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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좌빨 정책으로 동독에 인민들을 해방시키고 통일한 서독 통일 독일
Korea, Republic of 통일독일 0 616 2014-10-29 21:50:04

우리에 목적은 북한 독재에 억압받는 인민들을 돕고 해방하는 것으로 동일합니다....또한 한국으로써는 경제에 힘을 얻고자 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다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로 남남 갈등이 있습니다.... 서독도 똑 같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무식하게 남한 방송만 믿지 말고 이글을 두번만 정독하고 평생토록 종북 좌빨 욕하세요....

 

 

 

서독의 통일정책은?

 

 

  서독의 통일(내독)정책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통일이 기본법 상의 명제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까지는 어느 정부, 어느 정당도 통일을 현실적인 정책목표로 설정하거나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냉전체제 하에서 통일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데다, 통일의 열쇠를 쥔 2차 대전 전승국들이 독일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어 독일인들이 통일을 외칠수록통일에서 더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둘째, 서독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은 서로 명확히 다른 통일노선을 추구하고 있어 집권당이 바뀔 때 마다 내독정책의 기조가 상당히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친미·보수 정당인 기민당은 자석이론’(Magnet Theory)에 따라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통일정책을 추진한 반면, 사회주의 정당인 사민당은 통일이 사실상 어렵다고 보고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 ¨herung)의 기치 아래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증진함으로써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셋째, 서독 양대 정당의 정책노선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정부 정책에서 몇 가지 기본원칙은 일관성을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기본법 23(기본법 적용대상 지역)116(국적조항)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친미·친서방 노선에 큰 변화가 없었으며, 내독정책에서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완화와 동독 주민의 삶의 질개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왔다는 점, 1968년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모든 정권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는 점 등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중도정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 FDP)이 대연정 기간을 제외한 모든 기간 동안 기민당 혹은 사민당의 연립정부 파트너가 되었던 데다, 자민당 부총재인 한스 디트리히트 겐셔가 1974년 슈미트 정부 이후 1990년 독일통일 시까지 16년간 외무장관으로 재임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제1차 동서독 정상회담(1970.3.19) -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개최된 브란트 서독총리와 슈토프 동독총리 간의

제1차 정상회담은 서로의 입장차이만을 확인했을 뿐 성과없이 끝났다.

 

 

각 정권의 통일정책(혹은 내독정책’) 및 대동독 정책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민당 아데나워 정부의 힘의 우위정책(49.9~63.10)

 

  초대 콘라드 아데나워 정부는 국제정치 현실에 비추어 통일은 미래의 목표일 뿐 당면한 정책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최우선 정책목표를 서독의 완전한 주권회복, 경제재건, 서방과의 결속 강화에 두었으며,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자석이론대로 서독이 정치·경제적으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하면 동독의 붕괴와 소련의 점령지(동독) 포기를 유도하여 통일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아데나워 정부는 통일방안으로서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고, 동방정책에서는 힘의 우위와 동독 고립화를 위해 서독의 유일대표성과 할슈타인 원칙을 견지했으며, 오더-나이세 국경선 인정을 거부했다.

 

  아데나워 정부의 친서방 및 대소·대동독 강경정책은 국내외 정세변화로 중요한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618월 동독의 베를 린장벽 구축으로 인한 제2차 베를린 위기와 1962년 미국·소련 간의 쿠바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아데나워의 강경노선에 대한 서독 국민들의 우려와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미·소간에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고 사회당의 젊은 정치인 빌리 브란트의 작은 걸음 정책’(Politik der kleinen Schritte)이 인기를 얻게됨에 따라 아데나워 총리는 퇴진하고 그의 친서방·대동독 강경정책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및 키징거 총리의 변화모색(63.10~69.10)

 

  아데나워의 후임인 에르하르트 총리는14) 아데나워 정부의 정책을 대부분 답습하면서도 국제정세의 변화를 반영, 대동독 및 대동유럽 관계 개선을 모색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경제부진으로 퇴진했다.

 

  이어서 기민당과 사회당 간의 대연정으로 집권한 쿠르트 키징거 정부 시기는 대내외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 시기여서 부분적으로 정책노선 변경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동·서간의 데탕트가 진전되고 프랑스가 NATO군에서 탈퇴하는 등 서구동맹 간의 결속이 이완되기 시작했고, 3세계에서 다수의 신생국이 출현함에 따라 친서방 일변도의 정책과 할슈타인 원칙의 지속이 어렵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전후에 태어난 68세대들이 친미적인 부모세대를 조롱하고 공산 혁명가인 체게바라와 호치민을 숭배하면서 동독과의 접촉 증대를 요구하여 기존 정책노선의 대폭적인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기민당 출신의 키징거 총리는 연정파트너인 빌리 브란트 외무장관의 영향을 받아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 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동독의 사실상 승인 등 일부정책 노선을 수정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대폭적 변화요구를 외면한 채 서방중심 외교노선, 서독의 유일대표성 및 서독 주도하의 통일원칙 등 기본적 정책노선을 고수함으로써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민당이 196910월 대연정을 파기하고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기민당은 건국 후 처음으로 사민당에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1969.9~1974.5)

 

  젊은 세대의 변화 욕구를 발판으로 집권한 브란트 총리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표방하면서 동독은 물론 소련·동유럽권과의 적극적 접촉을 추진했으며, 특히 동독과는 ‘1민족 2국가를 표방하면서 대등한 입장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했다.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은 현실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므로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증진하여 사실상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으로 통일정책이라기 보다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브란트의 대소 관계개선 노력과 동독에 대한 적극적 제의를 계기로 19703월과 52차에 걸쳐 동서독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그해 8월 이후 소련, 폴란드, 체코와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동방조약을 체결했다. 이어서 197212월 동독과 동서독기본조약을 비롯한 각종 교류·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19739월에는 동서독이 유엔에 동시가입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모든 분야에서 동독과의 교류와 협력이 대폭 확대되었다. 그러나 19745월 브란트 총리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의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브란트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 동방정책의 태동 - 1969년 12월 7일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반나치 봉기 희생자 추념비 앞에서 무릎 꿇고

헌화하는 빌리 브란트 총리. 이 장면은 독일의 진지한 과거 반성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실용주의 노선(1974.5~1982.10)

 

  브란트에 이어 집권한 사민당의 슈미트 총리는 브란트의 정책노선을 계승하면서도 브란트에 비해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슈미트 총리는 동·서간의 데탕트 및 유럽통합 분위기에 편승하여 서방과 소련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추진하려 했으나, 1979년을 전후하여 데탕트 분위기가 퇴조하고 동·서 진영 간에 긴장이 고조됨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5년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CSCE)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을 계기로 서구에서는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19791212NATO가 소련 중거리 핵미사일의 유럽배치에 대응하여 이른바 “NATO의 이중결정을 한데 이어 1227일에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 ·서간의 긴장이 대폭 고조됨으로써 슈미트 정부가 브란트의 대외정책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서독정부는 서독 독자외교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고, 슈미트 정부는 새로운 정책의 개발보다는 기존정책의 성과관리에 치중하는 위기관리자의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헬무트 콜 총리의 통일실현 시기(1982.8~1998.10)

 

  헬무트 콜 정부는 사민당의 연정파트너인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불화로 연정파트너를 기민당으로 바꿈에 따라 13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사회당 정권의 성과 없는 긴장완화 정책과 사회보장 혜택의 축소문제를 둘러싸고 사민당과 자민당 간의 정책노선에 차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콜 정부는 이른바 서방과의 협력에 바탕을 둔 동방과의 협력을 표방하면서 아데나워 초대총리의 자석이론힘을 통한 변화정책으로 회귀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와 슈미트 정부가 이룩한 신동방정책의 업적을 그대로 계승하여 소련 및 동독과의 협력관계를 계속 확대해 나갔다. 대다수 국민들이 동독과의 활발한 교류·협력 관계가 그대로 지속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1985년 집권한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 ·서간의 화해 분위기가 다시 조성된 데다 동유럽에서 자유화·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어 이들 여건의 변화를 적극 활용할 필요도 있었다.

 

  콜 정부는 1983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쳐 동독에 195천만 마르크의 현금차관을 제공하고 1987년에는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서독방문을 초청, 동서독 간에 화해·협력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9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그해 말까지 46만 여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하자, 콜 정부는 사민당과 각 주정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독 탈출자를 전원 수용하는 한편, 동독 공산정권의 국가연합 통일방안과 경제원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동독혁명을 통일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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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람님 ip1 2014-10-29 22:29:17
    원글님아 독일은 독일이고 한반도 (조선반도) 는 사정이 다르오. 어디한번 독일식 방법그대로 옮겨와 통일하자고 북한과 대화해보시오. 염치도 없이 어디 남의 통일방식을 거들먹거립니까. 한반도는 특이한 상황이 올시다. 독일 통일과 아주 다른 상황이라구요. 우선 통일할려면 개혁개방이 우선입니다.( 자유로운 국제인터넷망과 자유로운전화통화. 인권에대한 옳바른 인식., 정확한 세계화를 북한에 주입) 이 지금상황에서는 제일빠른 통일방식이 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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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독일 ip2 2014-10-29 22:47:09
    조선사람님 토론 예의가 바르시군요..
    님에 말씀 중
    "우선 통일할려면 개혁개방이 우선입니다"
    이부분을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가장 효과가 있을까? 찾는 것이 진실인데...... 국민들은 정치꾼들에 속아서 엉뚱한 싸움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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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독일 ip2 2014-10-29 22:49:24
    정도에 차이가 좀 있지만.... 동독도 독재 공산국가였지요.. 여행도 통제하고, 정치범 수용소도 있고 별차이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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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잘일어보면 ip2 2014-10-29 22:51:03
    글을 잘 읽어보면 개혁개방을 어떻게 유도 했는지 나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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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가재미있네요 ip3 2014-10-30 02:39:20
    동독도 북한처럼 일당 독재였습니다...해외여행도 북한처럼 막았구요....동독에 군중 시위는 마지막 봉기였지요....왜 서독에 햇볕정책에 동독인들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어서요....동독은 형식만 다당제지요.... 공산당들도 형식은 다당제입니다.... 삐라도 좋은 방법입니다...여기에 민복님이 지향하는 것처럼 시끄럽지 않게 열심히 하면 됩니다..... 한나만 강조할게요... 남북적대정책이 없으면 망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김씨독재자와 남한의 새누리 보수 정권입니다... 왜 그것 없으면 내부에 적이 그 들을 처단 하니까요.... 적대적 동지 관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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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람님 ip1 2014-10-30 02:54:55
    해외여행 북한처럼 막았구요. 막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이는 못다녀도 북한보다는 훨씬 100배 형편이 좋았습니다. 시위는 마지막이던 처음이던 그렇게 시위한다는자체가 북한보다 훨씬 집회자유가 조금이라도 있기때문이지요. 동독인들이 눈을뜬것은 해볓정책이 아니라 서독과 편지거래도 원할하고 조금씩 자유가 보장되고 ...... 하였기 때문에 문이 열린것이지요. 동독의 다당제는 형식만 있다쳐도 약간의 목소리를 냈습니다.북한처럼 아예 계시나 마시나가 아니였지요. 그러니 마지막이라도 야당의 힘에의하여 시위가 이루어졌지요. 그리고 삐라는 누가날리던 어느시간에 어떤 방법으로 날리던 다 유효적입니다 . 낮에 날리는 삐라가 다르고 밤에 보내는 삐라가 다르지 않지요 . 단지 밤에 보내는 삐라가 효율적이라 생각하심은 대한민국의 북한의 위협에 겁먹을것입니다. 한국이 그렇게 겁먹고 비굴하면 설상 민복씨가 밤에 몰래 삐라를 보낸다고해도 2번이상 보내기 힘들것입니다. 밤삐라도 종북 한국인들에게 규탄받는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왜냐면 남한의 비굴함을 알기에 한발나서서 밤삐라에 대해서도 협박을 할것입니다. 나도 하나만 강조할게요. 님도 낮삐라 밤삐라 편가를생각 말고 . 어서 빨리 종북의 비굴한굴 에서 어서 하루빨리 벗어나세요. 그게 님이 생존방식이예요. 북한의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님 팬티까지 다 벗어주어야 합니다. 해볓정책으로 북한이 옷을 벗는게 아니라 도리여 당신 남한사람들이 옷을 벗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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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ㅎㅎ ip3 2014-10-30 03:23:53
    북한 김씨왕조에 쇠뇌교육이나 남한에 언론을 장악한 보수정권에 쇠뇌교육이나 정치 놀음 같아요.... 한국사람 만만한 사람 봤어요. .... 님은 장사해서 이득 볼려고 할때 다른 사람에게 웃으면서 다가서나요.. 아니면 성질내면서 뺏앗아 올듯 하면서 다가서나요..... 미국은 달콤한 초코릿으로 열등한 국민들을 꼬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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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ㅎㅎ ip3 2014-10-30 03:36:58
    남북에 차이는 큽니다.. 님에 이론은 비슷 할 때 통하는 말이고요....
    경제력에 수십배 전투력에 수십배.....
    대학생이 초등학생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방법론 입니다...
    워낙 쇠뇌가 되어서 초등학생에게 먹힐 수 있다고 말하면 더이상 대화 불가능 억지니 말 할 가치를 못느끼고요.
    70살 이상된 사람들은 태어날 때 국적이 한국인이 아니고 조선인 이였습니다...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가 태생하지 않았으니요...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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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ㅎㅎ ip3 2014-10-30 03:44:40
    님이 말하는 동서독 편지왕래도 햇편정책에 결과물이고.....
    지금 북한 사람들에 이정도 동요도 1997년 종북 좌빨정부에 혓볕정책에 결과물이고요...
    그래서 미국에 크린턴을 비롯한 민주당이 적극지지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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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람님 ip1 2014-10-30 08: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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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람진헤 ip4 2014-10-30 1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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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람님 ip1 2014-10-30 12: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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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람진혜야 ip4 2014-10-31 0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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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온글 ip4 2014-10-31 07: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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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람님 ip1 2014-10-31 08: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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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게 ip4 2014-10-31 1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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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채이 ip5 2014-10-31 10: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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