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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불가담운동
동지회 1675 2004-11-15 19:42:44
1955년 4월부터 시작된 비동맹운동의 북한식 표현이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가들이 모여 반제, 자주, 비동맹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비동맹회의 노선은 한국전쟁이후 반미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북한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특히 전쟁참패로 저하된 주민사기 진작이 절실히 필요했던 김일성으로서는 반제 즉, 반미주의를 주장하는 비동맹국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반미주의노선이 정당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1955년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1956년 노동당 3차당대회를 통해 참가의사를 밝히고 비동회의 노선인 반제·반식민 및 민족해방투쟁을 그들의 외교정책 목표로 삼았다.

북한은 아시아·아프리카지역의 신생국가들을 상대로 직접 외교전략을 펴는 한편, 구소련의 평화공존론에 불만을 품고 후진지역에서의 공산혁명운동을 반제·반식민 및 민족해방투쟁이라고 하면서 공산혁명 수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공측에 편승하여 비동맹회의에 침투하였다. 북한은 비동맹회의를 통해 남한에서의 외국군 철수와 내정불간섭, UN군 철수와 UNCURK 해체, 그리고 단일국호밑에 단일국가로서 UN가입 등을 성사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은 비동맹회의의 정식회원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고 1975년 4월 월남패망이후 비동맹회의의 친북한적 분위기에 힘입어 1975년 8월 리마에서 개최된 제2차 비동맹외상회의에서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북한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였고 「우리혁명의 국제적 연대성을 일층 튼튼히 함으로써 조국의 자주적 통일위업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할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튼튼한 동맹자를 가지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비동맹회의는 1970년대의 미소데탕트 분위기와 미중수교, 중국의 개혁개방, 1980년대의 사회주의권 붕괴 등으로 인해 그 활도이 미미한 상태이다. 북한도 경제난으로 인해 혁명수출보다는 체제유지가 더 급한 실정에 있기 때문에 비동맹국가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원조가 불가능함에 따라 「블럭불가담운동」도 시들해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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