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사건’이 전투라면 파리도 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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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사건은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유격대가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한 김일성 우상화과정에서 주유소습격사건과 유사한 보전보사건이 전투로 둔갑했다. 북한은 정권수립후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1955년 8월 7일 보천보에 「보천보혁명박물관」의 문을 연후 1963년 새 건물로 단장하였고, 1967년 6월 량강도 혜산시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세우고, 일본 경찰 100여명을 죽이고 60여명을 생포했다고 허위 선전을 하고 있다.
북한은 보천보사건을 다음과 같이 선전하고 있다.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金日成) 지휘하에 수행된 국내침공작전으로 작전은 최현(崔賢)의 인솔하에 한 부대를 무산 방향으로 진출시키고, 또 다른 부대를 국경지대인 임강·장백으로 진출시켜 일본군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37년 5월 하순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편성, 보천보 일대를 정찰하고 공격준비를 마쳤을 때, 무산지역에 진출한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 포위될 상황이 되자 당초 예정된 작전 개시일을 앞당겨 보천보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공격은 1937년 6월 4일 밤10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150명이 2개의 습격조와 2개의 차단조, 1개의 정치공작조로 나뉘어 제1습격조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소방서를 공격하고, 제2습격조는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하여 기관 건물들을 전소시키고 일제군경을 전멸시켰다.“
북한의 불온삐라 수준인 우리나라 좌편향 국사교과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937년 6월 동북항일연군 내의 한인 부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보천보 지역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소방서 등 일제의 행정 관청을 공격하였으며, 추격하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보천보 전투는 당시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고,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보천보전투의 실상을 들이다 보면 정말 한심하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중국공산당이 창설한 만주지역 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에서 중대급 지휘관을 하고 있든 김일성은 습격시 최초 전화선을 절단한 후 이어서 주재소를 공격했다. 야간공격을 하는데 먼거리에서 사격을 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일본경찰관은 모두 피신하였다. 기도비닉을 유지해야하는 야간공격의 기본부터 되어 있지 않았든 오합지졸이다. 표적에 대한 조준사격을 하지 않고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바람에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이들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정, 소총 6정, 권총 2정,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의사, 요리점, 잡화상 등 10여개의 점포와 주택에 침입하여 현금과 물자를 탈취했다. 이에 반항하던 일본인 식당주인이 살해됐다. 김일성 부대의 전과는 총기류 9정 탈취, 민간인 2명 사살(젖먹이 1명 포함), 민가에 방화, 돈과 물자 강탈이 전부이다. 피해자는 대부분 조선사람이었다. 보천보사건은 그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됨으로써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신문은 추측 및 과대보도가 많기 때문에 기사가 정확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보천보사건은 전투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소규모 군사행동이다. 보천보 뻥튀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김일성은 생전에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 한 것보다는 나은데, 왜 우리를 깎아내리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술회한 바 있다. 김일성의 술회를 보면 김일성 자신도 보천보사건이 별게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보천보사건에 비하면 윤봉길 의사 단독으로 감행한 상해 홍구공원 의거는 정말 대단한 전과이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홍구공원에서 기념행사를 하고 있든 일본인 핵심요원들을 폭사시켰다.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중국 원정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즉사하고 해군총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 9사단장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는 삽시간에 세계적인 뉴스로 지구촌에 전파되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전투란 두 편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장하여 싸우는 것을 말한다. 일본군이나 경찰과는 전혀 조우하지 않고 약탈만을 감행한 보천보사건을 전투라고 하기엔 부끄럽다. 만일 보천보사건을 전투라고 한다면, 중국에 주둔한 육?해군부대 지휘관을 한거번에 때려잡은 윤봉길의 의거는 세계대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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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할려구 항일했쩌요?~~잘 했쩌욤~~ ^ ^
김창영의 진술은 시간,장소,등장인물이 매우 구체적이라서 소설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중국공산당과 일제 사이에서 좌고우면했던 김일성에 대해서 주보중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시고 토론하시죠?
보천보와 김일성 진위논란은 좌우 양측의 상반된 사료가 너무 많이 발굴돼서 지금은 좌파학자들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먹히지 않습니다.
지청천의 쌍성보전투 1932.9.20(1차전 대승),11.7-11.22(2차전 패배)
이홍광의 동흥읍 전투(1935.2.13) 등 보천보 전투 이전에 이미 국내진입작전은 다수 무장독립단체에서 숱하게 시도했습니다.
좌우 항일무장투쟁단체의 투쟁노선,정세인식,세계관 등에 대한 사료발굴과 객관적인 해석이 미완성인데 오로지 동북항일연군에만 정통성을 부여하는건 좌파의 진영논리입니다.
또한 민족진영인 양세봉 조선혁명군에 좌우합작을 제안하기 전 까지(1935년 이전) 동북인민혁명군의 정강에 조선독립조항은 없었습니다.
백범은 상해임정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의 좌익입문 제안을 거절하고, 레닌의 임정지원 자금을 횡령했다는 사유로 이동휘 비서실장 김립을 처형할 만큼 해방전 까지 골수반공주의자였습니다. 몽양은 보천보 전투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이미 거물급 인사였는데 함경도 북방 까지 찾아갈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님 때문에 여운형 평전,백범일지를 다시 뒤적였지만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은 동북인민혁명군,의용군,자위대,구국군,항일산림대 등의 공동조직으로서 각군의 명칭을 취소하고 동북항일연군 제o군 제o사 제o단 이라 한다."
(신일철, 중국의 "조선족항일열사전" 연구)
악의 축 일뿐이다.
김일성과 그의 일가족보들 때문에 오늘도북한의 2400만 국민들은 정상적인 발전을 억제당하고있다.
개꼬리 백날가도 황모가못된다. 일성이네 종자는 걍 포기하자!
김일성이와 그놈의 개종자 김정은이래 100년 후에라도 북한인민들을 자가용 탈수있게
북한을 발전시킬수나 있을가?
나는 김정은이가 북한사람 더 쥐어짜고 더많이 굶겨죽인다에 만원빵을 걸겠다.
결국 김일성과 그의 일족은 인민을배신한 역적무리일 뿐이고 김정은이도 개혁캐방을
추진하지않는 이상 대를이어 역적일 뿐이다.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5-06-22 11:08:34
(북한의 경호 실무책임자가 34시간 동안 국가원수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존경 속에 50년 동안 나라를 지탱해온 국가수반의 인생 마무리 조차 권력다툼의 뒷전으로 밀리는 북한체제를 밖에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 일송정2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5-06-22 15:49:16
“혜산사건 피의자 박록금(여)의 진술은 김일성 연령 36세, 본명 김성주, 모스코바 공산대학 졸업하고 만주사변후에 소련에서 만주로 왔으며 장백현에 최모라는 내연녀가 있다. 이 내용은 권영벽,이제순,박달,박금철의 진술과 거의 일치했다.
(김일성은 혜산사건 피의자가 아니어서 판결문에 상세한 신상기록이 없고, 관련자 수사기록에 포함돼 있을 것이다.)
보천보를 습격했던 김일성은 그후 얼마 안돼서 만주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신문에도 보도되었던(1937.11.18 자 조선,동아,경성,매일신보 등)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는데 해방후 북조선에 김일성이 돌아왔다고 하니 사살되었다는 것은 결국 헛소문이었구나 하고 처음엔 생각했다. 그런데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은 32-33세의 청년장군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혜산사건 때 김일성의 나이가 36세 였으므로 해방 당시에는 44세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딴 사람이라 생각했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40세 좀 못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산대학 출신의 대단한 사람이라고 박금철,마동희 등이 말했었다. 더 구체적인 개인신상은 기억나지 않는데 신문조서를 찾아보면 당장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수령독재 폐해를 인정하기는 커녕 여전히 지속되는 북한당국의 근거없는 체제우월감, 남한좌파의 자학사관 출발점이 역사왜곡에 기초한 김일성 우상숭배에 있기에 김일성 진위논란 해소가 남북한 역사,이념,정체성 회복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향민,연안파 망명객,쏘련군정 인사들의 단편적인 김일성 가짜설은 생략하겠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지원을 받은 이명영의 김일성 연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좌파학자들의 주장도 존중합니다. 김일성 진위논란의 해결방법은 간단합니다. 소형트럭 한 대 분량이라는 700여명의 혜산사건 관련기록을 전부 공개하면 됩니다.
작년에 올린 글을 칮아내서 날마다 댓글다는 것도 조금 웃기고.
김일성에 대해 하고픈 말이 많은것 같은데 토론 글을 별도로 올리시는게 어떤지요?
이명영의 연구결과는 이 논란의 일부분으로서 참고자료일 뿐이지요.
6.25 개념 조차도 냉전종식후 중국,러시아 정보가 공개되기 전 까지, 좌파학자들이 수정주의 이론을 인용해서 김일성 남침 책임론을 부정했습니다. 제 논지는 누가 맞고 틀리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사실확인을 위한 북한당국의 정보공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로 발제를 하시라니까요.
날마다 비슷한 댓글 미안하지만 지겹습니다.
이넘들 눈깔에눈 억압받고 굶어죽는 민중은 절대안보이고 미친개아부지 역사만 보인당께.
뒤진 미친개아부지역사는 카륜회의에서 소활바령회의까지 너보다 더 잘알지만
고작 미친개의과거라 거론할 가치가없다고 생각할뿐이당께.
잘놀라 ~~ 개 후손들아~~너네 미친 개아부지역사는 관심없당께로..하하하....
미안하다는게 뭔솔이유?~~부꾸넙다는게 뭰솔이유?~~수치라건 먹는게유?~~
그것두 1년두 더된 발제문에다?....
잼 없어 이런거.... 여기서 이런거 관심있는애는 너밖에 없단다. ㅉㅉ
별 미친것들이 다잇구나.. ㅋㅋㅋ
썻어진 뼈다귀 하나놓고 서로 으르릉 거리기 좋으냐? ................. 강아지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