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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경, 남한 탄부의 월급수준
Korea, Republic of 민복 0 731 2015-01-04 07:13:55

*이 기사는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놓고 고생을 비교하는 탄부들의 생활기사를

1975년 조갑제 대기자가 쓴 대목.

*내가 짐작하건데 당시 남한돈 300원 정도가 1딸러 가치

 

임만기씨가 보여주는 월급봉투를 보니 입적(입사 대신 그렇게 부른다)

첫달(1975년 7월) 월급은 3만9천2백88원이었다.

76년 4월 봉급은 4만2천7백65원이었는데 그 다음달엔 7만4천8백75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것은 後山夫이던 그가 막장 선산부로 승격한 덕분.

『부자가 된 것 같았어요』

그때의 감격을 그는 지금도 못 잊는 듯 했다.

77년 5월엔 11만2천9백5원,

78년 5월엔 14만4천7백16원,

79년 5월엔 25만9천8백24원,

사북 사태가 있었던 80년 5월엔 28만1천7백76원,

81년 6월엔 30만6천4백79원,

82년 6월엔 29만6천1백45원,

83년 5월엔 31만3천77원.

이 31만3천77원 가운데 노조비, 의료보험비, 연탄비, 수도비, 국민 저축, 마을 금고 저축 등을 제하면 26만4천9백22원이 그의 실수령액이었다.

다섯 식구를 거느린 그의 한 달 평균 잡비는 술값 2만원, 담배값이 한 달에 1만원(청자를 피움), 세 어린들의 간식비 월 3천 원 등으로 나타났다.

 한 달에 15~20만원으로 다섯 식구가 살아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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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무원 ip1 2015-01-04 14:37:34
    78년에 9급(5급 을)공무원 초봉이 5만원 정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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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복투사 ip2 2015-01-05 03:38:21
    이민복 선생님, 좋은 글을 많이 올려주어서 감사합니다.
    특히, 영국까지 가서 큰 일을 하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머리가 숙여 집니다.
    김주일 선생님께서 이민복 선생님의 북한동포 직접 돕기 의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온라인에서 전투적으로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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