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창기 논설위원
북한에는 도처에 김일성 동상 있지만
쿠바에는 카스트로 동상 하나도 없습니다
여행 가이드로 김일성대(大)를 졸업한 스페인계(系) 백인을 만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난달 겪은 일이다. 쿠바 수도 아바나 공항에 내린 손님들을 태운 버스가 호텔로 출발하자 그는 이름을 밝히며 웃는 낯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한국말 잘합니다. 사실은 북한말. 1976년부터 78년까지 김일성대 다녔습니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쿠바의 외교관 출신이었다. 평양에서 7년이나 살았다.
"쿠바 사람들, 북한과 남한이 따로 있다는 것 잘 압니다. 한국은 2002년 월드컵 축구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작년 베이징올림픽 야구에서 우리 쿠바를 눌러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물론 우리는 북한과 외교 관계 맺고 있고, 북한 대사관도 이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쿠바 사람들도 북한이 못 살고 한국이 잘산다는 것 다 압니다. 한국은 대사관은 없지만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무소도 있고, 현대중공업(쿠바의 10페소 지폐엔 현대중공업이 대량 수출한 이동식 발전기 그림이 들어 있다)도 나와 있고, 관광객들도 많이 오고…. 그런데 작년 가을부터 관광객이 많이 줄었죠."
그의 '친한성(親韓性) 발언'은 그저 여행자에게 친근감을 주려고 한 것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전직 외교관으로서 그는 초라한 조국의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스스로 공산당원이라고 밝힌 그는 "농지의 50%가 놀고 있고, 소비 농산물의 80%를 수입하고 있다"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 쿠바를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탕수수 재배만 보아도, 설탕 생산량이 20년 전 800만t이던 것이 작년 100만t으로 떨어졌다(쿠바 정부 통계를 인용한 미국 국무부 자료).
그래도 그는 "우리는 이래도 북한 같은 사회 아니고…"라며, 쿠바가 북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개방적이고 생활도 낫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북한에는 도처에 김일성 동상 있지만, 쿠바에는 카스트로 동상 하나도 없다"고도 했다.
그런 북한에서 노동신문이 지난 2일, 미국에 대해 쿠바 봉쇄를 해제하라는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냉전의 산물"인 봉쇄 정책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걷어치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쿠바에 빗대어 북한이 내심 하고 싶었던 말은 미국이 대북 제재들을 빨리 풀고 관계를 개선해 달라는 요구였을 것이다.
미국 상원은 지난 10일 쿠바에 대한 여행 제한 등을 다소 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에 대(對)쿠바 제재의 완화를 언급했고, 지난 2월 22일엔 상원 외교위원회 공화당 간사인 리처드 루가 의원도 쿠바 경제봉쇄 정책을 재평가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는 쿠바 정책 재검토가 진행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쿠바 정책에 큰 변화는 쉽지 않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지난 50년간 미국은 공화당 정부든 민주당 정부든, 쿠바의 민주화와 시장경제 도입을 관계개선의 대전제로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82)는 1959년 혁명 이후 세계 최장기 집권 기록을 갖고 있다. 작년 2월 다섯 살 아래 동생이자 혁명동지이기도 한 라울 카스트로가 국가원수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명목상 공산당 제1서기는 아직 피델이다(라울은 제2서기).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는 수교와 경제지원 등 획기적 대가를 공언하면서도 훨씬 단순한 조건만을 걸고 있다. 핵무기 포기뿐, 정치체제의 변화 같은 것은 전제조건이 아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막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다.
쿠바의 가이드는 "어쨌거나 5년쯤 뒤면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보였다. 라울도 형 나이가 될 무렵이면 혁명 1세대가 완전히 퇴진하게 될 것이고, 세습은 예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46년간, 현대 세계 제2의 장기 집권 기록을 세웠고, 2대 세습에 이어 지금은 3대 세습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북녘 주민들에겐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일까.
쿠바는 북한에 비하면 낙원이 맞읍니다. 인민들도 다소 자유롭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