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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 애국녀인 <백과부>
운영자 3301 2004-11-14 02:55:08
작품소개 : 애국녀인


우리 나라가 일제의 군화밑에 짓밟히던 왜정때 평양일대에서 산 사람들치고 평양감사나 도지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평범한 녀인이 일약 갑부로 되기까지

는 리조말엽인 1848년 11월 평양 박구리(오늘의 중성동)에서 백지동의 외동딸로 태여났다.
일곱살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봉건풍습대로 열살이 좀 지나서 안씨성을 가진 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나 불행하게도 스무살도 되기전에 남편을 잃고 소녀과부가 되였다.
의 어머니도 과부였는데 홀로 살기가 외로와 양아들을 하나 데려다 길렀으나 그가 크면서 난봉을 부려 애를 태우며 마음고생을 하고있었다.
불쌍한 어머니를 측은하게 생각한 그는 딸이라고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랴 하는 생각으로 친정에 귀가하여 어머니를 도우며 살았다. 이때부터 과부모녀가 사는 이 집을 사람들이 과부집으로 부르게 되였고 그에게는 라는 별명이 붙게 되였다.
는 남정이 없는 집에서 가장이 되여 궁색한 살림을 펴나모진 애를 썼다.
이른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물감장사도 하고 콩나물도 길러서 팔고 두부장사, 떡장사도 하였으며 조기철에는 선창가에 나가 조기를 사서 평양장안에 내놓고 팔았고 김장철에는 젓갈초롱을 이고지고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쉬지 않고 돈을 벌었다.
한푼, 두푼 모은 돈이 몇해후에는 1천여원이나 되였다.
30원이면 황소 한마리를 사던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돈이였다.
는 나이가 예순고개를 넘어서자 힘이 드는 행상을 그만두고 촌에서 술을 넘겨다 파는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술장사라고 해야 식당을 차려놓고 료리를 만들어파는 료정이 아니라 지나가다가 선자리에서 한잔 마시고 가는 선술집이였다. 돈이 없는 조선사람들은 고급료정보다 이 선술집을 더 좋아하였고 날이 감에 따라 단골손님들도 많아지게 되였다.

그런 단골손님들중에 술을 몹시 좋아하는 몰락하는 지주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맞돈을 내고 술을 마시다가 집안이 망하게 되자 외상술을 마시였다.
는 그가 지주의 아들인지라 아무렴 돈을 못받을가 하는 생각으로 몇년동안 외상술을 퍼주다가 은연중 장부책에 적힌 술값을 계산해보았다.
황소 여나문마리 사고도 남을 약차한 액수의 돈이였다.
그래서 다음날 술마시러 온 젊은이에게 술값이 여사여사하니 더는 외상술을 줄수 없다고 하면서 당장 그 돈을 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매일같이 들이대는 빚독촉에 바빠맞은 젊은이는 자기 집 부동산인 승호리에 있는 만달산을 빚대신으로 가지라고 애원하였다.
겉층까지 바위돌로 꽉 덮인 돌박산이여서 풀과 나무도 변변히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산이였으나 이러다가는 몇백원이 아니라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하는수 없이 그 산을 빚값으로 받아들이게 되였다.
그때부터 만달산이 법적으로 의 소유로 등록되게 되였다.

이즈음에 조선을 비법적으로 강점하고 자연부원을 략탈해가는데 혈안이 되였던 일제놈들이 토지측량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불모의 산으로 버림받던 만달산이 온통 석회석으로 되여있는 보배산이라는것을 발견하였다. 왜놈들은 만달산밑에 세멘트공장을 세우고 석회석을 캐내여 헐값으로 세멘트를 생산한다면 막대한 리윤을 짜낼수 있다는 타산밑에 이 산을 눅거리로 빼앗아내려고 주인을 수소문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산의 임자가 식자도 없고 권세도 없는 평범한 늙은 녀인임을 알아내게 되자 왜놈들은 쾌재를 올리며 에게로 달려들었다.
놈들은 그에게 그 산이 돌밖에 없는 바위산이지만 늙은이를 생각해서 평당 3전씩 내고 사겠으니 소유권을 미쯔이회사에 넘겨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왜놈들이 낮추 빌붙는데 곡절이 있다고 생각한 백과부는 그 청을 단마디에 거절해버렸다. 검질긴 놈들이 땅값이 적어서 그러는줄 알고 평당 5전, 10전으로부터 60전까지 올리면서 위협하였으나 하고 도고하게 응수하면서 놈들을 내쫓았다.
의 도고한 기상에 위압된 왜놈들은 문전옥답 한평값의 몇배나 되는 80전을 주겠으니 땅을 팔아달라고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비비면서 애걸복걸하였다.
이쯤했으면 왜놈들의 기를 눌러놓았다고 생각한 는 놈들이 놀아대는 꼴이 너무도 시끄러워 만달산을 팔아치우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되여 는 하루아침에 50여만원의 돈을 수중에 넣은 대갑부가 되였던것이다.


돈을 어떻게 썼던가

가 만달산을 팔아치운지 얼마 안되여 왜놈들은 승로리에 세멘트공장을 지으려고 그 준비작업을 서둘렀다.
그제서야 만달산이 세멘트를 만드는 주원료인 석회석으로 덮여있다는것을 알게 된 는 놈들한테 속히운 자신을 원망하면서 일본놈을 위해서는 한푼의 돈도 쓰지 않으리라 속다집하고 후에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는 일제가 조선민족을 할 목적으로 도처에 를 세우면서 조선사람들에게 기금헌납을 강요할 때에도 그런데다 낼 돈이 없다고 뻗대면서 끝끝내 기금헌납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돈많고 명망있는 를 끌어당기면 평양시민들의 민심을 살수 있다는 타산밑에 그에게 수절과부로서 사회를 위해 공로가 많았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을 주려고 하였을 때에도 내가 조선사람인데 일본을 받아서 뭘하겠는가, 그런 은 나에게 필요없으니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거절해버렸다.
그는 매일 황소 두마리값을 뿌리면서 풍청거려도 여생에 돈을 다 쓰지 못할 부자였지만 생활을 검박하게 하면서 평백성의 모습대로 살림을 해나갔다.

그렇다면 가 그 많은 돈을 도대체 어디에 썼겠는가.
지금까지 알려진데 의하면 는 관서지방에서 규모가 크고 배일감정이 높았던 창덕학교를 짓고 운영하는데 정확한 수자는 딱히 알수 없지만 거액의 자금을 희사하였고 평양숭실중학교, 숭인상업학교, 광성학교 등 조선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의 후원자가 되여 수만원의 돈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언제인가 평양에 시민들의 통행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큰 돌다리를 건설하게 되였는데 그 건설비용 전량을 가 자진하여 담당했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석교이름을 의 성과 아호인 이라는 이름의 선자를 따서 라고 붙였다고 한다.
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쓴 자선금가운데서 그 액수가 정확히 전해지고있는것은 평양공회당을 짓는데 6만원의 자금을 희사했다는 사실이다.
평양공회당은 연건평이 1,70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3층석조건물인데 평양치고 3층건물이 제일 높았던 당시의 형편에서 어디서나 눈에 뜨이는 상당히 큰 건물이였다.
이 공회당이 건립되자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 물밀듯이 찾아와 낮에는 실내체육이나 유희오락경기를 하고 밤에는 시국토론회, 정세강연, 웅변모임과 시랑송, 음악회, 력사와 문화 상식 발표회 등 다채로운 행사와 놀이를 하면서 배일감정과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는 공회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일본말과 일본노래를 일체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요구하였으며 일본청년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법도를 세워놓았다.
주체19(1930)년 8월 평양고무공장 로동자들의 총파업이 여기에서 조직되였다는 사실만으로써도 그 당시 이 공회당이 커다란 역할을 놀았다는것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참으로 는 돈을 써도 일신의 향락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는데 보람있게 쓸줄 아는 훌륭한 자선가였고 열렬한 애국자였다.


이름이 없어도 후세에 이름을 남긴 애국녀인

는 자기의 재산을 물려줄 혈육한점 없이 홀로 살면서 민족을 위해 선한 일을 하다가 주체22(1933)년 5월 8일 8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행으로 일생을 살다가 작고한 의 명복을 빌어 사회적인 장의위원회가 자발적으로 나왔는데 묘비에 그의 이름을 새기려고 하니 유감스럽게도 의 본명을 알고있는 사람을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었다.
이름이 없는 묘비를 세울수도 없고 라고 쓰기도 난처하여 장의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고있는데 한 늙은이가 찾아와 의 이름을 자기도 백선행인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것이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 본명을 백선행인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그의 소행에 감동된 사람이 그를 아호로 백선행이라고 부른것이 한입두입 전해지면서 그의 이름처럼 불리워졌던것이다.
한점의 혈육도 남기지 않고 가까운 친척도 없는 탓에 의 본명을 알아낼수 없었던 장의위원회 주관자들은 하는수 없이 그의 묘비에 라고 새겨넣게 되였다.
그후 사람들은 평양공회당을 으로 부르게 되였고 기념관앞에다 그의 초상을 조각한 석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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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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