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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전에 6번의 평화적 해법을 뿌리쳤다.
Korea, Republic of 돌통 0 898 2024-05-01 10:04:29

   



◇  한국전쟁 전 북한은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    남측의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전에 6번의 평화적 해법의 기회를 뿌리쳤다.



사실 요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시간이 남아서 컴퓨터 키보드 앞에 앉았습니다. 이런 생각해봤습니까?  의외의 논점일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한국전쟁 이전 평화를 위한 북한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국이 어떻게 곧 통일될 한국을 둘로 분열시켰는지 평범한 사건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전쟁의 분단과 관련하여 미국의 딘 대령이 연필로 한국(조선)을 가른 방법이나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플레이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1945년 12월부터 이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1945년 12월, 미국과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한국(조선)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한국을 독립 국가로 만들기 위해 미국과 소련 정부는 한국 임시 민주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협의하고 한국 국민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발전하고 가능한 한 빨리 통일된 독립 국가를 건설하도록 협력할 것을 합의합니다.


위에서 언급 한 3국 공동 성명서에 따르면 한국(조선)의 미래는 밝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1946년 3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3 월 5일 처칠이 풀턴에 와서 철의 장막에 대한 연설을 했고 미국과 소련은 급속히 분열되었고 냉전이 시작된 후 한국(조선) 문제에 대한 갈등의 여지가 증폭되었습니다. 공동성명에 담긴 하루빨리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아름다운 희망은 38선의 차가운 철조망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한민족의 염원이었던 통일에 대한 염원은 이렇게 철의 장막에 의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냉전 사고방식의 시발점인 미국과 영국이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의 첫번째 통일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38선 양쪽의 남과북은 얼음과 불과 같게된다.


북한은 46년 3월 5일 농업 혁명이 시작되어 70만 명이 넘는 농민들에게 꿈에 그리던 토지가 주어지고 모든 중요 기업이 국유화되었으며 남녀 평등, 하루 8시간 노동 등 일련의 법령이 공포되면서 북한은 순식간에 매우 활기찬 국가가 되었습니다. 남녀 평등, 하루 8시간 근무제 도입 등 일련의 법령이 발표되었고 북한은 즉시 매우 활기차게 변했습니다.


남한은 맥아더는 45년 9월 7일 남한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일제 식민지 정부 관료의 존속, 영어 공용어 등 남한 국민을 분노케 하는 조항을 잇달아 내놓았다(추신: 남한은 해방되지 않았나요?). 왜 식민주의자들과 똑같지?) .


남한에 이미 설립된 인민위원회는 해산되었습니다(추신: 미국은 결사의 자유를 있지 않습니까?). 미군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법률이 여전히 유효하며 일제 식민지배자들의 모든 재산은 미군 소유라고 선언했고, 남한 전체 산업 및 농업 자산의 80퍼센트가 조선의 해방자인 미군의 주머니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자유, 인권, 평등을 가져다주었다고 늘 떠들어대는 미군의 작품이며, 북한과 비교할 때 남한은 독재적인 정부라고 말하는 미국과 대한민국의 소유자인 당신들의 말이 맞습니다. 해방된 남한 국민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햇살을 누리는 대신 늑대를 내보내고 호랑이를 들여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양키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위와 같은 미군의 정책은 남한 국민들을 극도로 실망시켰고, 1946년 한 해에만 남한의 73개 군을 휩쓸며 대규모 행진, 시위, 파업, 수업거부등이 연중 내내 열렸습니다. 밝고 위대하다며 늘 인권을 이야기하던 미국은 이러한 시위 앞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기병대와 탱크를 배치하여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예, 올바르게 읽었습니다. 진압자는 경찰도 아니고 헌병도 아니고 한국군도 아니고 민주주의의 사자인 미군이었습니다! 또 할 말이 있습니까, 하모니스트 여러분? 그래서 46년 10월, 그 유명한 10월 항쟁인 대구 무장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남북한의 격차가 너무 커서 아무리 봐도 남한이 북한보다 낫다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미군의 점령 정책과 조치는 인기가 없었고 한국 국민의 신뢰와 협력을 잃었다고 인정했습니다.


1947년 10월 17일 유엔 총회 제2차 회의에서 소련은 1) 한국(조선) 문제에 관한 유엔 결의에 남북한 대표를 초청하고, 


2) 한국 국민이 한국에 민족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미국과 소련이 1948년 초에 남북한에서 동시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제안하는 두 가지 제안을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남북한 양측을 모두 존중한다는 이상한 이유로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통합되어야 할 남북한은 미국의 방해로 계속 분단되었고, 조선은 독립 국가가 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모니스트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48년 맥아더는 이승만을 남한의 통치자로 결정하고 서울에서 이승만의 서울 귀환을 환영한다는 성대한 행사를 열어 남한 국민에게 이 노인이 여러분의 지도자임을 알렸습니다.


남한이 분단에 직면했을 때 김일성은 조국 통일을 위한 즉각적인 조치의 하나로 남과 북의 모든 민주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의 연석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회의는 1948년 남과 북의 56개 정당, 총 454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으며, 이 중 남한 대표단은 240명이었습니다. 남한에서 참가한 인원이 많다는 것은 남한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회의는 남한의 단독선거(분리선거)에 반대하고 한국 주민들이 외부 세력의 간섭 없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의 단독선거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이번 선거로 탄생한 독립정부도 인정하고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동으로 밝혔다.  그렇습니다. 이 담화는 남북한 대표가 공동으로 발표한 것이며, 남북한 인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 미국은 다시 한번 이 성명을 무시하고 48년 7월 12일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를 조작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 이승만입니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한 달 뒤, 북한에는 김일성을 총리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하하-미-한국인 여러분, 북한은 대한민국 다음으로 건국된 국가라고 생각하시나요?


따라서 북한의 세 번째 통일에 대한 열망은 좌절되었습니다. 미국이 지난 두 차례에 걸쳐 그러한 기대를 무시했다면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다른 나라의 영토에 지역 정권을 육성하고 있으며 이는 노골적인 분리 독립입니다! 하모나이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48년 말, 소련의 붉은 군대가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데 앞장섰고, 그 이후 49년 6월 말 미군도 비슷한 방식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철수하기 전 이승만에게 미국과 일본의 소총 15만 정, 각종 야포 2000여 정등,  상당의 물자를 지원했다. 한편 미군은 85만(예하까지) 명을 모집해 비행장과 기지를 건설하고 38도선에 수백 킬로미터의 참호를 설치했습니다.


이승만은 병역법도 공포하고 2년 안에 15만 명 규모의 국민방위군을 편성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불법적으로 수립된 정부인 이승만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모든 면에서 정의로운 정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후 이승만은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는 그의 연설문 몇 개를 통해 이 노인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북측의 결의를 거듭 거부하고 남북 분단은 전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위협하며 미국 고문단의 지도 아래 남한 인민 게릴라 및 애국자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 작전을 벌였다.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연이어 백색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49년 4월, 그는 유엔 주재 남한 특사 조병옥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 상황을 고려할 때 무기와 탄약의 부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통일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유엔 및 미국 고위 관리들과 극비리에 공개적으로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썼고, 10월에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립과 통일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1950년 2월 이승만은 이미 북진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러 군 고위 관리들을 이끌고 도쿄로 가서 대부인 맥아더를 접견하고 강연을 하는 등 등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남한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4월에 38선 부근 5개 사단의 직할 포병과 기타 기술 병력을 더욱 강화했고, 모든 국민은 전쟁의 냄새를 맡아야했습니다.


이렇듯 이승만이 일련의 군사적 준비를 하고  북한의 평화회담 제의를 또 거부한 이후 한반도는 네 번째로 통일을 놓쳤다. 여러분들은 객관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일련의 이승만의 군사 배치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은 핀과 바늘에 있었고, 이 당시까지만 해도 북은 3개 사단만 가지고 있었고, 이승만은 6개 사단의 미국 장비를 가지고 있었고, 남쪽은 북한으로 북진을 강력하게 외치며 이런 상황속에서 북은 어떻게 해야됐을까요? 그래서 김일성은 49년 3월 소련에 가서 협정을 맺고, 49년 5월 중국에 가서 북한 3개 사단을(49년 7월 2개 사단을 북한이 돌려받고, 50년 3월에 1개 사단, 1개 연대를 돌려받음) [주: 이 병력들은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두 나라(북한과 중국) 국민들이 오랫동안 일본에 맞서 싸우다 자발적으로 귀국한 병력이다. 일본에 맞서 투쟁했기 때문에 이러한 관행이 있었다], 50년 3월 30일 금 9 톤, 은 40 톤, 기타 광석 15,000 톤이 최대 1 억 3,800 만 루블과 상당의 소련 무기와 교환되었습니다. 중국의 한국 분단과 소련의 유상 지원으로 김일성이 자신감이 강해지고 남한과 협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이렇게 군사력이 강해진 북한은 그래도 양국이 마주 앉아 천천히 대화하기를 바랬다. 


1950년 6월 7일 김일성은 조국통일 민주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사업 호소문을 발표하여 남북의 정당 및 사회단체 협의회를 소집하여 통일의 조건과 총선거 절차를 논의하고 8월에 조선 전역을 대상으로 민주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한국의 이승만은 전쟁 발발 8일 전인 6월 11일, 김일성의 평화 통일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의 다섯번째 평화통일의 기회를 또 놓쳤습니다.


50년 6월 17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덜레스는 직접 대한민국으로 와서 38도선 참호에서 쌍안경을 들고 북쪽을 바라보며 남한의 북진 계획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월 19일 김일성은 다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와 남한 국회가 손을 잡고 조국 통일을 위한 전조선 단일 입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지만 남한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 발발 6일을 남겨두고 한반도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통일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6월 25일 CCTV, 티엘링 TV, 뉴욕타임스, CNN, 아사히 신문, 프라우다, 두 개의 뼈대를 가진 뉴 익스프레스, 업계의 양심을 자처하는 남방 메트로폴리스 데일리 등이 공동으로 전 세계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지금부터 휘파람 소리 나는 포탄이 불꽃처럼 하늘을 날고, 빽빽이 박힌 총알이 단비처럼 한반도 구석구석을 적시고 있습니다. 여섯 번이나 평화의 기회를 놓친 이곳은 지상의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남한의 북진 통일전쟁 계획이 이미 이승만의 책상 위에 올려져 그의 서명 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쪽의 선제공격문제는 중요하지 않게되었습니다. 미군과 이승만은 지난 몇 년 동안 비뚤어진 행동으로 국민의 마음을 잃었고 세계 곳곳의 스파이들은 바빠졌으며  이 노골적인 전쟁 계획은 반드시 김일성에게 보내질 것입니다.


양측의 무수한 군사적 마찰 끝에 마침내 김일성이 먼저 움직였을거로 추정됩니다.(필자도 놀랬는데 아직도 미국에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차이가 분분하다,그래서 의외로 미국학계에서는 정치계와는 달리 보류중이라고 처리한다.)


자신이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이승만이 반드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싸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쏴야 전투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순간 한반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졌습니다.



※ 개인적으로 필자는 (오만과 열등감의 현 3대세습국가 북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의 역사를 논하는 글이므로 북을 좋게 비치는 글로 보일수는 있으나 이는 학문적으로 부분적인 당시의 시간적 역사적 글이니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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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청 ip1 2024-09-30 18:53:48
    학문 적인 자료는 무슨 학문적...
    북괴 입장에서의 궤변이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그 당시 한국은 탱크 1대, 전투기 1대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무슨 수로 북침을하니.
    한반도를 해방으로 이끈 세계 제 2차 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을 공부해 봐라,
    그 당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때가 무슨 조선 시대로 알고 있는 건 아닌지.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장갑차는 한국군 20여 대, 북한은 54대, 전차는 한국군은 0, 북한은 242대,
    곡사포는 한국이 118문에 사거리 5,600미터, 북한은 자주포까지 포함해 600문에 사거리 1만 미터 이상,
    군용기는 한국군이 훈련기까지 포함해 겨우 22대, 북한은 전투기를 포함해 모두 120대,
    그 밖의 박격포와 대전차포 등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병력 숫자만 해도 대한민국은 104,559명, 북한은 198,380명으로 나와 있다.

    네 알량한 시각으로 북괴의 이런 군사력이 하루 아침에 뚝딱 갖추어질 수가 있니?
    북괴는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6.25 남침까지 거의 5년간 뒤에서 전쟁 준비를 한 객관적 결과물이란다.
    북괴의 날조된 주장을 일방적으로 글을 쓰기 전,
    객관적인 시각에서,다른 시각에서 머리가 있다면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아직도 북괴 정권이 주장하는 허구의 역사를 탈북하고도 주장하고 내세우다니,
    그럴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공정한 역사를 공부해라.
    과연 Nickname이 돌통다운 짓거리를 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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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청 ip1 2024-09-30 19:20:57
    그 당시 김구가 통일 회담을 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 했을때 무슨 짓을 김일성이가 했는지도 좀 알아봐라.

    또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그 당시 통일이 됐다면, 한국의 오늘날 경제 발전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필리핀이나 베트남 정도도 안됐을 것이다.

    왜냐면 오늘날의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는
    전세계 나라중 유일하게 대한민국만이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한 위대한 한강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쟁의 폐허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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