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봄부터 불어 닥친 비사바람(비사회주의 그루빠)은 국경도시 회령이라고 결코 비켜 갈수 없었다. 회령시내 당 기관부터 시작하여 군, 검찰, 보안서까지 탈북자 색출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걸려들었다.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 덕분에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원래 오산덕이라는 산이 나지막한 두만강지역의 회령은 한집 건너 사돈의 팔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옹기종기 한 가문이 모여 살던 크지 않은 동네였다.
며칠사이에 수십 명이 잡혀가고 총살당하고 재판도 없이 감옥으로 끌려갔다.
평소에 뇌물을 챙기고 입안의 사탕알도 빼줄 듯이 허세를 부리던 간부들도 그 유세가 어디로 갔는지 비사 앞에서는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벌벌 떨었다.
회령시내전체가 초토화 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비사검열이 종료되었다.
비사검열은 겨우 피했지만 당시 중국과의 무역 업무에 종사하던 허상열씨는 뒤를 봐주던 간부마저 연로보장(은퇴)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나자 서둘러 일을 정리하고 탈북을 결심했다.
다행히도 업무상 필요로 넓혀왔던 그동안의 인맥으로 탈북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도 자식도 고향에 남겨놓고 무작정 혈혈단신으로 두만강에 들어섰다.
한 걸음 먼저 중국에 도착하여 아내와 자식을 챙기겠다던 상열씨의 생각은 중국에 도착하는 순간 산산조각이 돼 버렸다.
13억 5천의 인구를 가진 그 넓은 대륙에 상열씨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도 북한에서 무역을 할 때 거래하던 조선족을 찾아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2개월 동안 숨어 지내다가 브로커와 연락이 닿아 한국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라오스, 캄보디아를 거쳐 한국으로 오는 긴 여정이었다.
그때 상열 씨의 나이가 49세. 2006년 7월, 북한 땅을 떠난 지 6개월만이었다.
합동신문소와 하나원을 거쳐 서울에 집을 배정받고서야 북한이 찾던 그 많은 회령사람들 대부분이 한국 땅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상열씨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회사도 고향친구의 소개로 취직했다.
직원 26명 정도의 작은 소기업인 전기부품업체 사장은 상열씨 고향친구의 성실함에 반해 대기업 같으면 무조건 보자고 했을 그 흔한 이력서 준비하라는 말도 없이 채용했다.
하나원에서부터 중년 일자리문제때문에 한국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교육을 여러 번 받았던터라 사장의 호의에 너무 감사해 다음날부터 바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회사이다.
초봉 120만, 현재 기본급 200만, 잔여수당 40만까지 합치면 240만.
허상열씨는 열심히 일했다. 비록 작지만 탄탄한 소기업은 그 어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보다 훨씬 기업문화가 잘 돼있다는 게 허씨의 이야기이다.
대기업처럼 정년퇴직이란 것도 정해져 있지 않고 본인이 원하면 언제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 4대 보험은 물론 국가휴식 일을 포함한 빨간 날은 무조건 휴식하고 잔업수당일감까지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차례진다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는 내일모레면 60을 바라보는 허씨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일터인 것이다.
하나원 동기들이나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 중에는 일당이 비교적 높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눈앞의 돈에 연연하거나 그들을 부러워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일솜씨와 성실함에 혹시라도 누가 곁에서 월급을 더 받을 수 있는 좋은 직업을 구할 수도 있다고 유혹도 했지만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망치질이 빗나가면 못이 솟는 법이다. 바람 따라 돛 달지 말고 어디서든지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자. 이것이 바로 상열씨의 인생관이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상열씨의 일터 역시 모든 시스템이 기어처럼 맞물려있어 단 한공정도 비거나 지체하면 전체 공정에 차질이 생긴다.
회사출근 후 지난 8년 간 그는 한 번의 지각이나 결근도 없이 한 공정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해왔다.
3년이 지나자 처음으로 그 후로도 꾸준히 급여가 인상되었고 상열씨는 지금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허씨는 아직 출근 때문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그 흔한 자가용 한 대도 없다.
허씨는 건강도 챙길 겸 회사까지 15키로 거리를 출퇴근 왕복 30키로의 길을 자전거로 달린다.
하지만 주말에 집에서 휴식하면서 잔업수당을 챙길 수 있는 부업거리를 가지고 올 때만은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
물론 처음부터 이 직업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북한에서 공산대학 졸업증도 함께 챙긴다는 저격부대 11년 군복무, 제대 후 10여년의 소방관 생활, 그 이후 무역업 종사까지 누구나 인정하는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허 씨였지만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그의 꿈은 소박했다.
50이 다 된 나이에 직업이 차례졌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기하고 감사했다.
처음 해보는 일에 대한 부담감과 일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도 느꼈지만 그럴수록 한시바삐 맡은 일에 정통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묵묵히 이겨냈다.
상열씨의 유별나게 강한 함경도 사투리도 처음에는 그리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참자, 이해하자, 이겨내자.’
상혁씨는 맞대응이 아닌 스스로의 자제와 맡은 일에 대한 자신감이 회사생활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회사에서 잔뼈가 굵어 온 선배들도 그의 말없는 성실함에 반해 이제는 편한 친구로 대해준다.
그렇게 주5일을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토요일에는 회사에서 챙겨온 잔업까지 마치면 밤 10시가 넘는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에 남겨두고 온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기도는 언제까지 일가.
병들고 나이 든 노부모들 때문에 북한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그는 생활비를 아껴 돈을 송금하고 저축을 한다.
허씨는 이야기한다. 대부분 탈북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종사한다고 하는데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상열 씨가 열심히 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 때문이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이 힘들어도 그는 언제나 고향을 잊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아직도 그 땅에 남아있는 가족은 상열 씨의 아픈 상처이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그에게서 일은 삶의 전부이다.
돈은 거짓을 모른 다. 능력만큼 노력한 만큼 그 댓 가로 차례지는 보답이 바로 돈이다.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은 상열 씨의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의 댓 가인 셈이다.
얼마 전에 허 씨는 한국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되는 고향친구를 회사에 소개했다.
그동안 회사를 위해 힘든 일 궂은 일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성실함이 바로 고향후배를 대신한 이력서였다.
그전에는 고향후배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땅에서 회사후배가 생긴 것이다.
허씨는 지금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사는 것만이 이 땅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이 노력의 대가로 쌓이고 인생의 보람으로 쌓인다.
입사 8년 차, 그는 이제 회사와 한 가족이 되었다.
성실함은 타인의 인정을 받고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마음의 여유이기도 하다.
성실과 노력의 8년.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도 분명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지만 분명 두만강을 건널 때의 초심만 잃지 않으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자유’이다.
그는 스스로가 선택한 자유의 땅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평범한 직업을 선택하여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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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에 도전을 받습니다. .힘들어도 이겨내고 참고
또 이겨내리라는 정신으로 다시 시작해보겠습니다..
님도 건승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