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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 <시일야방성대곡>과 장지연
운영자 1952 2004-11-14 02:55:51
작품소개 : 과 장지연

오늘도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망국의 비감에 대한 짙은 여운을 안겨주는 (是日也放聲大哭-이 날에 소리내여 크게 통곡하노라) 그 노성이 온 강산을 진감하던 이세기초엽의 눈물진 나날을 여기서 더듬어보기로 한다.
력사가 론증했고 세상이 다 아는바와 같이 이 나라에 망국을 가져왔던 의 (1905년 11월 17일)은 일제의 강도적인 사기협잡극이였다.
당시 일본천황의 특사로 서울에 파견된 이등박문은 우리 나라의 신성한 자주권을 강탈하는 강도적인 요구를 교묘한 방법으로 고종황제에게 제기하였으나 단호히 거부되자 파렴치하게도 이미 매수한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매국역적 5놈을 강박하여 문에 도장을 찍게 하고 일방적으로 을 선포하였다.

당시 사 사장이였던 장지연이 이 소식을 재빨리 입수하였다.
하늘땅이 꺼지는듯한 억울함과 격분, 적개심, 울분이 그의 온몸을 불태웠다. 성한몸으로는 도저히 감수할수 없어 그는 술을 한껏 마시고 통탄했다.
(아, 정녕 5천년력사국이 이렇게 망하는가?!)
하지만 이 력사적시각에 그가 선 위치는 너무도 심각했다. 애국이냐, 보신이냐, 매국이냐 하는 력사의 물음에 문필로 대답해야 하였다.
놈들의 탄압은 엄혹했다. 하지만 장지연은 그것이 두려워 자신마저 이 사실을 묵인한다면 은 조선과 일본의 공식적인 합의에 의하여 성립된것으로 세상에 잘못 알려질수 있다는것을 자각했다.
그는 일제의 흉계를 고발하고 매국역적들을 규탄하리라 결심하였다.
이미부터 반일의지의 론조를 당당히 펴가던 장지연이 분명 을 반대규탄하는 글을 신문에 내여 사회여론을 환기시킬수 있다고 짐작한 을사5적의 한놈이였던 리지용이 장지연에게 찾아왔다.
그는 장지연을 경상북도 성주군수로 천거한다면서 자손들을 위해서도 순순히 받아들일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장지연은 격분하여 라고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또다시 술을 마시며 흐느껴 울던 장지연은 비분강개의 마음을 한필에 담아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이렇게 태여난 글이 바로 1905년 11월 20일부 2면 머리에 실린 론설 이다.
론설에서는 교활한 이등박문의 흉계를 낱낱이 폭로하면서 은 무효다, 국왕이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다고 명백히 선언하였다. 또한 영리를 탐내고 위협에 겁먹으며 매국역적으로 전락된 다섯놈들을 개, 돼지만도 못한놈들이라고 격렬히 규탄했다. 그리고 명색이 참정대신이란자는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어찌 아니(不)라는 글자 하나로 책임을 모면할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여지없이 타매하였다.
론설은 망국의 비감을 애타게 토로하며 마감지었다.

아, 아프고 분하구나. 노예가 된 2천만동포여, 살았다고 하겠는가, 죽었다고 하겠는가. 단군이래 5천년국민정신이 하루밤사이에 졸연 멸망하고만단말인가, 통분하구나, 통분하구나, 동포여, 동포여!

론설은 력사에 류례없는 대파문을 일으켰다.
장지연은 이러한 론설과 함께 신문의 2면과 3면에 걸쳐 협잡극의 전말을 까밝히는 장문의 기사를 주었다.
이날호 신문은 밤새 1만부나 발행되여 일제의 소위 경무청의 사전겸열을 거치지 않고 새벽 5시전에 서울과 전국각지에 배포되여나갔다.
신문이 나가자 2천만민중의 통곡소리 온 삼천리 강산에 넘쳐흘러 울음바다가 펼쳐졌고 일제에 대한 증오와 망국의 비운이 하늘땅에 빼곡이 서리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 력사에서 가장 큰 필화(글을 쓴것이 말썽되여 입은 화)사건이다.
이에 질겁한 일제는 신문을 압수하는 소동을 피우며 인쇄기를 차압하고 발간을 80여일동안 정간처분하고 론설필자이며 사장인 장지연을 구금하였다.


장지연

장지연은 당시에 문필가이면서 동시에 사회정론을 펴나가는 고명한 지사로서 우리 나라 근대언론계의 선구자로 맹렬히 활동하였다.
1898년 언론계에 첫 발을 들여놓은 때로부터 그는 봉건정부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대중을 계몽각성시켰으며 우국애국, 반일애국의 론조를 펴나갔다.
그는 놈들의 탄압과 박해가 심하였으나 언론에서 반일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일제침략자들이 1904년 봉건정부내정에 제멋대로 간섭하고 조선에 대한 를 시작할 무렵 그는 이에 대한 항변으로 신문에 라는 론설을 내보내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첫 필화사건으로 알려져있다.

장지연의 반일애국언론활동에서 최고절정을 장식한것이 바로 론설 으로 삼천리강산을 크게 흔들어놓은것이다.
그후 그는 사 사장직을 단념하고 애국문화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설립하고 그 기관잡지인 편집사업을 주간하며 독립자주정신을 고취하고 대중계몽에 이바지했다.
은근히 그의 활동에 겁먹은 일제는 죄를 들씌워 대한자강회를 강제해산시켰다.
걸음마다 탄압이 그의 앞을 막았다. 할수 없이 그는 해외망명의 길에 올랐다. 올라지워스또크에서 조선인망명자들의 일간신문 주필로 일하였으나 경영난으로 신문의 존재를 마치였다. 그후 그는 중국관내에서 얼마동안 방황하였다.
1909년에 귀국한 그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인 를 창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애국적인 문인이였던 황현의 절명시를 실은것이 문제되여 이 신문도 강제페간되고말았다.
그는 여기에서 눈물을 머금고 언론의 필봉을 영영 꺾어버리였다.
일제강점하에서는 더는 붓을 들고싶지 않았으며 또 애국의 필봉을 들수도 없었다. 하여 시골에서 한탄과 울분 속에 헤매고있는 그에게 일제식민지통치자들은 저들의 총독부기관지인 의 주필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침략자들에게 침을 뱉고 돌아앉았다.
그러던 주체10(1921)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그는 망국의 몸부림속에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실로 장지연의 운명은 비참한 국운속에 허덕이는 식민지인테리의 쓰라린 운명이였다.
그가 그토록 열변으로 토했던 , 그것은 이 나라에 일제의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알리는 서곡이였으며 장장 41년간이나 유구한 력사와 풍요한 자연부원, 수려한 산천경개를 자랑하는 우리의 강토와 문화재부를 강탈당하고 말과 성, 이름, 얼마저 빼앗기며 신음하던 우리 겨레의 울분과 통탄의 함축성이였고 피눈물이였다.
하기에 의 메아리는 오늘도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애국지사 장지연의 모습과 더불어 나라의 운명속에 개인의 운명이 있고 나라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진리, 력사의 교훈을 싣고 끝없이 울려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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