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절 많은 내 운명 - 김광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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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때때로 조용한 시간이면 생각에 잠기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다. 추억의 돛을 달고서 저 멀리 올라가보면 곡절도 많은 내 한생, 굽이굽이 흘러왔네 사나운 파도를 넘어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 대한민국 사랑의 품에 삶의 닻을 내리었네 정다운 어머니같이 두 손 잡아 이끌어주는 대한민국 사랑의 품에 나의 운명 맡기리 영원히, 영원히 물론 이 노래는 북한영화 “곡절 많은 운명”의 주제가인데 내가 좀 가사를 바꾼 것이지만 어쩐지 이 노래가 나와 같이 인생사가 복잡한 사람들을 비유하여 지어진 노래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원래 중국에서 태어나 열네 살까지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자기 조국을 찾아간다고 북한으로 갔다. 그런데 중국에서 살 때는 조선사람이라는 이유로 중국사람들한테서 민족적 멸시와 모욕을 많이 받았다. 거리에 나가면 중국애들이 ‘꼬리빵즈’ 즉 ‘고구려 몽둥이’라고 하면서 놀려주고 돌멩이를 던지고 하였는데 고구려 때에 일본의 민족이간 정책으로 고구려에 있는 중국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 중국 사람들이 대를 이어 가면서 그 앙갚음을 한 것 같다. 그러다가 1966년 10월 14일 여권을 떼고 조국을 찾아 하얼빈에서 국제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는데 마음은 마냥 즐겁고 설레었다. 중국 단동을 지나 신의주를 거쳐 평양으로 가면서 창밖으로는 황금벌에서 낫으로 벼 가을하는 농부들의 흥에 겨운 모습들이 스치곤 하였는데 “아, 이곳이 나의 조국이구나! 선조의 무덤이 있는 조국, 한줌의 흙 한포기의 풀도 한없이 정다운 그곳이구나!”하는 생각에 어쩐지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리였었다. 그런데 정작 북한 땅에 도착하여 생활을 시작해보니 부풀었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 절망감만 작은 마음을 꽉 채웠다. 집이 없어서 2년간 여관생활을 하였고 배고픈 고생을 엄청 많이 했다. 여관생활 2년에 이어 합숙생활 2년을 하면서 “중국에서 그대로 살 것을 왜 왔냐고?” 후회를 많이 하였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배고픔이었다. 합숙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 안 구조가 한 줄로 남자, 한 줄로 여자가 앉아 식사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아침에는 옥수수밥, 점심에는 검은 밀가루 빵, 저녁에는 옥수수국수였는데 그 양이 너무 적어서 밥을 먹고 돌아앉으면 배가 고프기 시작 한다. 특히 점심시간에는 검은 밀가루빵 4조각을 주는데 어머니가 당신의 몫에서 3조각을 나에게 주시면서 “나는 소화도 잘 안되고 괜찮다”라고 하시면 “엄마도 배고프시겠는데 엄마 드세요”라고 말은 하면서도 게눈 감추듯이 먹어버리곤 하였으니 정말 내가 너무나도 불효한 것 같다. 점심시간이면 어머니 몫인 그 빵을 더 먹겠다고 어머니를 기다렸다가 어머니가 식당으로 들어가시는 시간을 맞추어서 어머니의 몫을 빼앗아 먹곤 하였으니 철이 없어도 너무나도 없었고 덜된 자식이었다. 내가 한국에 온 이후에는 남들이 그래도 고령의 어머니를 업고 왔다고 효자라고 칭찬을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나에게 돌려주던 그 사랑 천만분의 하나에도 보답하지 못한 죄책감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또 내가 북한에서 식량난 못지않게 힘들었던 것은 중국에서 살다가왔다는 이유로 애들이 ‘똥떼놈’이라고 놀려주면서 빼앗고 때리고 모욕하고 멸시한 것이다. 너무나도 견디다 못해 국방체육구락부 권투소조에 들어 만 4년 동안 열심히 권투를 배웠다. 전국 고등중학생대회, 전국 구락부생 경기대회 등 경기에도 많이 참가하고 주변에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하여 그때부터는 생활에서 좀 안착이 된 듯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체질이 몸무게가 적게 나가고 팔이 길고 허리가 유연하여 권투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하였고 인민군 체육단을 비롯하여 전문 체육단에서 선수로 뽑아가겠다고 구락부에도 집에도 많이 찾아오곤 하였지만 나의 부모님들이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직업적인 체육인은 되지 못했다. 그 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 하필이면 강원도 김화군에 위치한 최전방부대였고 그것도 경보병(한국군 특전사)에 입대하여 살인적인 훈련도 많이 받았고 고생도 엄청 많이 했다. 20kg이상의 전투장구류들을 지고 하루 보통 200~300리 강행군과 천리 행군, 삼천리 행군을 비롯하여 실탄사격, 단도조법, 벽돌 까기, 격술, 밧줄타기, 매복, 습격, 지형학훈련 등 한국영화 “실미도”에서 나오는 훈련모습은 비교도 안 되는 정도로 게릴라 훈련을 하였고 남한 국군 군가 “진짜 사나이”도 배웠고 국군의 일과, 제식동작 등 국군생활과 남한의 자연지리조건, 주민들의 언어와 풍습도 다 교육받았다. 그 때 즐겨 읊던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데. …… 내 단숨에 날아 넘어야 할 태백의 준령은 그 어디 헤엄 쳐 건너야 할 한강의 도하지점은 그 어디 나루냐! 내 기어이 가야 할 남녘해방의 그날을 눈앞에 그려보며 나는 서있다 조국의 지도 앞에... 한 해 한 해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군복무의 나날들과 힘들었던 북한에서의 생활들이 희미한 기억들에 차츰차츰 잊혀가고 있지만 그 암흑의 땅-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을 비롯한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기까지의 그 과정과 나날들은 수년간이 지났지만 어제인 듯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곤 한다. “하루는 가고, 하루는 만나고 하루는 돌아온다. 3일이면 충분하니 기다리라고.” 거짓 약속을 하고 고령의 어머니를 업고 평양-온성행 열차에 오른 것은 2003년 2월 10일 저녁 7시였다. 열차에 겨우 오르니 발 디딜 자리가 없고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 안에서 어머니가 걱정되어 열차 뒤켠에 있는 화물칸에 찾아가서 화물원에게 우리의 도중식사로 준비했던 도시락과 돈 500원을 찔러주면서 화물칸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화물칸에서 너무 추워하시기에 집에서부터 준비해갔던 사방 2m짜리 비닐박막과 담요로 어머니를 둘둘 말아놓으니 어머니도 괜찮다고 하시고 한결 마음이 놓였다. 보통 열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갈 구간이지만 급행열차도 아니고 도중에 정전이 되다보니 약 40여 시간이 지나서야 온성군 남양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니 역 보안원이 “왜 국가용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가?”고 따지면서 법을 위반했으니 벌금 천원을 내라고 하여 벌금으로 천원을 줬더니 “개인집에서 숙박하지 말고 무조건 여관에서 숙박하고 24시간 내로 용무를 끝내고 무조건 돌아가라. 그리고 앞으로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죄인 다루듯이 취급할 때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칼자루 잡은 보안 원 앞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남양에 도착하여 새벽 2시 반경에 나는 아는 사람의 집을 찾아들어갔더니 이미 다른 손님이 들어있었고 집주인이 말하기를 “날이 밝으면 무조건 여관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누가 보안원에게 보고라도 하면 자기들은 먼 산골로 추방당한다.”고 하면서 나와 어머니를 반갑지 않게 맞아주었다. 그런대로 그 집에서 앉은 채로 밤을 밝히고 날이 밝자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냉방인데다가 어지럽고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마당에 나가서 땔감나무로 장작 2마대를 사놓고 어머니의 간식을 좀 해결하고는 국경경비대 초소에 가서 국경경비대 분대장을 만나서 나와 어머니가 며칠간만 중국에 가서 친척의 도움을 받고 돌아오겠으니 두만강을 건널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돈 2만원을 내고 돌아올 때 손전지(후레쉬)와 기타 좋은 선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니 먼저 돈 2만원과 내가 손에 끼고 있던 가죽장갑을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지금 당장 어머니를 모시고 자기네 분대가 담당한 구역을 통과해도 괜찮다고 하여 여관에 가서 어머니를 업고 그 군인의 뒤를 따라 저녁 5시경에 두만강 얼음 위를 건너 중국 도문에 도착하였다. 도문에 도착하여 이미 전부터 알고 있던 형님의 친구인 조선족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여 그분의 집에서 6년 전에 헤어졌던 형님과도 만나고 형님이 중국 장춘에 있는 브로커에게 연결해주어 그 이튿날 장춘역에 가서 그 브로커의 안내를 받으면서 기차를 타고 며칠 동안 가서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또다시 베트남 브로커에게 인계되고 캄보디아 브로커에게 인계되고 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캄보디아 수도에 있는 한국인 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 걸음걸음이 위험이 뒤따르고 힘들고 어려운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기장 힘들었던 것이 베트남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에 도착할 때였던 것 같다. 베트남에서 우리를 관리하고 있던 한국인 김사장님을 보고 오늘밤 걷는 노정이 거리가 대략 얼마나 되며 거리가 멀면 간식도 좀 준비하겠다고 하자 “노년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에 특별히 차를 대기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마음을 놓았었는데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날 밤, 초저녁부터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물 한 모금 못 먹고 온밤 걸었는데 어머니를 업은 상태에서 진흙탕에도 넘어지고 담배 밭에도, 논밭에도 넘어지면서 수백 번을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걸었는데 내가 힘이 다 빠지니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80년이상 살았으니 살만큼 살았다. 이러다가는 둘 다 죽는 다. 그러니 나를 버리고 너만 꼭 살아서 가라!” 그럴 때마다 “엄마!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왜 엄마까지 힘들게 해요? 제발 좀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 하면서 업히지 않으시겠다는 어머니를 끌어당겨 업군 하면서 캄보디아에 도착하였다. 오전 10시경에 한국인 목사님이 승합차를 가지고 오셔서 맨 앞에 선 나에게 “북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했는가?”고 물으시어 나는 솔직하게 “군부대 사무원을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안경너머로 나를 쏘아보면서 “군부대 사무원이면 괜찮게 살았겠는데 왜 오냐?” 하면서 짜증스런 말투로 말했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수백 번을 넘어지면서 온 사람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못해줄 망정 어떻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가?! 그 목사님이 왜 그때 그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날 그 목사님을 따라 교회에 도착하여 “나는 죄인이다.”라고 무조건 따라하게 하고 성경공부를 무조건 하라고 하여 나는 눈이 나빠서 글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큰 글자로 된 성경책과 돋보기안경을 가져다 주셨고 사도성경과 주기도문을 무조건 외우도록 하고 찬송과 율동 5가지이상 무조건 배우도록 할 때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지만 한국에 오는 것이 목적이니 울면서 겨자 먹는 격으로 따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외운 사도성경과 주기도문, 그리고 성경공부가 그 후 나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도 생각되기를 우리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줌에 있어서 너무나 강요적이지 않았나, 그 방법 말고 좋은 기억 속에 남도록 다른 방법으로 유도하면서 신앙공부를 시켰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지 않을까 생각 되군 한다. 물론 북한생활과 타국살이에서 성격들이 많이 이지러지고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는 이해도 되면서 감사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좌우지간 여러 가지 시련과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면서 2003년 3월 27일 드디어 그토록 소원이던 자유의 땅, 민주의 땅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쓰기에 앞서 돈 한 푼 없이 맨 주먹만 쥐고 찾아 온 우리들에게 진정한 동포애의 정을 가지고 집을 주고 정착금 주고 생계비 주고 여러 가지 의료혜택 등 많은 관심과 사랑, 혜택을 돌려주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진정으로 드리고 싶다. 남한에 와서 처음 배운 말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라”라는 말이었는데 우리들은 너무나도 큰 것을 받았고 받은 것에 대해 보답하지 못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한 탈북자 선배가 말하기를 “대한민국 정부를 진정한 어머니 품으로 대하고 있는가?! 단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과연 진심을 주고 충성하고 있는가? 가슴 아프게 자문해보게 된다고.”하였던데 정말 맞는 말이고 심금을 울리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천국과도 같은 대한민국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쓰려면 몇 달 몇 일을 써도 모자라겠기에 쓰지 못하고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이 80년대 중반에 전국 모든 세대에 벽시계와 나이롱 담요를 한 개씩 선물을 주었을 때 북한 주민 모두가 너무나도 감격에 겨워 “세상에는 영도자가 많고 많아도 어버이 수령님 같으신 분은 없다.”고 만세를 부르며 충성을 맹세했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나에게 집과 승용차, 색텔레비죤(칼라TV), 냉장고, 세탁기 등 각종 전자제품과 생활용품을 마련해주고 세상에 부럼 없는 행복을 누리도록 보살펴주고 있는데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런지 도저히 모르겠다. 모쪼록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평화통일의 그날까지 통일역군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면서 받기만 하지 말고 주기도 하면서 더욱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이 그 보답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속 결의를 다시금 굳게 다진다. 2011년 5월 김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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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부에서 무슨 날에 벽시계랑 담요를 주었나요? 저는 저희 집 화재 났을 때 봉사단체(여성 적십자인가?)에서 담요, 쌀.... 여러가지 주더군요. 대통령 생일, 그 어떤 날도 암것두 안 주더니......
크리스마스에 교회가면 빵은 주고요.
결혼식 가면 뷔페 주고요. 식권이야 그냥도 달라면 주지만 귀찮아서 안 가고요.
제가 북에서 안 태어난게 정말 감사하지요.
지금 김 광혁님처럼 남한의 생활에 감사해 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일부 소수는 못된 성질을 못 버리고 주정 떠는 분들이 있어요.
그 점이 언짢기는 해요.
김 광혁님, 고생하셨읍니다.
남은 인생 의미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남 원주민 -
이젠 행복한일만 있을거예요...
가슴 아프고 감동적인 또 어머님이시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신은 많이 살았다고 아들만 살라고 등떠미시는 어머님 마음..
정말 잘하셨습니다. 아마 그때 어머니를 두고 살아남는다고 할들 평생 얼마나 가슴치며 아파할까요.
이젠 행복한 일만 생길겁니다.
김광혁님이 이야기를 읽으니 참으로 많은 고생 하시면서도 노모를 모시고 오신데 대하여
경이롬을 느낌니다
훌륭하신 분이시고 효자이십니다 그 마음으로 잘 사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캄보디아의 그 목사님 지금도 여전하신 모양이군요
목사이고, 선지자이시기 전에 인간적이여야 됨을 아직도 모르시고 계시는듯 합니다
참으로 구원을 받으셔야 할 분임을 지난시기에 겪어보아 압니다
그 분이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시는 분은 아니니 여이치 마시고 김광혁님이 신조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사시고 노모와 함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안계셨으면 지금처럼 숨을쉬며 이렇게 여유롭게 댓글도 달수없습니다.
정말로 대단한거같애요. 저는 비록 아직 첩부지 20대초반이긴해도 이글을 읽으면서
참많을걸 깨달았어요. 부모님은 늘 자식 걱정에 하루라도 속편한날이 없고 물가에 내논아이라는걸....삶과 죽음에 끝에서 자신을 포기하기는 어머니의 말씀에서도 얼마나 김광혁님을 사랑하고 아끼셨는지 알수가있네요.
이제 자유로운 곳에 오셨으니 무겁고 무서운 기옷들은 가슴한구석에 내려놓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대단한거같애요. 역시 가족이란 존재는 벼랑끝에서도 살아남게하는힘아았는고같네요
얼마나 감동받고 공감햇는데 그 쪽이 더 개보다 못한 놈아에요
좌파 목사들이 대부분 그럽니다. 온전한 한국의 목사들은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힘든 우여곡절을 겪으시고, 대한의 품에 안기셨으니 다행입니다.
늘 행복하시길...
김광혁부부와의 기자회견 진행
(평양 11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
남조선괴뢰들의 비렬한 모략과 회유기만책동으로 남쪽땅에 끌려갔다가 환멸을 느끼고 공화국으로 돌아온 김광혁부부와의 국내외기자회견이 8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되였다.
기자회견에는 우리 나라 출판보도부문과 총련의 기자들,외신기자들이 참가하였다.
사회주의조국에 체류하고있는 해외동포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먼저 김광혁이 발언하였다.
그는 자기의 지난날이 너무도 죄스럽고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말 뭐라고 속죄하였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지난 시기 학습과 조직생활을 하기 싫어하였다.
그러다나니 고난의 행군시기 일시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법월경까지 하였다.
그후에도 돈에 눈이 어두워 2008년 3월 또다시 몰래 비법월경하였다.
중국에서 여기저기 헤매다가 김희산이라는 자를 알게 되였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그 자는 남조선괴뢰들과 결탁하여 우리 공화국 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거간군이였다.
당시 나는 병에 걸려있었는데 어느날 그 자가 찾아와 남조선에 가면 병도 고칠수 있고 돈도 마음대로 벌수 있다고 꼬드겼다.
그리고 식당에서 음식과 술까지 사먹이면서 남조선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남조선으로 간다는것이 조국을 배반하는 길이였기에 선뜻 결심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놈은 집요하게 회유하였다.
신념이 확고하지 못하였던 나는 그 자의 얼림수에 넘어가 남조선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 자는 남조선에 있는 어떤 자와 전화로 《보증인》이 어떻고 돈이 얼마고 하면서 한참 쑥덕거리고나서 이제는 다 됐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남조선에 가면 그 대가로 자기에게 돈을 얼마 주겠다는 보증서를 쓰게 하였다.
이 거간군들은 괴뢰정보원 놈들의 조종밑에 우리 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고는 당국에서 돈을 받고 월남도주한 자들에게서도 돈을 빨아내며 이중으로 돈벌이를 하고있다.
그후 나는 이놈 저놈의 손으로 계속 넘겨지면서 중국 곤명에 갔다.
안내자를 따라 어느한 산골짜기에 있는 집에 가니 거기에는 여러명의 우리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들을 끌고온 거간군들은 여기서도 우리에게 남조선에 가면 일인당 돈을 얼마씩 바쳐야 한다고 하면서 채용증에 손지장까지 찍게 하였다.
그리고는 수시로 남조선과 전화로 련계를 가지면서 초소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우리를 타이의 방코크에 끌고갔다.
거기에 도착한 우리는 남조선에서 온 자를 따라 어느한 건물에 가서 하루밤을 지낸 다음 《난민수용소》라는데로 끌려갔다.
《난민수용소》는 타이에 불법입국하는 사람들을 관리처리하는 곳인데 남조선괴뢰들은 우리 사람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기 위해 거기에 방들을 사두고있었다.
《난민수용소》에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참을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어느날 타이주재 남조선대사관에서 왔다고 하는 두놈이 나를 찾아와 사진을 찍고 어디서 왔는가를 확인하였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 비행기에 실려 남쪽땅으로 끌려갔다.
이어 김광혁의 안해 고정남이 발언하였다.
그는 우리 사람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기 위한 괴뢰들의 책동은 참으로 교활하고 집요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계속하였다.
나는 장사에만 눈이 어두워 다니다가 어느날 시장에서 안호근이라는 자를 만나게 되였다.
그 자로 말하면 우리 제도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비법월경시켜 남조선괴뢰들에게 넘겨주는 놈이였다.
그 자는 처음에 나의 환심을 사보려고 옷가지들을 사주었다.
나는 점차 그놈을 믿게 되였으며 나중에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자는 꼬임에 홀리워 2008년 9월에는 비법월경까지 하였다.
그후 그 자는 나에게 남조선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기 시작하였으며 돈벌이감을 마련하겠으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나를 계속 붙들어놓았다.
그동안 나는 그 자가 안내해준 집에 숨어있으면서 남조선TV극과 색정적인 노래들을 보고 들었다.
그 과정에 남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이 싹트게 되였고 또 안호근은 남조선에 가면 많은 돈을 벌수 있다고 계속 나발을 불어댔다.
나는 그 말에 넘어가 남조선에 가면 잘사는 사람과 결혼하여 돈도 많이 벌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이렇게 남조선에 대한 환상에 빠진 나는 그 자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후 나는 안호근의 소개로 남조선에 있는 김경희라는 녀자의 조종과 그가 뿌리는 돈에 매수된 거간군들에 의해 타이까지 가게 되였다.
타이에 이르자 김경희는 나에게 전화로 이제는 북으로 끌려갈 위험이 없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남조선으로 오면 자기에게 그동안의 비용과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고 오금을 박았다.
나도 타이의 《난민수용소》에서 두달가량 갇혀있다가 남조선괴뢰들의 조사를 받고 남쪽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이렇듯 남조선괴뢰들은 해외각지에 저들의 앞잡이들을 거미줄처럼 늘어놓고 그들을 통해 우리 사람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는 놀음을 계획적으로 벌리고있다.
남조선에서 비참한 생활을 겪으면서 비로소 놈들에게 속히웠으며 거기에 있어야 죽음밖에 차례질것이 없다는것을 깨닫고 삶의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아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이어 그들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 기자:우리 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기 위한 리명박패당의 교활한 회유기만책동의 일단이 다시금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본다.
김광혁부부가 남조선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답(고정남):사실 우리는 남조선에 가면 잘 먹고 잘 살수 있을것이라고 어리석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작 남쪽땅에 가보니 남조선이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였고 썩을대로 썩은 사회였다.
TV에서 나를 유혹하였던 화려한 생활은 모두 거짓이고 기만이였다.
내가 살게 되여있던 광주시의 집만 보아도 그렇다.
매우 낡은 쪽방인데다가 구석마다 곰팡이가 끼여있고 사방 거미줄이 늘어져있는가 하면 벌레들이 기여다니고 악취까지 풍기였다.
지금껏 환상속에 그려보았던 집이 과연 이런 시궁창같은것이였는가 하고 생각하니 억이 막히고 눈물이 났다.
소름끼치는 그 집에서 살수 없어 다음날로 뛰쳐나왔다.
그후 나는 변변한 거처지가 없이 떠돌아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현재 남조선에서는 《탈북자》들의 95%이상이 제집이 없이 세방살이를 하고있다.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집은 더 말할것도 없고 하루 한끼 제대로 먹는것도 문제이다.
언제인가 TV로 《탈북자》자매가 산속에서 짐승처럼 등산객들이 먹다버린 음식찌꺼기를 씹고 일년내내 오물을 주어먹으며 한지에서 나무잎을 덮고 살고있는데 대하여 울분을 토하는것이 방영된적이 있다.
나의 처지도 크게 다를바 없었다.
굶기를 밥먹듯 하였고 남이 쓰다버린 물건짝들도 주어모았다.
남조선에서 《탈북자》들에게 명색상 생계비라는것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한몸도 지탱하기 어려운 보잘것없는 것인데다가 그나마 결혼하거나 아무 직업이나 구하면 즉시에 자동적으로 끊기우고 만다.
어떻게 하나 살아보려고 가정을 이루었으나 결혼신고서를 내자마자 생계비가 끊기였다.
우리 두명의 생계비를 다 합쳐야 한달 세금이나 겨우 낼 정도였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였다.
남조선에서는 아이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처럼 세금종류가 헤아릴수 없이 많고 그 돈 또한 생눈알을 뽑아먹을 정도이다.
우리는 고민끝에 가정을 이룬지 두달도 못되여 다시 생계비를 얻기 위해 형식상의 리혼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게 생계비라는것은 《탈북자》들을 살려주는것이 아니라 가난에 쪼들리게 하고 직업도 가정도 제대로 가질수 없게 하는 무서운 올가미이다.
대답(김광혁):직업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남조선에서 《탈북자》들이 일자리를 구한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나와 안해는 생계비로는 도저히 살수 없어 직업을 구하면 좀 나을가 하여 여기저기 찾아 헤매였다.
하지만 가는곳마다에서 《탈북자》라는 리유로 매번 거절당하였다.
우리는 끝내 똑똑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손전화기부분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시간별로 일하는 일거리를 겨우 잡았다.
회사측에서는 나에게 누구도 하기 꺼려하는 제일 위험하고 힘든 일만 골라 시키였다.
그리고 안해에게는 3명이 해야 할 일감을 주면서 보수는 한명분만을 주었다.
회사의 불공평한 처사에 참지 못하고 하루는 내가 작업하던 손전화기를 바닥에 둘러메치며 왜 돈을 적게 주는가고 들이대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런것들이 어디서 왔는가고 하면서 우리를 내쫒았다.
대답(고정남):그후부터 남편은 썩어빠진 남조선땅에 왜 왔는가고 울분을 토하면서 늘 술에 취해있었고 그로하여 병까지 도지였다.
남조선에서 《탈북자》들은 온갖 랭대와 따돌림으로 하여 우울증과 정신장애를 비롯한 각종 병마에 시달리고있다.
나도 직업을 구해보려고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남의 집 아이보개도 해보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해보았으며 위생실청소도 해보았다.
남편이 앓아 누운데다가 임신까지 하게 되자 살아갈 길이 더욱 막막해진 나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대구에 있는 한 간호학원에 들어갔다.
간난신고끝에 학원에 들어갔으나 거기에서 당한 수모와 멸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이룰수 없다.
교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수 없어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보아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점심식사도 따로 해야 하였다.
같이 식사하게 되는 경우에도 남쪽사람들은 내가 마련해간 음식에는 독약이라도 친것처럼 애당초 수저를 대려고 하지 않았다.
환자들마저 《탈북자》한테서는 주사를 안맞겠다고 하면서 눈까지 흘기며 피해버리는 정도였다.
그 모든 랭대와 멸시속에서도 나는 자격증만 손에 쥐면 직업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해산한지 열흘만에 손과 얼굴이 퉁퉁 부어 오른 상태에서도 학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온몸에 스며드는 차디찬 바람을 이겨내며 학원으로 가야만했던 나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일로 하여 지금도 산후탈로 고생하고있다.
병까지 얻으며 손에 쥔 자격증도 휴지쪼각이나 마찬가지였다.
살기가 힘들어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싶어서가 아니라 돈을 준다고 하기에 나중에는 교회당에까지 찾아다니였다.
월남도주자들의 처지는 이처럼 참혹하다.
《탈북자》들은 자기들의 불행한 처지를 절망하다가 타락하여 범죄의 길에 들어서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있다.
남조선에서 신문을 보았는데 《탈북자》들의 범죄률은 남조선주민들에 비해 2배이상이나 되고 자살률은 3배나 높다고 하였다.
이처럼 남조선은 절대다수의 근로대중이 살수 없는 인간생지옥이며 더우기 《탈북자》들에게는 한치의 발도 붙일수 없는 불모의 땅이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지금 리명박역적패당은 월남도주자들을 내세워 반공화국인권모략책동에 열을 올리고있다.
이에 대해 남조선에서 직접 체험하였거나 보고 들은 사실들이 있으면 말해주기 바란다.
대답(김광혁):남조선TV와 방송에서는 《탈북자》들을 내세워 공화국을 비방중상하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있다.
《탈북자》들의 얼굴을 가리우거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채 공화국을 헐뜯고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거짓말을 계속 떠들어대고있다.
TV에서는 악질《탈북자》단체들이 공화국을 모해하는 삐라를 뿌리기 위해 군사분계선지역에 나갔다가 그곳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싸움까지 벌리는 장면들도 비치군하였다.
괴뢰당국은 《탈북자》단체의 개별적인 활동이요 뭐요 하면서 자기들은 상관이 없는것처럼 놀아대지만 실지는 돈까지 대주며 적극 부추기고있다.
괴뢰들은 돈을 미끼로 《탈북자》들을 반공화국모략단체들에 끌어들이거나 《증인》으로 둔갑시켜 《강연》이니 《전시회》니 하는것들을 계속 벌려놓고있다.
《탈북자》단체들은 돈벌이를 위해 저저마다 미국의 후원을 받는다,어쩐다 하며 열을 올리고있다.
올해 7월 전영철이 공화국에서 특대형파괴행위를 감행하려다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들고 사람들은 매우 분격해하였다.
대답(고정남):괴뢰들은 《탈북자》들이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기 바쁘게 괴뢰정보원과 《하나원》에 몇달씩 가두어놓고 반공화국모략책동에 써먹기 위한 교육을 주입시킨다.
내가 괴뢰정보원에 갇혀있던 때의 일이다.
《탈북자》들은 하루종일 끈질긴 조사를 마치고 나서 감방에 오면 또 공화국을 헐뜯는 선전록화물을 보아야 한다.
하루는 6.25전쟁을 북에서 일으켰다는 내용의 록화물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모두 보지 않았다.
나도 놈들의 취조에 지쳐 쓰러진채 눈을 감고있었다.
감방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통해 그 광경을 본 놈들이 방에 들이닥치더니 밤새 재우지 않고 위생실청소를 시키는것이였다.
《하나원》에서는 매일 공화국을 헐뜯는 《강연》놀음을 벌리고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공화국을 비방중상하는 글들을 쓰게 하고는 점수에 따라 돈을 주고있다.
남조선에는 종종 사람들이 문학작품을 쓰면 돈을 얼마큼씩 준다는 광고가 여기저기에 나붙는데 우리 공화국을 헐뜯는 내용들이거나 《탈북자》들이 쓴것이면 우선적으로 당선시킨다.
지난해 12월 19일 담당형사가 전화로 푸짐히 먹을 일도 있으니 우리 부부를 몇시까지 어디에 오라고 하는것이였다.
가고싶지 않았지만 가지 않으면 또 못살게 굴것 같아서 집을 나섰다.
거기에 가니 우리뿐아니라 다른 《탈북자》들도 와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식탁을 마주한 우리는 천만뜻밖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였다.
나라와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바치신 장군님께서 뜻밖에도 서거하시였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통곡을 해도 씨원치 않을 그 자리에 음식상까지 차려놓고 우리를 끌어들인 놈들이야말로 천하에 무뢰한들이고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들이였다.
이렇게 리명박패당은 월남도주자들을 내세워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대결모략책동을 악랄하게 감행하고있다.
리명박패당이 우리 주민들을 남조선으로 끌어가는것은 다름아닌 공화국의 영상을 흐려놓고 저들의 대결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데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신보사 기자:김광혁부부가 어떻게 되여 공화국으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되였는지 그에 대해 말해주었으면 한다.
대답(김광혁):우리가 공화국으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하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았다.
나는 남조선에서 돈도 벌고 가정도 이루면 잘 살수 있을것이라고 망상하였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시기 중국에 비법월경하였던 어머니까지 남조선으로 오게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곁에 있고 가정도 있었지만 살길은 갈수록 막막해졌다.
도저히 살래야 살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잊어보려고 술에 취하기도 하였지만 허사였다.
앓고있는 나와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안해의 처절한 모습을 볼 때면 막 미칠것 같았다.
나의 머리속에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도저히 발붙일수 없고 어디에 하소연도 할수 없는 부정의한 사회,가는곳마다에서 랭대와 멸시만 받아야 하는 불평등한 사회,인간의 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개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는 절망뿐이였다.
정말 남조선은 돈과 약육강식이 판을 치고 인간의 초보적인 삶과 생존권마저 무참히 짓밟히며 앞날에 대한 희망조차 기대할수 없는 암흑천지이고 인간생지옥이다.
하기에 나는 어리석은 환상에 빠져 남조선에 온 자신을 끝없이 저주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다.
더는 그 더러운곳에 있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벌을 받더라도 조국으로 다시 가자는 결심을 안해에게 터놓게 되였다.
대답(고정남):그때 애아버지의 말에 나도 선뜻 찬성하였다.
사실 나는 남쪽에서 살려고 간것이 아니였다.
돈을 벌어볼가 하다가 얼리워 남조선으로 끌려갔기때문에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속에 날을 보내였다.
광주의 소름끼치는 집에서 하루밤을 보낼 때도 아이를 낳을 때도 《탈북자》라고 참혹한 랭대와 멸시를 당할 때도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며 조국으로 돌아가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결심을 듣는 순간 기뻤다.
우리가 조국으로 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것은 아들이 태여나서부터였다.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탈북자》라는 딱지는 자식에게까지 악착스럽게 달라붙는다.
남쪽에서는 《탈북자》자녀라고 하면 어디가나 따돌림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매를 맞고 몰리워 아이들이 집밖에 나가는것도 꺼려하고있다.
그러다나니 《탈북자》자식들은 무섭기도 하고 마음까지 이그러져 학교에 제대로 다니는 아이가 거의 없다.
《탈북자》자식으로 멸시받으며 사는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고 절망과 비관에 빠져 탄불을 피워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 자식도 그렇게 될가봐 두려웠다.
더우기 《탈북》녀성들이 당하는 비참한 현실은 남조선에 대한 나의 환멸과 증오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유흥업소들에 끌려가 성노리개로 유린당하다가 무주고혼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것이 《탈북》녀성들의 비참한 운명이다.
변태적인 남조선사회에서 의지할데 없는 《탈북》녀성들은 야수의 무리속에 던져진 먹이감에 불과하다.
남조선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니 지금 남조선에 끌려간 사람들의 80%이상이 자기들의 불행한 처지에 울분을 금치 못하면서 다시 공화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있다.
공화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우리는 그때부터 필요한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조국에 대한 소식도 알아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경상유치원을 현지지도하시는 영상을 모신 록화물을 보게 되였다.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원수님께서 우리 아이와 같은 어린이들을 한품에 안으시고 사랑의 기념사진도 찍어주시였다.
원수님께서 어찌나 애들을 고와하시는지 저희부부는 그 모습을 뵈오면서 저도모르게 울었다.
애아버지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아이들을 고와하시는것을 보니 수령님과 장군님생각이 난다고,수령님과 장군님께서도 한평생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고와하시였는가고 하면서 울먹이였다.
저희들은 원수님의 영상을 모신 록화물을 몇번이고 반복하여 보면서 우리 아이도 원수님품에 안기게 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저희들 마음한구석에는 죄많은 우리를 조국에서 어떻게 받아주겠는가 하는 불안과 걱정이 무겁게 자리잡고있었다.
괴뢰들은 《탈북자》들이 북에 돌아가야 감옥에 가고 목숨도 담보할수 없다고 악선전을 하고있다.
우리에게 조국으로 갈 결심을 더해준것은 남조선에 끌려갔다가 공화국의 품에 다시 안긴 박정숙녀성의 기자회견소식이였다.
공화국에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고 너그러이 안아주었을뿐아니라 좋은 집까지 마련해주고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었다.
그 소식은 《탈북자》들속에서도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였다.
박정숙녀성의 기자회견소식을 듣고 우리의 결심이 천만번 옳았다는것을 다시한번 확신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그 더러운 남쪽땅을 빠져나와 그토록 오고싶던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였다.
총련조선신보사 기자:김광혁부부가 어머니와 함께 공화국에 오지 못하였는데 남쪽에 있는 어머니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었으면 한다.
대답(김광혁):우리가 조국으로 오면서 제일 마음에 걸린것은 어머니였다.
남조선을 떠날 때 어머니에게 조국으로 간다는 말을 차마 할수 없었다.
《탈북자》들의 일거일동을 매일매시각 감시하는 그 삼엄한 남쪽땅에서 잘못하다가는 우리의 계획이 드러날수 있고 그 경우 우리 운명은 영영 끝장나게 되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 심양에 도착해서야 전화로 어머니에게 조국으로 간다는것을 알리였다.
저는 어머니에게 용서하십시오,나도 처도 아이도 더 이상 남쪽에서 살래야 살수 없습니다,조국에 가서 마음편히 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놀라와하면서도 나의 결심이 확고하다는것을 알고는 더 말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어머니는 그 험악한 세상에서 나를 위해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였다.
그러나 나의 운명은 지켜주지 못하였다.
우리 공화국이 나의 친어머니도 주지 못한 사랑과 정을 주고 운명과 미래까지도 다 맡아 지켜주고 빛내여주는 따사로운 품이라는것을 나는 너무나 늦게야 깨닫게 되였다.
대답(고정남):우리가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평양비행장에 내렸는데 뜻밖에도 해당 일군들이 나와 따뜻이 손잡아주며 반갑게 맞아주는것이였다.
우리가 남조선으로 갈때는 다른 사람들이 볼세라 야밤삼경에 비행기에 짐짝처럼 실려 뒤자리에 숨어있어야 했고 내려서는 어두침침한 좁은 통로로 죄인처럼 호송되여 괴뢰정보원으로 끌려갔다.
조국에 도착하여 꿈결에도 보고싶던 부모형제들과 감격적인 상봉도 하였고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 살림집까지 받았다.
정말 모든것이 꿈을 꾸는것만 같다.
대답(김광혁):조국을 위해 한일도 없고 죄되는 짓밖에 한것이 없다.
그러나 조국은 죄많은 우리를 따뜻한 품에 너그러이 안아주었다.
진정 그 품은 우리 가정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 보살펴주시는 어머니조국이며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자애로운 품이다.
그는 인덕의 최고화신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 다함없는 감사의 인사를 삼가 올리였다.
김광혁은 남쪽에 있는 어머니와 모여살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자기 가정의 은인이시며 사회주의대가정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 충정을 다하며 강성국가건설에 이바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의 안해도 기자회견을 통하여 남조선괴뢰들에게 속히워 끌려간 사람들에게 말하고싶다고 하면서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저주로운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주저없이 공화국으로 돌아오라고,그 길만이 자기의 존엄과 참된 삶을 찾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어머니조국은 자기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공화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용서하고 따뜻이 안아주고있다고 강조하였다.(끝)
[출처] 민족통신 - http://minjok.com/bbs/bbs/board.php?bo_table=general&wr_id=15554
난독증 환자들이 많네요.
이 김광혁은 66년 14세에 북한으로 갔다잖아요.
지금은 할아버지 이겠는데
재입국한 김광혁은 27세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