 먹을꺼만 지원했어도..전부 북한 좋다고 그기서 열시미 살았을것을..
지 무덤 지가파는거야~~조만간 백성의 손에 쳐단되길..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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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1-06-19 18:17:48
말하는 사람은 개념이 없는 소수일 뿐입니다. 그런 말에 흔들리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으니, 힘내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