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경, 남한 탄부의 월급수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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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놓고 고생을 비교하는 탄부들의 생활기사를 1975년 조갑제 대기자가 쓴 대목. *내가 짐작하건데 당시 남한돈 300원 정도가 1딸러 가치
임만기씨가 보여주는 월급봉투를 보니 입적(입사 대신 그렇게 부른다) 첫달(1975년 7월) 월급은 3만9천2백88원이었다. 76년 4월 봉급은 4만2천7백65원이었는데 그 다음달엔 7만4천8백75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것은 後山夫이던 그가 막장 선산부로 승격한 덕분. 77년 5월엔 11만2천9백5원, 78년 5월엔 14만4천7백16원, 79년 5월엔 25만9천8백24원, 사북 사태가 있었던 80년 5월엔 28만1천7백76원, 81년 6월엔 30만6천4백79원, 82년 6월엔 29만6천1백45원, 83년 5월엔 31만3천77원. 이 31만3천77원 가운데 노조비, 의료보험비, 연탄비, 수도비, 국민 저축, 마을 금고 저축 등을 제하면 26만4천9백22원이 그의 실수령액이었다. 다섯 식구를 거느린 그의 한 달 평균 잡비는 술값 2만원, 담배값이 한 달에 1만원(청자를 피움), 세 어린들의 간식비 월 3천 원 등으로 나타났다. 한 달에 15~20만원으로 다섯 식구가 살아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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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국까지 가서 큰 일을 하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머리가 숙여 집니다.
김주일 선생님께서 이민복 선생님의 북한동포 직접 돕기 의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온라인에서 전투적으로 인사드립니다.