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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 홍의장군으로 불리운 곽재우
운영자 2166 2004-11-14 02:56:03
임진조국전쟁시기 애국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왜적을 격멸하였다.
그들중에는 홍의장군 곽재우도 있다.
유명한 의병장이였던 곽재우의 자는 계유, 호는 망우당, 시호는 충익이라고 하였다.
그는 34살 되던 1585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문과에 응시하여 을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쓴 답안내용이 국왕의 비위를 거슬려 락방이 되고말았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학문과 무술을 쉬임없이 익히며 출장입상(싸움에 나가서는 장수, 들어와서는 재상)하려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과거시험을 통하여 모순으로 가득찬 당대의 사회제도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는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그는 나이가 40살이 넘도록 세상만사에 관계없이 오직 술과 낚시대와 인연을 맺고 재미를 붙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곽재우는 뜻밖의 소식에 낚시대를 집어던지고 분연히 일어섰다.
왜적의 침입과 관련하여 산봉우리마다 련달아 타오르는 봉화로 하여 온 나라가 물끓듯하는데 왜적들은 부산에 상류하여 나라의 고을과 성을 차례로 빼앗으면서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왜적들은 발길이 닿는곳마다에서 무고한 인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략탈하면서 김해, 량산, 밀양, 대구 등지에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관군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쳤다. 망우당이 살고있는 경상도 의령지방도 아직 전세가 미치지는 않았지만 형편은 다를바 없었다.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낚시질로 여생을 보내자고 한 그의 결심은 허황한 꿈으로 되였다. 왜적들에게 부모, 형제, 친척, 친우들이 잔인하게 도륙당하고 사랑하는 고향산천이 원쑤들에게 짓밟히게 된다니 참을수가 없었다. 이 나라의 백성으로 나라를 왜적들에게 내여준다는것은 더없는 수치였다.
그는 의병을 뭇고 왜적과 싸울것을 맹세하였다. 왜적이 침입한지 열흘이 되는 날인 4월 22일 자기 집 하인 10명을 거느리고 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나라와 민족을 지켜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 일어설것을 절절히 호소하는 그의 의기에 감동된 용사들이 각곳에서 몰려들었다. 량인농민들과 노비들, 심지어 하층관리들까지 병쟁기를 들고 모여왔다.
곽재우의 의병부대는 우선 의령, 합천, 삼가에 쳐들어오는 왜적들의 척후부대를 들이쳐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의병들과 마을사람들은 환성을 올리면서 곽재우의 대담무쌍한 용맹과 전공을 높이 찬양하였다.

곽재우는 붉은 천릭(장수들이 입는 옷, 우는 도포같고 아래는 치마같이 됨)을 지어입고 투구는 백금으로 꾸미고 그 량편에 날개를 달았다. 그리고 백마를 탔다. 사람들은 름름한 그 모습을 보고 이라고 불렀다.
곽재우의 열렬한 애국심과 명성이 여러 지방에 퍼지여 수천명의 의병들이 모여들었고 그 세력은 락동강에서 의령과 창녕까지 미치였다.
임진년(1592년) 6월에 전라도방면으로 침략을 기도하던 적들이 솥나루에 나타났다. 작전을 실현해보자면 먼저 경상도와 전라도를 타고앉아야 한다는것이였다.


이렇게 웨치며 의병들을 고무한 곽재우는 매복기습전과 기발한 유인기만전술로 적들을 족치였다. 곽재우와 꼭같은 옷차림을 한 10명의 장사가 백마를 타고 적들을 혼란시키며 종횡무진하면서 마지막놈들까지 요정냈다.

솥나루에서 울린 첫 승전고는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으로 되여 전국의 의병들을 수많이 불러일으켰으며 임진조국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고고성으로 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왜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의령일대를 지켜냈고 서쪽으로 기여드는 왜적의 침입을 막아 경상도와 전라도 백성들의 전쟁피해를 막아주었다.
때문에 후세사람들은 망우당 곽재우를 임진조국전쟁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다고 하였다. 임진조국전쟁 하면 바다에서는 리순신, 륙지에서는 곽재우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또 리순신 하면 거북선을 생각하듯이 곽재우 하면 홍의장군을 남먼저 생각하게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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