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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미국의 첩자로 밝혀져(기밀해제문서공개)밝혀져
Korea, Republic of 돌통 0 621 2024-03-02 16:07:27
?◇  박헌영은 미국의 간첩이었다. (기밀문서해제 공개) 밝혀져…


해방 직후 박헌영(북한정권에서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1955년 ‘미제의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됨)과 그의 직계인 이강국. 임화(작가)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주한 미군방첩대(CIC) 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미 정부측에 비밀해제를 요구, 공개된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던 ‘베어드 조사보고서’ 에서 드러났다.


1956년 미 육군 정보국 비밀자료에 따르면 이강국(초대 북한 외무성 부상)은 CIA의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회. Joint Activities Commission, Korea)’에 의해 고용됐던 것으로 나와 있다.


즉, 김일성 정권에 의해 ‘미제 스파이’ 혐의로 53년 처형된 이강국은 실제로 미 첩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같이 미국은 남로당원들 탄압하고 일부는 포섭하여 간첩으로 월북시켜 북한 수뇌부에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을 정복하기 위한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당시 조선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만들어냈는데 미군정은 자신들이 조작한 이 사건으로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고 이를 구실로 정당 활동의 자유를 빼앗고 배후로 지목하여 소련대사관도 폐쇄하였다.


또 신문을 비롯한 정기 간행물을 허가제로 바꾸어 좌익계열의 간행물들을 폐간케 하고 좌익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이 당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미국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서 북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을 때 미국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북한은 자신이나 소련이 발송하지 않은 이상한 전파가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풀 수 없는 암호 전신문은 김일성과 함께 간 일행이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 준비 상황이었으므로 색출 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덮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게 분열상을 보이면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도 자신을 색출하여 전열을 흩뜨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암호발신을 감행한 것이다.


한국전쟁 때 최고사령부 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다.


1952년 여름에 리승엽은 부하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 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최고사령부 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 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내게 된다..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당하면서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


한국전쟁 휴전협상 때인 1953년 3월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3월 3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로 밝혀졌다.


박헌영은 6.25 당시 자기 집 변소에서 미군부대에 무전을 치다가 주세죽(前妻)에게 들켜 체포되게 된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년 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의자 13명 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 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 죄악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박헌영 공판 마지막 날, 판사가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일제 때 변절했던 것에 관해서 솔직히 밝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헌영은 일제 때 변절한 것을 밝히면 날 총비서 시켜주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박현영이 변절한 것은 당시 일제에 의해 붙잡혀 고문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약점을 미국이 골치거리였던 박헌영을 교활하게 이용 포섭했던것..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이 되자 위대한 박헌영 선생이여 빨리 나오시라는 격문이 돌았다. 박헌영이 머리를 써서 자작으로 붙였던 것이다.


미국은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내용을 담은 자료를 고스란히 접수하였고 이를 통해서 미국은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박헌영이 이렇게 해서 미국의 공작에 넘어갔던 것이다. 

당시에 남한의 친일파 당국은 김일성이 박헌영 일행을 숙청 했다고 비난 하였다.


그 후 박헌영 일당이 미국이 보낸 스파이였다는 것이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에 의해 밝혀졌다.


김일성은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들을 공개하지 말 것을 요청 했으나 박헌영 일당은 조직원들을 낱낱이 공개하여 동지들을 노출시켜 모두 죽게 하였다.


미국은 정당 활동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국가라는 그릇된 믿음이 공개하게 하였을 수도 있으나 남로당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미군이 공작원을 지도부에 박아두어 공개하도록 했던 것이다.


북으로 올라간 남로당 지도부가 북한에서 정식 재판을 통해 간첩활동을 시인하고 처형된 것으로 봐서 그들은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한 것은 위장술 이었고 실은 미군에 매수된 끄나풀이었다.


해방 후 박헌영은 자신이 일제의 앞잡이였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남로당을 이끌었으나 미국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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